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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15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15일 맑음
서원에 향회를 개최하였다. 향례를 고한 뒤에 공적인 논의를 개설하여 재임으로 進士 <인명>金奎學인명>(1879.02~1880.02)을 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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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7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7일 맑음
밥을 먹은 후 道의 호소문을 다시 올렸다. 狀頭는 <지명>漆谷지명>의 幼學 <인명>李相獻인명>, <지명>仁同지명>의 幼學 <인명>張來遠인명>, <지명>禮安지명>의 幼學 <인명>李中五인명>였다. (호소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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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1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5일 맑음
齋任이 장차 향례를 행하려 할 때 저들 무리가 소란을 일으키며 막고 희롱하여 나가려하지 않았다. 향례를 빠트려 관청에 제출할 文報를 작성했다. 두 사람을 보내 오래 기다리게 하고, 겸하여 일전에 퇴자를 맞은 두 차례 감영의 제음이 당도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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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4월 22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22일 맑음
(감영에) 보고한 초안은 本府에 보고한 것과 같다.
옥산서원 유생 등이 관찰사께 상소를 올립니다. 제음에서는 舊儒인 <인명>李能章인명>, <인명>李在鐘인명>, <인명>李能任인명>과 新儒인 <인명>李在謙인명>, <인명>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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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23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3일 맑음
이미 서원의 일로 날짜를 정했으니 향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서원의 首席에게 만나서 사유를 진술하는 것이 규례에도 있고 또한 일에도 합당하다. 그래서 재임이 그날 경주부에 들어가 서원의 수석인 수령 <인명>金元性인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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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2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5일 맑음
관청에서 帖文이 당도하였다.
양쪽에서 사실에 근거해서 고한 것을 감영에 보고하니, 제음의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피차를 막론하고 이른바 선비의 모자를 쓰고 선비의 복장을 한 자들이 서로 비방하니, 거의 같은 꼴을 했던 것 같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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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16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6일 맑음
관청에 文報를 드리는 것에 겸하여 두 차례 감영의 제음이 도착했는지를 알아보려 하였다. 그러나 관청에서는 끝내 성주[政軒]에게 일어난 火災로 인해 바야흐로 피해를 제거하는 일에 힘쓰니 조사를 기다리라는 말만 하였다. 황송한 때이기는 하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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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9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9일 맑음
<지명>覺里지명>의 진사 <인명>李能模인명>가 와서 서원의 일을 말하면서 겸손하고 사양하는 말로 사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모욕을 더하여 말을 하니, 통탄하고도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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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26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6일 맑음
저번 감영의 제음은 이미 환수되고, 다음의 제음은 실제로 보고해온 敎示이다. 일부러 돌이켜 깨우쳤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엄중하게 처단하고 막아 단속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관청에 보고하여 돌아온 제음이 또한 이와 같이 찬찬히 고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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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2월 1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2월 1일 맑음
堂中에서 향례를 거행한 후 公議를 개설하여 有司로 進士 <인명>李邁久인명>를 선출하여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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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30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30일 맑음
오후에 老少가 일제히 서원으로 나아왔다. 기록을 합해보면 80여 명에 이른다. 저녁식사 후에 <인명>李芝材인명>가 자식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며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점차로 잇따라 일어나 스스로 물러날 뜻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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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24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4일 맑음
신유들이 "서원에서 기다렸다가 공개적으로 의논할 것"이라는 관청의 판결문[題音]을 보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서류의 원본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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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5일
| 高宗 20
| 癸未
|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11월 5일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감영 아래에서 도회를 열었다. 본손은 10명이 참가했다. 고을의 선비로는 <지명>露谷지명>, <지명>杜洞지명>, <지명>楊月지명>, <지명>山岱지명>, <지명>杞溪지명>, <지명>里門지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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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27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7일 흐림
서원으로부터 관청의 帖文이 전달되었다고 하니, 바로 감영의 甘結이 당도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시 신유들이 옥산서원을 어지럽힌 것에 대해 이미 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제음의 칙서가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숨을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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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14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4일 맑음
일제히 서원으로 향해 왔는데, 각 마을에서 모인 사람이 합하여 40여 명이었다. 해이해지는 마음을 바꾸고, 소홀히 하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없앴다. 저들이 명성과 위세를 올리는 것을 개탄하며, 빈틈을 파고들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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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7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7일 맑음
밥을 먹은 후 道의 호소문을 다시 올렸다. 狀頭는 <지명>漆谷지명>의 幼學 <인명>李相獻인명>, <지명>仁同지명>의 幼學 <인명>張來遠인명>, <지명>禮安지명>의 幼學 <인명>李中五인명>였다. (호소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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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2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5일 맑음
감영으로 갔다 돌아온 심부름꾼이 회답하는 題辭[回題]와 關旨를 보여주며 전했다. 감영에 올린 호소문의 초본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일전에 한 道의 儒者[縫掖]가 본 고을 옥산서원의 일로 감영에 일제히 모여 두 차례의 제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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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2월 1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5일 맑음
유사가 공무를 집행하였으나 저 무리들이 이로부터 억제하여 움츠려 물러났다. 감영의 관문에 "붙잡아 가두고 보고하라[捉囚報來]"는 네 글자로 인해 행패를 부리는 것을 꺼리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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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1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9월 1일 맑음
향례를 마친 후에 각자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지명>覺里지명>의 <인명>李在謙인명>이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자리에서 도리에 맞지 않은 말을 내어 서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면서 일제히 큰소리를 질렀다. 남 보기에 좋지 않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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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11일
| 高宗 21
| 甲申
| 비가 오다가 갬
11일 비가 오다가 갬
숙소에서 文報를 작성하여 관청에다 변고를 알렸다. 그것을 바탕으로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당일로 府에 일제히 나아가기를 기대하였다. 앞서 간 여러 사람은 이미 말을 하고, 뒤에 간 사람들은 文報를 올렸는데, 마당에서 몰아내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