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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12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2일 맑음
의논해서 營門에 호소문을 보냈다. 제음이 돌아와 이르렀다. 訴狀과 제음은 위[3일 일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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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13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13일 맑음
3인이 체포되어 함께 하옥되었다. 통문으로 고을의 각 門中과 斯文의 106곳에 이 사실을 고하였다.
본 서원에서 신유들이 일으킨 변고는 갈수록 더욱 방자하여 이번 享禮를 치르지 못하는 극단에 이르게 되었다. 300년 동안 예의를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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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2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일 맑음
관아에서 내려온 첩문과 저 무리들이 감영에 올린 탄원서에 대한 답장[狀題], 그리고 關文이 도착했다. 일제히 종가의 집[宗堂 무첨당]에 모여서 서로 돌려보고는 몹시 놀랐다. 대개 관문에 적힌 아주 엄하게 이끌어 깨우쳐주려는 뜻은 저들의 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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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29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29일 맑음
本府의 府尹이 <지명>永川지명>의 관아에서부터 돌아 서원에 이르러 하루를 묵고 급히 돌아갔다. 이미 함께 주인의 지위에 있으면서 다음날 아침의 香禮로 가득해야 할 밤에 이렇게 빈 서원에 이르렀다. 오늘 지나며 돌아본 사람은 체면이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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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3월 12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12일 맑음
相久와 炳久를 보냈더니 감영의 제음이 당도했다. 당도한 제음에 대한 호소문의 초안은 다음과 같고, 그 狀頭는 <인명>鄭益儉인명>, <인명>李相久인명>, <인명>權宜準인명> 등이었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의 변고는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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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1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9월 1일 맑음
향례를 마친 후에 각자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지명>覺里지명>의 <인명>李在謙인명>이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자리에서 도리에 맞지 않은 말을 내어 서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면서 일제히 큰소리를 질렀다. 남 보기에 좋지 않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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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12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2일 맑음
감영의 제음이 왔다는 뜻을 한 사람을 통해 보내왔다. 能琦가 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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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3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3일 맑음
또 의논해서 문중에 호소문을 보내드렸다. (이것을 쓴 사람은) 幼學 <인명>李玉祥인명>, <인명>李在璜인명>, <인명>李能立인명> 등이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의 선조를 모시는 옥산서원에서 新儒들이 일으킨 사변은 직접 아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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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14일
| 高宗 21
| 甲申
| 맑았다가 비가 옴
14일 맑았다가 비가 옴
都色에게 牌旨를 내려 곧 <지명>沙谷지명>에 있는 進士宅에 보였다. 내려진 패지의 말[牌辭]은 곧 이러했다. 일의 면모가 부득불 그러하다. 사림에서 말하기를 享禮를 빠뜨린 후이니 香禮에서의 拜謁 여부를 어찌 말할 겨를이 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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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4월 5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5일 맑음
호소문이 당도하였다. 狀頭는 <인명>鄭宇載인명>, <인명>權宜恒인명>, <인명>李在熺인명> 등이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에서 음력 2월 享禮를 빠뜨린 사변에 대해 반드시 本邑으로부터 다른 징계가 있을 것이라는 감영의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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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14일
| 高宗 20
| 癸未
14일
官府에서부터 감영의 제음이 왔다. <인명>李在斗인명>, <인명>李能漢인명>, <인명>李台久인명>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가 선현의 선원에서 그런 망측한 사변을 당한 것은 이번 초하루 향례를 빠트릴 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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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13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3일, 맑음
종택에서 모임을 갖은 당일 오후에 <지명>杜洞지명>의 <인명>權宜奭인명>이 감영으로부터 돌아왔다. 감영의 題音이 비록 아주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뉘우쳐 깨닫게 하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향중에서 감영에 청원서를 올렸다. 청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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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5일 맑음
관청에서 본 서원의 사림에 帖諭를 내렸다.
본 서원은 바로 많은 선비들이 禮로써 사양하는 곳이며, 한 고을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곳이다. 그래서 마음에 점차로 마땅함을 잃는 것이 있으면,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을 선도해야 한다. 그런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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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3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3일 맑음
<인명>能章인명>과 <인명>能新인명>을 보내 府에 들어가 나중에 엄히 징계하라는 감영의 제음에 대한 대략적인을 염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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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12일
| 高宗 20
| 癸未
| 비
12일, 비
보름에 있을 향례의 자리에서 반드시 저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킬 일이 있을 것이기에 재회에서 변화에 대응하는 뜻을 남북의 각 마을에 두루 알려주었다. 저 무리들이 이른바 새로 선임한 재임의 사임을 청하는 문서를 바로 <인명>李珏인명>이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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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2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일 맑음
어제 <인명>李在謙인명>의 말은 결단코 묻지 않고 둘 수가 없었다. 이미 連名으로 <지명>覺里지명>에 글을 써서 보냈다.
<지명>寧海지명>의 여러 어르신께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에 일을 함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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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23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3일 맑음
관청의 帖文이 당도했다고 하였다. <인명>孫星煥인명> 등의 뜻으로 題音을 보내왔다.
안으로 서로 배척하기를 꾸미며 그칠 줄을 알지 못하니, 詩와 예절을 배운 고장에서 이렇게 서로 맞부딪치며 싸우는 습속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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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9일
| 高宗 21
| 甲申
| 비
9일 비
龜岡影堂 회중으로부터 의논을 꺼내었다. 그로 인해 望香禮 때 공적인 논의를 개설하여 재임을 지명하자는 뜻을 都色에 패지로 내려 鄕中에 두루 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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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2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5일 맑음
본 서원에서 향회가 열렸다. 新儒 몇 사람들도 또한 회의에 왔다. 공개적인 회의에서 서원의 힘이 근래에 심히 쇠약해지고, 또한 재앙의 해를 당하여 제공하는 것이 이전에 지급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는 완문을 벽에 걸어놓으니, 스스로 줄이고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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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30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30일 맑음
오후에 老少가 일제히 서원으로 나아왔다. 기록을 합해보면 80여 명에 이른다. 저녁식사 후에 <인명>李芝材인명>가 자식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며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점차로 잇따라 일어나 스스로 물러날 뜻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