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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6일
| 정조13
| 기유
26일院長과 黃氏 집안의 여러 사람이 <건물명>風乎亭건물명>에 유숙하였다. 이날 밤 큰 비가 내려 다음날까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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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6일
| 정조12
| 무신
16일본 서원의 齋席인 <인명>金憲慶인명>와 본 서원의 首席인 <인명>孫曾顯인명>가 천연두를 앓아 자리에 나가지 못했다. 單子를 발행하여 鄕中에서 거듭 추천을 받았다. 전직 관료[原任]인 院長 <인명>孫益顯인명>는 院長 <인명>李弘冑인명>를 추천했고, 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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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1일
| 정조13
| 기유
2월 1일아침에미리<지명>서울지명>로사람을보내疏廳에편지로알렸다.아침식사후에<인명>全始玉인명>가서당의모임에도착했는데,<지명>서울지명>로사람을보내기전에이르지못한것을한스러워했다.<인명>全始玉인명>가네선생의사적초안을보고會中에말하기를"이번에사적을고쳐기록한것이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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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18일
| 高宗 20
| 癸未
| 비
18일 비
늙고 젊은 여러 회원들이 비를 무릅쓰고 서원으로 올라왔다. 오후에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都執禮는 <인명>李在璜인명>이고, 亞終獻은 <인명>權致馹인명>과 <인명>李敏久인명>였다. 저들 가운데 <인명>손성환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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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7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7일, 맑음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뱃길로 일제히 나아갔다. 英齋會 회원 백 수십 명이 온통 물의 천지가 되어버린 곳을 건넘에 먼저하고 나중함이 있지 않으니,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같음을 볼 수 있었다. 고을의 선비 27명에게 점심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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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1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8월 1일 맑음
향례를 마치고 출발에 즈음하여 <인명>韓有鍾인명>이 監營에서부터 곧장 서원을 지나는데 미리 말하기를 "감영의 판결문[題音]이 이미 경주부에 내렸으니, 서원에 모인 여러 사람들은 관아에서 내려질 帖文을 머물러 기다리라."라고 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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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1일
| 정조12
| 무신
21일<인명>黃泰熙인명>가 神主를 다시 쓸 때에 <인명>黃弼熙인명>에게 급히 내려와 창의소를 조사하여 일을 밝히고, 곧장 本州에 도착하여 본 서원에 편지를 보내 서원의 유생들에게 邑中에 일제히 모여 줄 것을 요청했다. 進士 <인명>黃景幹인명>, 院長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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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0일
| 정조13
| 기유
20일바야흐로 사람을 <지명>서울지명>로 보냈다. 출발한 조금 뒤 午時에 본 고을의 <관직명>牧使관직명>인 <인명>具膺인명>가 禮官과 감영의 關文으로 본 서원에 급하게 통보하였다. 또한 帖文을 내려 술을 담당할 유사[酒有司] 한 사람을 정하여 사액을 맞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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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29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9일 맑음
저들의 무리 가운데 몇 사람이 서원에 당도하여 공적인 모임을 개설하기 위함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이른바 有司는 본촌의 <인명>李芝材인명>와 <인명>李鍾壽인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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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9일
| 高宗 20
| 癸未
| 흐림
9일, 흐림
서원의 노비가 감영으로부터 돌아왔기에 침소에서 卽君의 편지를 보니, 감영의 뜻은 아마도 돌이켜 깨닫게 하려는 속뜻이 있는 것 같아 끝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마음을 느긋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제 향회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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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8일
| 高宗 20
| 癸未
| 비
8일, 비
英齋에 고을사람들의 모임 자리를 마련하고, 본부[慶州府]에 마을의 청원서[鄕狀]을 드리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청원서의 우두머리[狀頭]는 <인명>孫永烋인명>, <인명>李在斗인명>, <인명>崔昺壽인명>이었다. 청원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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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5일
| 高宗 20
| 癸未
|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남
5일,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남
또 뒤따라 한 사람을 (감영으로) 보냈다. 떠난 지 오래되어 감영에서 내린 문보와 제음(題音)이 나왔다. 文報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은 바로 우리들 선대의 스승이신 <인명>文元公 晦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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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9일
| 高宗 21
| 甲申
| 흐림
甲申年
2월 9일 흐림
新儒의 무리들이 11일 大祭를 지낼[享禮]를 지낼 때에 일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을 했으나 의견이 일정하지 않았다. 외부인들 역시 가버리고 변화를 보고 의논하여 처리하자고 하였다. 오후에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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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3월 20일
| 高宗 21
| 甲申
| 흐림
20일 흐림
宗堂에서 문중의 회의를 개최하여 다시 감영에 호소문을 올리자는 뜻에 대해 의견을 종합하여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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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4월 4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4일 맑음
감영의 제음이 당도하였기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각각 스스로 자금을 마련하여 일제히 감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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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4일
| 정조13
| 기유
24일본 고을의 禮吏가 <건물명>洛峰書院건물명>의 최근 사례를 베껴왔다. 그 儀式의 사례를 보면, 諡號를 받들고 나온 宣諡官을 그 本家에서 시호를 받는 이의 神主를 모시고 나와 儀式을 행하고 맞아들일 때[延謚]에 관한 말이 많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禮吏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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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17일
| 高宗 20
| 癸未
| 비
17일 비
典祀官이 지금과 같이 일이 있을 때를 당하여서는 일을 처리하는데 잘못할 수가 없다. 해마다 조금씩 인원을 갖추었을 뿐이나 들여보내면 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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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6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6일, 맑음
남천이 넘쳐흘러 고을의 선비들이 회의에 참석하는데 때에 맞추어 오고가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문중에서 남쪽으로 오는 날짜를 부득이 물렸다. 그리고 말과 하인을 거느린 다섯 사람이 먼저 뱃길로 경주부에 들어갔다. 새롭게 유생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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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29일
| 高宗 20
| 癸未
| 흐리다가 맑음
29일 흐리다가 맑음
신유들이 초하루의 향례에 일제히 모인다는 말이 있기에 재임이 이전과 같이 혼자서 간다면 아마도 일에 알맞게 대처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많은 인원이 함께 나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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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28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28일 맑음
감영으로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돌아와 英可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호소문에 대한 제음이 아직도 내려지지 않은데다 서로 심하게 얽혀 있어 10~15일 정도 지체되어(?) 관찰사의 뜻[孤意]에 더욱 관심이 간다고 하였다. 이에 다시 한 사람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