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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9일
| 정조13
| 기유
29일본고을의禮房이사액을새길판자와龍亭子龍亭:가마의하나로,임금의조서詔書나옥책玉冊,또는金寶따위를옮길때사용하던가마이다.이를龍亭子라고도한다.를묶을白木2필을告目으로알려와서밤을새워서둘러두차례나龍亭을따르게했다.한번은임금이내린祭文[賜祭文]을받들기위한것이었고,다른한번은額號를받들기위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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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13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3일 맑음
관청에서는 11일에 성주[政軒]에게 일어난 火災로 공적인 일에 대한 겨를이 없어 公文을 접수하려는 보고서[到付狀]는 퇴자를 당했다. 그 보고서의 狀頭는 <인명>孫永愚인명>, <인명>崔世五인명>, <인명>權宜準인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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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0월 19일
| 辛未
| 맑다.
양당(兩堂)의 아버지께서 양태묘소(陽太墓所)에 행차를 하시고 저물녘에 돌아오셨다. 사장(師丈)께서 숙식하는 곳으로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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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2일
| 辛未
| 맑다.
아침 전에 조부께서 <지명>신현(薪峴)지명>으로 가셨다가 곧바로 돌아오셨다. 가군(家君)의 편지 1통을 <지명>재산(才山)지명>의 김 중평댁(金中坪宅)의 사람에게 전했는데, 토지의 이동 때문이다. 오전에 <인명>정문약(鄭文若)인명>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돌아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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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5일
| 정조13
| 기유
25일禮吏가 서원에 告目을 올리고 龍亭에 갖추게 하였다.줄(乼) 감 白木 2필, 柒几, 間花 등의 물품을 서원에서 몇 짝씩 모아서 패를 짓고, 禮吏가 비용을 주었으며, 마련하여 준비하는데 든 비용은 7~8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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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7일
| 정조13
| 기유
27일 院長과 黃氏 집안의 여러 사람이 비를 무릅쓰고 모임에 나아간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院長 <인명>李承延인명>와 掌令 <인명>趙錫龍인명>가 <건물명>不換亭건물명>에서부터 도착하였다. 두 사람의 具氏는 강을 건네주는 인부[越川軍]로 하여금 앞의 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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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1일
| 정조13
| 기유
21일술을 담당하는 有司가 祭酒로 쓸 쌀을 받들어 돌아왔다.正位[主壁] 한 자리, 술을 담글 쌀 3되, 누룩[曲子] 반 덩어리配位 세 자리, 술을 담글 쌀 9되, 누룩 한 덩어리 반<인명>黃弼熙인명>가 비록 <지명>서울지명>에 있어 본 서원에 遞任되지 않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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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25일
| 辛未
| 구름이 끼고 흐리다. 빗방울이 혹 떨어지다.
오늘 신천(信川)의 묘사(墓祀)를 행했다. 오천(烏川) <인명>김성오(金聲五)인명> 노인께서 묵고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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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26일
| 辛未
| 매우 덥다. 그러나 앞길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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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8월 2일
| 辛未
| 구름이 끼고 흐리다.
지난밤에 현오대조고(顯五代祖考)의 제사를 지냈다. 아버지께서 <지명>양곡(陽谷)지명>에 출타하셨다. 소정 사장(蘇亭査丈)과 여포(余浦) <인명>이청산(李聽山)인명> 장이 같이 와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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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1월 5일
| 庚午
| 맑다.
오늘은 한 명도 방문한 사람이 없으므로 기록할 사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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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1월 13일
| 庚午
| 눈이 내리다.
<지명>여포(余浦: 명호 도천)지명>의 소산족조(蕭山族祖) 계씨 대부께서 방문하였다. 이 양주장(李楊州丈) 역시 방문하였다. 고욤[小柿: 작은 감] 몇 그릇으로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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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20일
| 辛未
| 볕이 나다.
조부 형제분이 바람을 쐬기 위해 <지명>신천(信川)지명>에 갔다가 돌아오셨다. 아버지께서도 <지명>신천지명>에 가셔서 수확을 간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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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 28일
| 辛未
| 흐리다가 맑다가 하다.
조부께서 <지명>우금(友琴)지명>의 숙모를 데리고 자동차로 <지명>우금지명>에 가셨다. 나도 <지명>갈천(葛川)지명>에 갔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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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8월 24일
| 辛未
| 더러는 흐리고 더러는 볕이 나다.
<지명>명호(明湖)지명> 재종조(再從祖)가 오셔서 깎은 밤 두 광주리를 메고 가셨다. 구 장(區丈)이 와서 노니시고 가셨다. 오후에 <지명>안동(安東)지명> <지명>북후면(北後面)지명> <지명>연곡리(淵谷里)지명>에 우거하는 <인명>이원태(李源台)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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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6일
| 정조12
| 무신
26일進士 <인명>黃景幹인명>와 院長 <인명>黃瑞熙인명>를 비롯해 일가의 여러 사람들이 서원에 모여 <지명>서울지명>의 빚 300냥과 고을의 빚 450냥 갚았다.(황씨 문중에서 500냥을 내고, 본 서원에서 밭을 판 것으로 250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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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9일
| 정조12
| 무신
우러러 아우들을 위로하는 것은 쇠약해진 병이 날로 심해지고 금년에 천연두[痘癘]가 도처에 많이 앓았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근심과 원통함이 우리집안에 더욱 심했기 때문이다. )巖의 세 從兄弟들 집안이 멸족의 화를 두루 만났으니, 비통함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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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0일
| 정조12
| 무신
7월 초<인명>黃宅坤인명>가 비를 무릅쓰고 돌아와 <지명>서울지명>의 편지를 전하고, 그곳 소식을 전했다. 이달 <지명>영남지명> 倡義所에 유생 30여 명이 상경하였다. <지명>서울지명>의 편지는 대략 이러했다. 수개월이 지나며, 창의소의 유생들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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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7일
| 정조13
| 기유
<연도>己酉연도>年 1월 7일香禮를 행할 때 院長과 齋席을 비롯한 회원 수십 명이 서원에 빚이 산처럼 쌓이고, 또 <지명>서울지명>에서는 소식이 없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고민하는 것을 말로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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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24일
| 정조13
| 기유
24일<건물명>玉成書院건물명>의 下人이 栗里에 온 <지명>서울지명>의 편지를 전했다. 과연 院長 <인명>李承延인명>의 편지 가운데 있는 말과 같았다. <인명>黃聖休인명>의 편지에 상소에 대한 批答이 보였다. 批答은 다음과 같았다."상소문을 보고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