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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이재목(李在穆) 서간(書簡)
1864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재목,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4년(고종1)이종목(李在穆)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보낸 간찰로 늘그막에 고향에서 지내는 상대의 안부를 묻고, 동학(東學)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유림이 이단을 물리쳐야 된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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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장복원(張福遠) 서간(書簡)
1864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장복원,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4년(고종1)장복원(張福遠)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 자신이 체직(遞職)당한 일과 아들이 국장(國葬) 감독으로 몹시 바쁘다는 근황을 전하고, 부탁한 일은 황하가 맑아지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임을 전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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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남희중(南羲重)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4월 28일, 시생(侍生) 남희중(南羲重)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회연서원(檜淵書院)의 백일장(白日場)에 가는 지를 묻고, 아울러 환정(還政)의 일은 편리하게 잘되었으니, 향회(鄕會)에서 설명을 해달라고 보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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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남희중(南羲重)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별지(別紙).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남희중,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4월 28일, 시생(侍生) 남희중(南羲重)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공납(公納)을 갈취한 간사한 아전과 서원(書員)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이들을 중형(重刑)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고,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한 대책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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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한진호(韓鎭㦿) 서간(書簡)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한진호,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6월 15일에 한진호(韓鎭㦿)가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서찰로, 산수 간에 노니는 상대방을 부러워하면서도 상대방의 재기(才器)는 끝내 칩거할 사람의 아니니 빨리 나와서 함께 문필(文筆)로 교유하기를 원하면서 먹 두 자루를 보낸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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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급상(李汲祥) 서간(書簡)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급상,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사생(査生) 이급상(李汲祥)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로 부인 상(喪)을 당한 것에 대해 위로하고, 자신의 여러 일상을 기록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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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원조(李源祚) 서간(書簡)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하생복인(下生服人) 이원조(李源祚)가 수취자 미상에게 보낸 간찰로 별지(別紙)에서 아뢴 내용은 사사로움이 없고, 또한 감옥에 가두어두었으며 모두 받치지 않은 자는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일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를 묻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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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원조(李源祚) 서간(書簡) 별지(別紙)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하생복인(下生服人) 이원조(李源祚)가 수취자 미상에게 보낸 간찰에 첨부된 별지(別紙)로 세금을 포탈한 농리(農吏)를 놓아주지 말아야 하고, 농리(農吏)술갑(述甲)과 이방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자가 그를 비난한다고 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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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이승보(李承輔) 서간(書簡)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승보,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고종2) 시생(侍生) 이승보(李承輔)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보낸 간찰로 당신이 한성부판윤(漢城判尹)으로 발탁된 것에 대해 축하를 드려야 하지만, 휴가를 낼 틈이 없어 서찰로 대신하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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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진선(鎭宣) 서간(書簡)
1865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진선,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5년(철종12) 9월 20일 진선(鎭宣)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보낸 간찰로 치질의 완치가 늦느냐고 묻고, 아울러 지주고[蜘(虫+廚)膏, 거미 기름]를 복용해보라고 권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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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남희중(南羲重) 서간(書簡)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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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생활-서간
| 남희중,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6년 11월 25일 성주 목사(星州牧使)인 남희중(南羲重)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로, 10여 년간이나 군기(軍器)를 점검하지 않아 대다수의 총기들은 폐물이 되어버렸고, 또 색리배(色吏輩)들이 몰래 훔쳐 팔아버렸기 때문에 일부는 정비하고 고치는 중이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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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조술립(趙述立)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
1867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조술립,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7년(고종 4) 인제(姻弟) 조술립(趙述立)이 대포(大浦)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선고(先稿)를 손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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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이해상(李海祥)과 이연상(李淵祥)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서찰.
1867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해상, 이연상,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46년(헌종 12)이해상(李海祥)과 이연상(李淵祥)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일상의 안부를 전하는 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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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황규현(黃奎鉉) 서간(書簡)
1867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황규현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7년(고종 4) 표종제(表從弟) 황규현(黃奎鉉)이 보낸 서찰로 행직(行職)을 받아 축하한다는 인사와 종수씨(從嫂氏)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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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장석준(張錫駿) 서간(書簡)
1867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장석준,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7년 8월 25일 장석준(張錫駿)이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답신으로, 가묘(家廟)에 분황(焚黃)할 때에는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으니 한양으로 행차하는 길이 있으면 꼭 만나서 회포를 풀자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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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 서간(書簡)
1867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김인섭, 사월댁, 중촌댁, 대전댁, 화목댁
| 산청 단계 상산김씨 김인섭후손가
1867년 8월 15일에 罪從弟 단계 김인섭이 從兄들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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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남희중(南羲重)이 수취자 미상에게 보낸 간찰.
1868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남희중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8년(고종 5) 4월(윤) 6일, 남희중(南羲重)이 수취자 미상에게 배가 없어서 세(稅)를 완납하지 못한 사실, 덕산묘소(德山墓所)에서 양이(洋夷)가 난동을 부린 일, 장치선(張致善)의 공초(供招)를 언급하는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대상황을 담은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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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이재목(李在穆) 서간(書簡)
1868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재목, 이원조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8년(高宗5) 윤4월 15일 사돈인 이재목(李在穆)이 고향 포천 계곡에 은거하고 있는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간찰. 둘째 아들이 화성 원침((華城 園寢)으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며, 자신은 중춘(仲春)에 호상(湖上)으로 가서 여러 벗들과 조용히 강토(講討)하여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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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정경(鄭(土+敬))이 작성한 간찰.
1868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정경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8년(고종5) 세하생(世下生) 정경(鄭(土+敬))이 수취자 미상에게 송씨(宋氏)의 일을 묻고, 송씨의 일로 인해 세상인심 헤아리기 어렵다고 보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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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정경(鄭{土+敬}) 서간(書簡)
1868
|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정경
|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1868년(고종5) 세하생(世下生) 정경(鄭(土+敬))이 수취자 미상에게 보낸 간찰에 첨부된 별지로 규보(圭甫)의 일로 과도한 거동이 있었는데, 규보도 뉘우칠 것이라고 하고, 청천서원(晴川書院)에서 일어난 변고는 한 고을이 문을 닫고 들으려 하지 않으니 한심한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