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8월 20일 | _ | 壬戌 | _
운룡(雲龍)에 있는 산소에 성묘하였다. 물레방아 점[水碓店]에 이르니 집안 친척들과 벗들, 마을의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장을 이룬 것 같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재종형님과 재종 조카 우서(禹瑞 : 우瑀), 사형(士衡)이 함께
1862년 8월 28일 | _ | 壬戌 | _
식후에 여러 종친들과 헤어져 곧바로 부내(府內)로 들어갔다. 종친인 경선(景善)이 뒤따라 와 함께 관청으로 갔다. 부질없이 호장소(戶長所)에 공사(公事)를 부치느라 신표(信標) 내어 보였다. 임자도로 가려고 입석점(立石店)에 이르러 울타리 남쪽을 바라보니 맑고 깨끗한
1862년 6월 15일 | _ | 壬戌 | _
탁한섭(卓漢燮)을 만났다.
1862년 7월 3일 | _ | 壬戌 | 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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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25일 | _ | 壬戌 | _
병으로 관에 들어가지 못하였더니, 관에서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쳐 닦달하였다.
1862년 8월 11일 | _ | 壬戌 | _
날이 저물 무렵 삼가읍에 도착하였다. 정언이 함께 도착하여 강씨주막[姜店]에서 잤다. 인척인 정언 박맹윤(朴孟允 : 정현定鉉)이 우리보다 앞서 이곳에 와 머물고 있었다.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1862년 8월 27일 | _ | 壬戌 | _
벗 정 사칭과 그 동생 영로(英老 : 동왕東王), 그리고 집안 형 김사칙(士則 : 식栻)씨와 사형(士衡 : 표杓), 종손(宗孫) 김영진(英振 : 기석基錫)과 그의 동생 영언(英彦 : 기정基定), 재종질 상지(尙志)가 함께 와서 같이 머무르며 밤을 새워 이야기하였다.
1862년 8월 9일 | _ | 壬戌 | _
집에 돌아와 잤다.
1862년 8월 21일 | _ | 壬戌 | _
이른 아침에 재종 조카 윤서(允瑞 : 경璟)이 닭 한 마리를 삶아 와서 대접하였다. 현재 상법(上法)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데, 80노인이 참으로 인륜의 정이 돈독하지 않다면 어찌 이처럼 하겠는가? 마침내 벗 이윤길과 윤서 노인을 이별하고 출발하였다. 재종형 숙질과 사
1862년 8월 29일 | _ | 壬戌 | _
이른 아침에 가마꾼 차돌(次乭)이 달아나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타고 정언은 걸었다. 또 마부 우상(又尙)을 부중(府中)으로 보냈다. 점심을 먹고 함평(咸平) 증산(甑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종친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20여리를 가서 사납촌(士納村)에 이
1862년 6월 4일 | _ | 壬戌 | _
어사(御史) 이인명(李寅命)이 간사한 아전들의 모함으로 좌복(左腹)에 들어 진주의 진교(鎭校)들을 보내 나를 잡아오게 하였다. 창졸간이라 장정들이 부족하여 내려가지 못하였다. 정언은 어둠을 무릅쓰고 먼저 갔다.
1862년 6월 17일 | _ | 壬戌 | _
표형 (表兄 : 고종형) 권성안(權聖安 : 정택正宅)씨가 끝내 혹형을 당하였다.
1862년 7월 5일 | _ | 壬戌 | 비
1862년 7월 27일 | _ | 壬戌 | _
어머니의 제삿날인데, 집안이 크게 어지러우니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황혼 무렵 정언이 왔다.
1862년 8월 13일 | _ | 壬戌 | _
정언이 집으로 돌아갔다.
1862년 8월 1일 | _ | 壬戌 | _
정언이 왔다.
관에서 집안 조카 광진(光振)을 패초(牌招)하여 족사(族使)로 정하였다.
1862년 8월 23일 | _ | 壬戌 | _
덕첨과 헤어지고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인월(引月)을 지나가다가 20년 전 옛 주인인 김성규(金性奎)의 집을 찾아갔더니, 김성규는 이미 죽었고 그의 자부가 옛날처럼 집안을 꾸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비전점(碑殿店)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여원치(女院峙)를
1862년 9월 2일 | _ | 壬戌 | _
일찍이 출발하여 함평 향교 앞의 가게[店]에 이르러 가마꾼을 고용하였다. 아침 식사에 고기를 사서 배부르게 먹고 출발하였다. 망운(望雲)의 저자의 가게[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물의암점(勿衣巖店)에 도착하여 잤다.
1862년 6월 13일 | _ | 壬戌 | _
문서 종형제와 여러 벗들이 가혹한 형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