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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월 4일
| 哲宗 13
| 壬戌
| 또 춥다.
망천(忘川)의 대상(大祥)이 내일 있으나 아이들은 기일에 구애되어 내일 새벽에 제사를 파한 후 들어가려고 했다. 그래서 편지를 여러 상중의 형들에게 썼고, 아울러 임하(臨河) 우 형(禹兄)과 천전(川前) 진사(進士) <인명>김문옥(金文玉)인명> 형에게 부쳤다. 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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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11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아침에 접소(接所)의 성상(城上)이 유사(有司)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 중에 말하기를 ‘<지명>예안[宣城]지명>에서 시권(詩卷)을 들이기를 독촉함이 있는데, 자신이 처한 바에 매우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장차 문기를 수정하고 겸하여 삼단(三單: 세번째 단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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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3월 24일
| 哲宗 13
| 壬戌
| 구름이 끼고 흐리다.
<지명>소호(蘇湖)지명>의 행상(行喪)에 일꾼을 빌리는 일로 촌중에 갔다. <지명>형호(衡湖)지명>로 돌아오는 노목(老牧) 이 진사(李進土)에게 들으니 재종형에게 남의 불행을 다행으로 여기고 수탈했다는 등의 말이 있어 분판(粉板)에 써서 보인다는 거조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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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5일
| 哲宗 13
| 壬戌
| 조금 바람이 불다.
<지명>우동(芋洞: 우렁골, 안동 풍산 하리리)지명>의 접유사(接有司) 댁달 보(宅鐽甫)가 올라 왔다. 전하기를 <지명>예안(禮安)지명> 수령이 들어와 순권(巡券)에 고(考)를 들이고 싶다고 기약했다. 향후의 일이 매우 창궐(猖獗)하여 이 때문에 근심하고 탄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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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16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아침에 차아(次兒)에게 시켜 유평에 가서 감독하게 했으니 재목 때문이다. 또 편지를 써서 <지명>신성(申城)지명>에서 <인명>범악(凡岳)인명>을 전송하면서 지사(地師) <인명>김태상(金台祥)인명>을 불렀다. 오전에 <지명>망천(忘川)지명> 사람인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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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3월 26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인명>이순민(李舜民)인명> 형과 <인명>박희인(朴熙仁)인명> 형이 와서 한참 동안 싸인 정을 풀었다.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지명>한양지명> 시장에서 채소 종자를 사와서 오늘 아침에 심었다. 들으니 <지명>소호(蘇湖)지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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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8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날씨가 매우 따뜻하다. 오후에 서북쪽에서 천둥소리가 있다. 구름이 끼고 흐리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다.
오후에 또 서북쪽에서 천둥소리가 있었다. 구름이 끼고 흐리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으니, 어찌 가물 징조가 아니겠는가. 신임 성주 <인명>윤태경(尹泰經)인명>이 어제 도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열읍이 뒤숭숭한 때를 당하여 젊은 나이에 사태 파악하여 과연 여러 해 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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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30일
| 哲宗 13
| 壬戌
| 새벽에 잔설이 있다.
<지명>사급(泗汲)지명> 족질이 돌아갔다. 둘째 아이가 어제 저녁에 돌아와 초택(抄擇)에서 낭패한 일을 전했다. 주관(主官)이 나이가 어리고 일에 어두운 소치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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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4일
| 哲宗 13
| 壬戌
| 춥다.
집에 염장(鹽醬)이 부족하여 소금 한 말에 7전식 사서 우선 급한 것을 구하였다. <지명>함안(咸安)지명>의 이 랑(李郞)이 와서 보았다. 대개 종질(從姪) 집과 약혼하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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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월 5일
| 哲宗 13
| 壬戌
새벽에 아내의 기제사에 참석하였다. 아침에 망천(忘川) 문상 겸 여러 곳에 인사를 닦으라고 두 아이를 보냈다. 오늘은 곧 재종질부(再從姪婦) 하동 실(河東室)의 소상[中祥]이다. 감기로 한번 곡을 하지 못하였다. 전날부터 조문객을 위한 수고로움이 있어 남은 해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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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12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어제 저녁에 마을이 연소자가 <지명>하상(河上)지명>에서 돌아왔다. 전하기를 <인명>류겸수(柳謙叟)[류광목(柳光睦)]인명>가 접위관(接慰官: 일본의 사신이 올 때 맞아 접대하던 관원)이 되었는데, 그 편에 임금께서 따로 관리의 재주가 있는 사람[吏才]을 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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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3월 25일
| 哲宗 13
| 壬戌
|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가 저녁에 개다.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와 주 아(周兒)가 돌아왔다. 들으니 <지명>우두원(牛頭院)지명>에 묵었으나 비를 만나 일찍 들어올 수 없었다고 했다. 고대했던 끝이라 다행함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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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7일
| 哲宗 13
| 壬戌
| 은은하게 서북 사이에 천둥소리가 있었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지명>저동(芋洞)지명>에서 빌려간 『사보(史補)』 2책을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했는데 크게 훼손됨이 있으니, 참으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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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27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저녁에 크게 천둥이 쳤지만 비는 내리지 않다.
부주인(府主人) <인명>순철(順哲)인명>이 와서 전하기를 "<지명>선산(善山)지명> 난괴(亂魁) <인명>이어대(李漁大)인명>가 남산(南山) 봉화를 올리고 신문고를 쳐서 임금이 친국했는데, 그놈은 생민이 살 길이 없어서 이와 같은 변괴가 이르렀다고 통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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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10일
| 哲宗 13
| 壬戌
| 개다.
식후에 제사에 보내는 문기(文記)일로 종친 모임이 있었다. 나 역시 가서 참여했다. 이른바 문부(文簿)가 종이 위에 많이 있었는데, 이루어 나갈 희망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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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1월 17일
| 哲宗 13
| 壬戌
| 날씨가 점점 풀리다.
내일 모레 큰집에서 신주를 바꾸는 제사가 있어서 양위를 장차 별묘에 꺼내어 받들고자 하고 분을 씻는 것이 마땅하여 사종제 <인명>김중범(金重範)인명>에게 편지를 써서 미안하다고 했다. 하나같이 원위(元位) 자손의 처지에서는 괴이할 것이 없을 듯하나 듣고 오니 난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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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4월 1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오늘 죽은 소실(小室) 조 씨(趙氏)의 상여(喪餘: 상사의 여분)로 아이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으나 그 딸도 죽고 없어 마음에 측은함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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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13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저녁에 천둥소리가 나며 비가 내리다.
보름 지나 <지명>망천(忘川)지명>으로 가고자 하나 신을 신발이 없다. 심부름꾼을 부내(府內)로 보내어 부중(府中)의 소식을 알고자 했다. 아침 후에 막내 아이가 <지명>오천(浯川)지명>으로 가서 앞길에서 감목(監牧) <인명>김계한(金啓瀚)인명>을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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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1일
| 哲宗 13
| 壬戌
| 아침에 구름이 끼고 흐리다.
부내(府內)에 말과 하인을 보내 장차 황(黃) 의원을 부르고자 하여 가동(家僮)이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종일토록 내리는 탓에 의원을 불러오기 어려운 형편이라 길을 돌렸다. 밤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얼마 후 또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비가 쏟아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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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3일
| 哲宗 13
| 壬戌
| 아침에 구름이 끼고 흐리다. 저녁부터 비가 내리더니 밤에 크게 쏟아지다.
듣건대 수의어사(繡衣御史) <인명>박이도(朴履道)인명>가 서악(西岳)에 와서 오래 머무르다가 그저께 출도하여 본부(本府)의 포교(捕校)가 좌우로 나가서 강제로 사람을 붙잡았다고 하니 추한 비방을 받을 빌미가 되지 않겠는가? 과연 전해들은 소문대로라면 매우 불미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