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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4월 16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지명>방곡(方谷)지명>의 노홍(魯紅) 일가 놈이 <지명>백송(白松)지명>에서 와서 하읍(下邑)의 소식을 전했는데, 대개 세변과 관련된 것으로 무슨 방법을 써야 진부(鎭拊)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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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17일
| 哲宗 13
| 壬戌
| 아침에 매우 춥다.
대개 큰 비가 내린 뒤 끝에 가문 것이 또 열흘이니, 늦게 이앙한 모는 이미 흉년으로 결판나는 데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뜻이 과연 어찌 하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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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8일
| 哲宗 13
| 壬戌
| 구름이 끼고 흐리다.
오늘은 곧 정과(廷科) 초시(初試)가 개장(開場)하는 날인데 촌내(村內)는 한사람도 과거를 보러간 자가 없었다. 이유 없이 과장에 가지 않은 촌의 유생들은 도가 매우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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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3일
| 哲宗 13
| 壬戌
| 구름이 끼고 흐리다.
아침부터 지절통이 크게 일어났는데 돌림감기가 더친 것인 듯하다. 부중 인마가 돌아와서 차아(次兒)의 편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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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1월 9일
| 哲宗 13
| 壬戌
| 추위가 어제와 같다.
<지명>한양지명>에 간 집안 심부름꾼이 오늘 아침에 비로소 내려와서 <인명>가아(家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鄭) 정승이 지난 27일에 경연에 참석했다고 한다. <지명>광주(廣州)지명>의 백성 8천 7백여 명이 길옆에 엎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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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9일
| 哲宗 13
| 壬戌
| 아침에 또 서늘한 바람이 불다.
아이들이 나와 앞 가게에 가서 영정을 전별하려고 하였고, 또 옥서(玉署: 홍문관) 직소의 안에 편지를 부치려고 하였다. 이윽고 아이들이 영정에 전별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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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1일
| 哲宗 13
| 壬戌
| 구름이 끼고 흐리다.
장차 내일 <지명>풍포(豊浦)지명>에서 무를 캐고 또 모레 천전(川前) 손부를 맞이하는 것으로 소란하고 고민스러운 일이 많다. <지명>녹문(鹿門)지명> 고 형(高兄)이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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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2월 24일
| 哲宗 13
| 壬戌
| 남은 추위가 아직도 심하다.
<인명>강진오(姜晉吾)인명>의 편지를 통하여 들으니, <지명>함흥(咸興)지명>의 난민(亂民)이 선화문(宣化門)을 부수고 절월(節鉞)을 부러뜨리고 인신(印信: 관인, 도장)과 벼루로 절도사를 때리니 절도사가 피를 흘리면서 도주했으며, <지명>남한(南漢: 경기도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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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1일
| 哲宗 13
| 壬戌
| 잠깐 흐리고 잠깐 볕이 나다가 비가 개다.
듣기로 영백(嶺伯: 경상도 관찰사) <인명>이돈영(李敦榮)인명>이 선산민란 우두머리 <인명>전범조(全範祖)인명>를 죽였다고 하는데 죽음에 임한 <인명>범조인명>가 의리를 지키니 매우 애석 할 만 하다. 저녁에 계아(季兒)가 <지명>연곡(淵谷)지명>에서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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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6일
| 哲宗 13
| 壬戌
| 구름이 끼고 흐리다.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다
개기를 조금 기다려 사형이 돌아가니 주인 된 마음에 매우 편치 않았다. 하남 류랑(河南柳郞)이 저물녘에 왔다. 내일 새벽은 바로 그의 빙모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추위를 무릅쓰고 온 것은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늙은 계집종 <인명>취절(就節)인명>이 원인모를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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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1월 12일
| 哲宗 13
| 壬戌
| 흐리다가 볕이 나다가 하다.
둘째 아이가 나의 병 때문에 <지명>인동(仁同)지명> <지명>포남(浦南)지명>으로 길을 떠나 <지명>동래(東萊)지명> 의원을 보고자 했다. 나의 병은 차가운 덩어리가 가슴 사이에 쌓여 위경이 완전히 막혔다. 대단한 난치의 증세는 아닌 듯 하나 이 의원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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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2월 8일
| 哲宗 13
| 壬戌
| 아침에 눈이 조금 내리다. 낮에 바람이 불다.
촌내(村內)의 사람들이 <지명>예안(禮安) 지명>수령이 없는 일을 만든 일로 많이 의견이 분분하였다.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므로, 그 전에 우선 잠잠히 있으면서 근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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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0월 1일
| 哲宗 13
| 壬戌
| 춥다.
아침부터 기운이 고르지 않았고, 찬 기운이 닿은 단서가 있었다. 낮에 또 오한이 났다. 날짜를 계산해보면 5일째니 어찌 숨은 걱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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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19일
| 哲宗 13
| 壬戌
| 화창하다.
<지명>망천(忘川)지명> 하인이 내행일로 왔다가 승교(乘轎)를 가지고 떠났다. 그 편에 사형(査兄)에게 편지를 부치고 <지명>한양지명> 편지를 끼워 올렸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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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3일
| 哲宗 13
| 壬戌
| 맑다.
도둑에 대한 경계가 갈수록 심하여 밤마다 그것이 없던 적이 없었다. 소위 진장(鎭將)의 우두머리가 도둑을 다스리는 행동이 없으니 거주하는 백성이 어떻게 편안하게 살 곳을 정하겠는가! 매우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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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8일
| 哲宗 13
| 壬戌
| 구름이 끼고 흐리다.
<지명>우천(愚泉)지명>에 간 심부름꾼이 돌아왔다. 들으니 청상과부가 편하게 지낸다고 하니 위안이 되었다. <지명>지북(枝北)지명> 신 서방(申書房)이 솜을 지고 한양으로 올라가기에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에게 편지를 부쳤으나 들으니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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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1월 14일
| 哲宗 13
| 壬戌
| 서리가 마치 눈처럼 두껍다.
가슴 속의 찬 덩어리가 엉긴 것이 갈수록 더 심해져 위경이 완전히 막혀 오늘 밤새도록 먹지 못했다. <지명>방곡(方谷)지명>의 <인명>노홍(魯紅)인명>이 와서 속을 덥혀 가래를 없애는 데는 만병초(萬病草)만한 것이 없는데, 그 풀은 <지명>오천(浯川)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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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월 2일
| 哲宗 13
| 壬戌
| 춥다.
저녁에 듣기로 <지명>소산리(素山里)지명>에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은 일을 있어서 한 놈이 거의 장형으로 죽을 뻔 했고, <지명>현애(玄厓)지명> 앞길에 또한 돈을 빚진 놈이 칼에 찔린 변고가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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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5일
| 哲宗 13
| 壬戌
| 춥다.
사형이 머물며 손부 집에 머물러 아침에 보러 왔다. 그의 충완함을 보니 매우 위안이 될 만했다. 나는 지절통(肢節痛)으로 날마다 오후에 아픔이 심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또 기가 평탄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으나 필시 기가 허한 소치일 것이다. 또 조금씩 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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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1월 11일
| 哲宗 13
| 壬戌
| 어제 밤부터 눈이 조금 내리다.
<지명>임하(臨河)지명>의 권 형(權兄)이 또 내방했다. 음식 맛을 알지 못하는 것이 날로 심하고 한 번에 먹는 것은 단지 몇 숟가락뿐이나 맛이 시어 먹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