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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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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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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 관원에게 가서 조사를 받았다. 관원은 임사준(任思準)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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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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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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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을 보냈다. 이 고을의 원이 백일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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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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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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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읍에 들어가서 유봉손(柳鳳孫)의 집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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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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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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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점(於甫店)에 도착하니, 정언이 행장을 꾸려 와서 만났다. 집안 조카 이□(履□)와 종친인 해문(海文)이 뒤따라 와서 술을 권하며 이별하고 또 노자를 챙겨주었다. 사근역점(沙斤驛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밤엔 난평점(蘭坪店)에 묵었는데, 주인이 최씨였다. 인척 김덕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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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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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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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마부 우상(又尙)이 돌아왔다. 식사 후에 종친인 내집(乃集 : 중해重海, 갑인생)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아우 영서(靈瑞 : 운해雲海, 병인생으로 치도致道의 아버지이다)와 내윤(乃允 : 유해有海, 갑술생으로 춘오春五의 아우이다), 그리고 이문(里門) 안에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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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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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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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객지에 있는 마음이 괜히 처절해져서 진정하지 못하겠다. 마침내 우선 떠나지 않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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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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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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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진에서 차출한 10여 명이 뒤따라 와서 부득이 비를 무릅쓰고 내려갔다. 날이 어두워진데다가 비까지 와서 문태점(文台店)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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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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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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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의 편지를 받았는데, 단성현 읍저(邑邸)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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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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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맑음
사칭과 집안 아우를 송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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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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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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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함께 읍내에 들어갔다. 아전들이 쓰는 방[長房]에 구금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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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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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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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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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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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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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이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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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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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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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애됨이 있어 읍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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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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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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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출발하여 십리쯤 가서 □□점에서 아침을 먹었다. 죽곡(竹谷)의 황병사 정려(黃兵使旌閭) 앞을 지나서 비홍치(飛鴻峙)를 넘어 술 한 잔을 사 마시고 적성강(赤城江)을 건넜다. 적성강 서쪽에 주점이 하나 있어 점심을 먹었다. 순창읍에 이르러 술을 사 갈증을 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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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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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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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에 길을 나서 토등(兎墱) 양간다리[陽干橋]를 지나 강산(江山) 나루를 건넜다. 이곳은 바로 지도(智島) 땅이다. 송항점(松項店)에서 점심을 먹고, 산줄기 하나를 넘어 봉수동(鳳樹洞) ․ 금출곶(金出串)을 지나 점마암(點馬巖)에 도착하니 배가 끊어져 건널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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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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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맑고 바람이 불었다.
맑고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머리를 빗었다. 일기를 썼다. 화재 옹이 글 짓는 법을 익히고자 하여, ‘풀에 양제(羊蹄:소루쟁이)와 마치(馬齒:쇠비름)가 있다. 양제는 기를 보하는 것이고 마치는 체를 내린다.[草有羊蹄馬齒 羊蹄補氣 馬齒消滯]’를 제목으로 정하여 나에게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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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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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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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酒滯) 때문에 괴로워 기운이 매우 고르지 않아 소강탕(蘇薑湯)을 복용하였다. 둘째 아이가 죽은 날이라, 마음이 더욱 좋지 않았다. 진장(鎭將)이 우수영(右水營)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회이(回移)할 공문을 받지 못하여 관인(官人) 강정술(姜正述)이 돌아가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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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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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흐리고 활짝 개지 않았다.
흐리고 활짝 개지 않았다. 새벽에 머리를 빗고 『주역』을 외웠다. 식후에 화재가 와 글짓기를 하자고 하여 「시자설(柿子說)」을 지었다. 화재의 본가(홍주鴻州 해두蟹頭에 있다.)에서 추로주(秋露酒)를 많이 보내왔는데, 이를 강권하는 걸 이기지 못하여 예닐곱 잔을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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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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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지난밤에는 추위가 심하였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을 바로 맞았더니 감기가 덧나 다시 머리가 아프고 소름이 돋았다. 할 수 없이 이불을 둘러쓰고 머리를 빗었다. 종일 몸이 피곤하여 자리에 누워 있었다. 밤에 외우기를 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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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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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맑고 봄처럼 따뜻하였다.
새벽에 머리를 빗고 『주역』을 외웠다. 이웃동네에 사는 유생 주학기(朱學琪)가 찾아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동안 하였다. 이어 서울사람 첨지(僉知) 희룡(熙龍)이 이 땅으로 유배를 왔었다는 일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서화를 지독하게 좋아하여 우유자적하며 이로써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