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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7월 30일
| 哲宗 12
| 辛酉
| 가뭄 기운이 날로 심하다. 오후에는 타는 듯 더워 발광이었다.
사방에 전해 들으니 천수답에 거의 푸른 것이 없고, 콩과 태(太)도 씨가 말랐으며, 목화씨는 여물지 않았으나 너무 더워 미리 핀 꽃잎이 다 말라 떨어졌다고 했다. <지명>묘동(竗洞)지명>에 간 하인이 돌아왔는데, 들으니 <지명>칠곡지명> 등지에는 6월 초에 하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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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3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지명>판교(板橋)지명> 상답(床答)이 돌아왔다. 오계(梧溪) 교리 족숙(校裡族叔)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는데, 인편이 없어서 답장을 못했다. 우동(芋洞) 이 아 댁(李雅宅)이 접유사(接有司)로 보러 와서 제(題)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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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9월 29일
| 哲宗 12
| 辛酉
| 구름이 끼고 흐리다.
봄과 여름 사이에 수령 <인명>김상현(金商鉉)인명>이 누차 한번 보기를 청했다. 더울 때는 병이 들어 꿈적거리다가 서늘해서는 연달아 집안의 연고를 만나서 과행하지 못했다. 비로소 오늘 힘써 부에 들어갔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인사를 나누고 들어가 뵈었는데 도결(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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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8일
| 哲宗 12
| 辛酉
| 날씨가 매우 화창하다.
장차 내일 계아(季兒)를 부중(府中)에서 고복(考卜)하는 데에 보냈다. 그가 가는 길에 수령에게 편지를 부쳐서 결가(結價)를 줄여주기를 원했지만,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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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12일
| 哲宗 12
| 辛酉
| 매우 춥다.
포내(浦內) 전 우(全友)가 방문을 하여 전하길 <지명>상주(尙州)지명>는 고을의 폐단 때문에 각 면(面)의 대소민인(大小民人)이 여러 달 관(官)에 하소연을 했고 마침내 송 모(宋某)가 장형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매우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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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22일
| 哲宗 12
| 辛酉
| 아침부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다.
방복(防卜: 세금)의 일 때문에 <인명>전재춘(田在春)인명>의 집에 <인명>만수(萬壽)인명>를 들여보냈다. 듣기로 상주목사(尙州牧使) <인명>홍한주(洪翰周)인명>가 각 면(面)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관에 들어와 고쟁(苦爭)한 일 때문에 숙정패(肅靜牌)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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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7월 28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지명>한양지명> 편지 중에 <지명>의인(宜仁)지명>의 정언(正言) <인명>이만기(李晩耆)인명>가 시폐에 대한 소를 올린 것이 있었는데, 소 가운데에 역례와 서얼들이 조적(朝籍: 관직자 명단을 기록한 문서)을 뒤섞어 더럽힌다는 내용이 있으니 매우 불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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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0월 22일
| 哲宗 12
| 辛酉
| 구름이 끼고 흐리다.
김 판서(金判書) 계산 옹(溪山翁)의 기일이 다음 달 초4일에 있기 때문에 문중에서 심부름꾼을 보냈다. 그러므로 편지를 써서 훈 태(訓台)에게 올렸고, 겸하여 <인명>우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에게 편지를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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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9월 27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가 흐리다. 낮에 가랑비가 내리다.
저녁에 동문(東門) 안의 <인명>평이(平伊)인명>가 와서 <인명>재춘(在春)인명>의 편지를 주었다. 또한 약값을 독촉하였다. 괴이하도다. 집의 근심이 세월이 지나도 평안하지 못하여 좌우의 약값이 또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니, 이에 이르러 경영을 돌아보고 날마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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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6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밤에 큰 바람이 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심부름꾼을 <지명>유평(楡坪)지명>으로 보냈는데,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사고가 있는지 모르겠다. 양곡(良谷) 며느리는 또 흉통 때문에 음식을 전혀 들지 않았으니 답답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밤에 큰 바람이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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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10일
| 哲宗 12
| 辛酉
| 따뜻하다.
가질(家姪)의 말을 들으니 연계(蓮桂)에 모인 사람들이 적을 뿐만 아니라 하상(河上)의 지절(支節)이 매우 적합하지 않아 심히 난처하다고 하였다. 청력(靑曆: 새 달력)은 본소(本所)에서 온 것인데 금년부터 큰집으로 보냈다. 병산서원을 청액(請額)한 일은 지금까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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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6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면순(面巡)의 초초(初抄)는 이미 시권을 거두는 데에 이르렀지만 류 예안(柳禮安)이 영문(營門)의 수판(壽板)하는 일로 이달 초에 <지명>봉화(奉化)지명>에 들어가 그 돌아오는 것이 정확히 어느 때인지 모른다. 이에 재초(再抄)한 다섯 수를 다시 내어 막내아이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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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24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한 해가 조금 남아 온갖 감회가 마음에 교차하는데 날마다 글을 쓰는 일도 적막함을 깨트리지 못하니 매우 감당하기 어려웠다. 깊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인명>김철(金鐵)인명>이 <지명>매원(梅院)지명>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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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3월 1일
| 哲宗 12
| 辛酉
종손 <인명>김낙주(金洛周)인명>가 <지명>달성(達城)지명> 감영에서 돌아와서 과거 시험장에 관하여 대략적인 것을 들었다. 감사(監司)는 매우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이를 만하고, 또한 지금 세상에 권세가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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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5월 2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새벽에 꿈을 꿨는데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법전(法田) 강 참판(姜參判)의 아들 교리(校理)와 더불어 집으로 돌아와서 얼굴을 보고 사돈을 맺기를 약속했다고 하였는데 마음이 매우 미안하였고 깼다. 식사를 한 후에 어린 종이 교외로 나가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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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9일
| 哲宗 12
| 辛酉
| 따뜻하다.
명포(明浦) 족제(族弟) <인명>중옥(重玉)인명>은 그 아들에게 편지를 소매에 넣어 와서 <지명>학산(鶴山)지명> 뒤 <지명>시곡(柿谷)지명>에 사는 <인명>김필운(金必雲)인명>이 단지(丹地)의 논을 물리는 일을 청하였다. 그 청이 불미스러울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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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3월 3일
| 哲宗 12
| 辛酉
| 맑고 바람 불다.
진사 재종형이 <지명>하회(河回)지명>에서 돌아왔는데, 참판 <인명>이원조(李源祚)인명>의 소초(疏草)를 베껴왔다. 그 내용은 <인명>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인명>의 추증을 청하고 또한 <인명>대산 이상정인명>의 문인 <인명>정남대(鄭南臺)인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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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3월 2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지명>한양지명>의 시험은 또한 매우 공정하게 하여 <지명>한양지명> 사람 중에 합격자가 거의 없었다. 장차 복방(覄榜)을 두 곳에서 돌아가며 행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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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6월 15일
| 哲宗 12
| 辛酉
| 매우 덥다.
나의 병이 더위에 구토와 설사가 생겼는데, 설사는 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아서 하루에 대여섯 차례였다. 입맛이 크게 변하고 정신이 이미 수습할 수 없는데, 이것이 어찌 일흔의 노쇠한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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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4월 23일
| 哲宗 12
| 辛酉
| 맑고 흐리다.
아침에 면내(面內)의 산을 유람하는 벗들과 동사(洞舍)에 모여서 식사를 하였다. 계아(季兒)는 형들의 소식을 물으려고 <지명>송지(松枝)지명>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