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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4월 27일
| 哲宗 12
| 辛酉
| 잠깐 흐리고 잠깐 볕이 들다.
오늘 오시는 곧 대지(大枝) 별묘(別廟)에 환봉하는 날이다. 제족(諸族)과 함께 사사(祀事)에 참석하러 갔다. 듣기로 "척질(戚姪) <인명>류순형(柳舜亨)인명>이 <지명>한양지명>에서 비로소 돌아와서 동당(東堂) 회위(會圍: 회시)에 관한 기별을 전하기를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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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9월 8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함풍제(咸豊帝)가 7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후사로 6세 아이가 있었고, 중국에 수없이 많은 유민들이 서로(西路)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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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6월 14일
| 哲宗 12
| 辛酉
| 찌는 듯이 덥다.
두 아이를 보내 소산(素山: 안동 풍산 소산리)에 경조례(慶弔禮)를 하였다. 바야흐로 대장장이가 올라오려고 하여 철물을 분부하여 한 덩이의 철과 한 부의 숯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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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8월 4일
| 哲宗 12
| 辛酉
| 새벽부터 비바람이 크게 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 호미자락도 채우지 못한 것 같았으나 촌의 시냇물이 물살을 이루니 그 비가 적지 않았음을 알만 했다. 오늘은 백로이다. 배추 심는 것이 너무 늦었으나 큰 가뭄 끝에 집 채소가 씨가 말라 노비들로 하여금 또 파종하게 했다. 어제 저녁에 둘째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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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4일
| 哲宗 12
| 辛酉
| 구름이 끼고 흐리다.
매원(梅院) 벗 <인명>이필수(李必秀)인명>가 내려갔다. 그의 죽은 누이가 우리 집에 묵은 자취가 없었기 때문에 그 누이 여종의 자녀를 팔았는데 정리 상 그럴 듯하였다. 나는 또한 소서(小序)를 써서 가는 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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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26일
| 哲宗 12
| 辛酉
| 날씨가 조금 풀리다.
<지명>하남(河南)지명> 류 랑(柳郞)이 기제사가 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는데, 매우 곡진하게 석별하는 뜻이 있으니 매우 우스울 만하다. 밤에 도적을 만나 물건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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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8일
| 哲宗 12
| 辛酉
| 따뜻하다.
백양(白陽) <인명>권두상(權斗象)인명>이 이전에 빚진 일로 와서 백금으로써 증서를 작성하기를 청하여, 돈 전체를 내년 11월 16일로 기한을 정하고, 만약 갚지 않는다면 영원히 주고자 했는데 그 뜻은 알 수 없지만 이는 죽은 손자의 뜻이었다. 지금 집안의 재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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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5월 1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오후에 구름이 끼고 흐리고 바람 끝이 차다.
오후에 구름이 끼고 흐리고 바람 끝이 차니 가뭄의 징조 같다. 농가에서는 비를 바라기가 이미 급한데 끝내 비가 내리지 않으니 근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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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6월 9일
| 哲宗 12
| 辛酉
| 개다.
혜성이 지난밤부터 꼬리가 점점 사라졌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화성(火星)이니 이번 여름이 처음부터 매우 더운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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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7월 29일
| 哲宗 12
| 辛酉
자형이 돌아왔으니, 대개 도산서원 원임이라는 명분을 띠고 향례가 오늘 있기 때문이었다. 고로 만류하지 못하고 백수에 기약 없이 이별하니 몹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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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0월 23일
| 哲宗 12
| 辛酉
파일(破日: 음력 매월 5일, 14일, 23일로 일을 하면 불길하다고 여김) 때문에 퇴상(退床)을 할 수 없었다. <인명>위아(渭兒)인명>의 병이 차도가 있으려 하였다. 어린 아이와 부인들이 왕래하며 기쁘게 노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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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9월 28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가질(家姪)이 <인명>선성(宣城)인명> 길을 떠났다. 그 편에 늙은 자형과 <인명>유원(綏遠)인명> 부자에게 편지를 썼다. 또 상계(上溪) <인명>이승중(李承重)인명> 상주와, 녹전(鹿田) 이 원장(李院長) 형제 및 교동(校洞) 이 척손(李戚孫)에게 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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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7일
| 哲宗 12
| 辛酉
| 맑고 춥다.
한양 하인 <인명>손척(孫陟)인명>이 저물녘에 돌아왔는데 <인명>우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의 편지를 받아 보니, 서재에 들어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알았다. 또한 훈 태(訓台)의 두 통의 답장과 위장(衛將) <인명>김계한(金啓澣)인명>의 편지를 받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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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9월 5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앞뜰의 수확이 거의 끝났다. 우리 집에도 건거(巾車: 베나 비단으로 막을 쳐서 꾸민 수레)를 내보냈는데, 감과 대추는 모두 재해를 입었다고 했고, 감나무는 곧 전혀 거론할 것이 없었다. <지명>풍기(豊基)지명>와 <지명>문경(聞慶)지명> 등지에서 또한 그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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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6월 11일
| 哲宗 12
| 辛酉
| 매우 덥다. 밤새도록 더위가 가시질 않다.
재종질(再從姪) <인명>병흠(昺欽)[김병흠(金昺欽)]인명>이 상계 영공(上溪令公)의 <지명>봉화(奉化)지명> 장소(葬所)에서 돌아왔다. 그 행차가 <지명>석평(石坪: 봉화읍 석평리)지명>의 이 우(李友) 집을 들렀는데, 들으니 <인명>철원(鐵原)인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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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8월 1일
| 哲宗 12
| 辛酉
| 밝게 해가 뜨다.
<지명>오천지명> 시장의 곡물 값이 올랐다. 아침에 <인명>김우(金牛)인명>를 아랫마을에 보내 자리 장인이 상경하는 날짜를 탐문하게 했다.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에게 편지를 보내고자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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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2월 5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지명>대지(大枝)지명> 재직(齋直) <인명>운이(雲伊)인명>가 결환(結還)하는 일로 나와서 베끼는 일을 와서 간청하였다. 그 바르게 옮기는 것이 매우 괴로운 일이지만 십세(十世) 동안의 묘지기이니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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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9월 30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수령에게 물러남을 고했다. 돌아가는 길에 진장(鎭將)을 보고 대략 읍의 일을 언급하였다.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른하고 피곤함을 떨칠 수 없었는데, 오랫동안 출입하지 않은 나머지에 처음 일어나 움직이는 데에서 나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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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11월 9일
| 哲宗 12
| 辛酉
| 새벽부터 눈이 내리다.
둘째아이가 <지명>유평(楡坪)지명>에 재목을 나르는 일이 매우 낭패스러우니 단연코 일을 멈추어야 한다. 막내아이가 부(府)에 가는 것 또한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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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6월 10일
| 哲宗 12
| 辛酉
| 맑다.
벼 뿌리에 충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흔히 다 그러하였다. 어제 폭우가 내린 끝에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무자년(1828) 가을과 같을 것이니, 어찌 백성들에게 재앙이 닥치는 고비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