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12월 29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부터 또 비가 내리다.
<지명>법전(法田)지명>의 하인이 돌아왔다. <인명>강랑유(姜郞鍮)인명>의 편지에 이르기를 일전(日前)에 대인(大人)의 편지를 받아 보니 함풍제(咸豊帝)가 <지명>열하(熱河)지명>에서 머문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위문사(慰問使)를 보내는데 판서 <인명>조휘림(
1860년 1월 9일 | 哲宗 11 | 庚申 | 바람 불고 추운 것이 점점 혹독해지다.
어제 저녁에 <인명>원방(元方)인명>이 들어와서 말하기를, 신임 전장(銓長) <인명>홍재철(洪在喆)인명>의 표종(表從) <인명>서형순(徐衡淳)인명>은 그에게 오촌숙(五寸叔)이 되는데 장차 그로 하여금 전장(銓長)에게 소개하려한다고 한다. 혹 실효가 있을 것
1860년 1월 17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맑고 몹시 차다.
<인명>명대(命大)인명>가 어제 들어와서 말하기를 안기 승(安奇丞)이 모레 출발한다고 하므로 동문(東門) 안으로 들어가는 답서(答書)를 부쳤다. 또 <인명>금우(金牛)인명>를 시켜 사동(寺洞)에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문(南門) 안의 창곡 여가(倉谷旅家)
1860년 1월 8일 | 哲宗 11 | 庚申 | 또 바람 불고 춥다.
<지명>상주(尙州)지명> 참봉(參奉) <인명>김희영(金熙永)인명>이 하인을 보내 문안을 해서 오후에 가서 인사했다. 반인(泮人) 선달(先達) <인명>이쾌순(李快順)인명>은 자(字)가 군일(君一)이고 나이가 78세의 늙은이인데, 나의 적적함을 위로하려고 여러
1860년 1월 18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바람이 없이 차다.
식후에 <지명>사동(寺洞)지명>에 사람을 보내 답서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 과연 잠조(潛祖)의 절혜(節惠) 및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의 도기(到記)를 흔쾌히 허락했다. 밤에 가서(家書)를 썼다. 순귀(順歸)에 종 하나를 얻었는데 곧 <지명>
1860년 1월 14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안개가 끼다가 홀연 봄같이 따뜻하다.
내가 다음 달 초에 고향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밀장(謐狀)이 문득 왔다. 그런데 세말(歲末)이라 대료(大僚)의 경연의 주달에 절혜(節惠)를 예대로 시행할 것을 언급하지 않아 장문(狀文)으로 청하기 어렵게 되었다. 들으니 내일 차대(次對)를 한다고 하므로 미리 한 곳에 일
1860년 1월 26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바람 불고 춥다.
신평빈(新坪賓)과 <인명>만옥(萬玉)인명> <인명>금우(金牛)인명>를 종가전(鍾街廛)에 보내 다시 혼구(婚具)를 사오도록 했다. 저녁에 주서(注書) <인명>홍영조(洪永祚)인명> 자(字) 치석(穉錫)이 찾아왔다. 양동(良洞) 석사(碩士) <인명>이재함(李在諴)
1860년 1월 25일 | 哲宗 11 | 庚申
주서(注書) <인명>권노연(權魯淵)인명>에게 말을 빌려 <지명>사동(寺洞)지명>에 갔으나 보지 못했다. 곧바로 <지명>삼청동(三淸洞)지명>으로 가서 판서(判書) <인명>홍재철(洪在喆)인명>을 찾아보고 가질(家姪)의 장통(掌通)에 관한 일을 부탁했다. 돌아
1860년 2월 3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들으니 임금이 오늘 경모궁(景慕宮) 춘향(春享)을 거행한다고 한다. 종일토록 또 가장초(家狀草)를 다듬었다. 진사(進士) <인명>권재형(權載衡)인명>이 찾아왔다. 주서(注書) <인명>이재규(李在奎)인명>와 석사(碩士) <인명>이휘필(李彙弼)인명>이 또 찾아왔
1860년 1월 21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몹시 춥다.
이른 아침에 편지를 써서 <지명>사동(寺洞)지명>으로 올라갔다. 몇 가지 과물(果物)을 부조했다. 낮에 <인명>강면규(姜冕奎)인명> 영감과 상사(上舍) 오 모(吳某)가 찾아왔다. 오랫 동안 술을 함께 수작하며 파적(破寂)했다. 강(姜) 영감이 말하기를, "일찍이
1860년 1월 27일 | 哲宗 11 | 庚申
아침에 <지명>소산(素山)지명>의 족군(族君)이 <인명>만옥(萬玉)인명>과 함께 내려와 보러왔다. <지명>인동(仁同)지명> <지명>성곡(城谷)지명>의 맹문(孟文) <인명>장신오(張愼五)인명> 등이 동락서원(東洛書院)의 일로 보러 왔다. 주서(注書) <
1860년 2월 5일 | 哲宗 11 | 庚申
다시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를 시켜 <지명>사동(寺洞)지명>에 가도록 했다. 저녁에 돌아왔는데 들으니 병판(兵判)을 보고 가장(家狀)을 부쳤고 또 훈장(訓將)과 <인명>김응균(金應均)인명> 대감을 보았다고 했다. 병판(兵判)의 답서가 있
1860년 2월 13일 | 哲宗 11 | 庚申
비가 온 나머지 진흙탕이 바다 같았는데 선집(先集)을 찾는 일로 또 삼가(三哥)를 모처(某處)에 보냈다. 또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고민스러움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경주(慶州) 손 진사(孫進士)와 이 정언(李正言)이 찾아왔다.
1860년 2월 21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인명>김원방(金元方)인명> 척질(戚姪)이 와서 전송했다. 요청하여 아침 후에 그의 여사(旅舍) 앞을 지나가며 서로 보려고 했는데 가마꾼 무리들이 수구문(水口門)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작별하지 못해서 한스러웠다. 대개 7개월 동안 반촌(泮村)에 와 있으면서 거둔 일
1860년 1월 24일 | 哲宗 11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또 눈 올 기미가 있다.
지난밤에 『성심록(醒心錄)』 4책(冊)을 빌려왔었다. 주서(注書) <인명>권노연(權魯淵)인명> 형과 또 그 백씨(伯氏) 형에게 감사의 편지를 부쳤다. 또 찰방(察訪) <인명>박리붕(朴履鵬)인명>에게 편지를 써서 류 침랑(柳寢郞)에게 부쳤다. 주서(注書) <인명>
1860년 2월 2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비가 개다.
식후에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반촌으로 들어왔다. 대개 6일에 오기로 했었는데 한강 나루가 얼어 건너기 몹시 위험했다. 동작나루로 가서 배로 건너왔다고 한다. 매우 다행이다. 가서(家書)를 얻어 보았다. 석사(碩士) 이휘필(李彙弼)이 찾아왔다
1860년 2월 10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부터 가는 비가 오다.
지평(持平) <인명>배상련(裴相璉)인명>이 순귀(順歸)에 말을 얻어 돌아감을 알렸다. 나 또한 돌아갈 마음이 물 같았으나 선조의 글로 인해 좌우로 잡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마음이 몹시 타고 답답했다. 또한 <인명>문형(文衡)인명>의 집안사람 일행이 있는 곳이
1860년 2월 18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에 또 잔설(殘雪)이 내리다.
낮에 <지명>영해(寧海)지명> 노유(老儒) <인명>남벽양(南璧陽)인명>이 도기장(到記場)에서 돌아와서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동하재(東下齋)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기별을 전했다. <인명>경천(擎天)인명> 천령(天令)과 석사(碩士) <
1860년 2월 4일 | 哲宗 11 | 庚申 | 날씨가 조금 따뜻하다.
식후에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를 <지명>사동(寺洞)지명> <인명>문형(文衡)인명>의 집에 보내 가장(家狀)과 폐의(幣儀)를 부치도록 했는데 저녁에 보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왔다. 주서(注書) <인명>강경규(姜景奎)인명>가 찾아왔다.
1860년 2월 12일 | 哲宗 11 | 庚申 | 날씨가 조금 온화하다.
삼아(三兒)를 <인명>문형(文衡)인명> 집에 보내 선집(先集)을 찾도록 했는데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왔다. <지명>회동(會洞)지명>에서 요청한 묘지명을 곧 보내야할 때인데, 원집(原集)을 못 찾았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