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3월 19일 | 哲宗 11 | 庚申 | 비오다.
종일토록 한기(寒氣)가 사람을 핍박했다. 을풍(乙風) 때문인 듯하다. 모맥(牟麥)에 해가 없을까. <지명>경진점(京津店)지명> <인명>황만손(黃萬孫)인명>이 <지명>개포(開浦)지명>의 집을 파는 일로 보러왔다.
1860년 3월 27일 | 哲宗 11 | 庚申
하 아(夏兒)가 이른 아침 부(府)에 들어가 약을 지어 돌아왔다. 그 편에 서모(庶母)를 데리고 왔다. 밤이 이미 깊어지자 <지명>망천(忘川)지명> 김 형(金兄)이 돌아갔다. 본부의 수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1860년 3월 14일 | 哲宗 11 | 庚申
<지명>하상(河上)지명> <인명>류연조(柳淵祚)인명> 도식(道軾) 형이 보러왔다. 비복(婢僕)들을 시켜 뼈에 좋은 풀뿌리를 캐도록 시켰다. 거친 껍질을 제거하고 고(膏)를 만들어 채 아(蔡兒)의 병에 쓸 것이다. 장차 속을 따뜻하게 하는 약재로 삼을 것인데 혹
1860년 3월 22일 | 哲宗 11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들으니,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원예(院隷)가 <지명>기천(基川)지명>의 향교와 서원에 통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침에 편지를 써서 <지명>기천(基川)지명> 수령 <인명>박여(博汝)인명> 형에게 알리고 아울러 향교와 서원에 보내는 통문도 부쳤다. 그러나 날짜
1860년 3월 30일 | 哲宗 11 | 庚申
<지명>의인(宜仁)지명> 이 랑(李郞)이 돌아갔다. 편지를 <지명>강정(江亭)지명>에 부쳤다. 자형(姊兄)이 말하기를, "북협(北峽)에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은 생각이 아니다."고 했다. 채 아(蔡兒)가 낭아(狼芽)를 복용했다. 반나절 창황(蒼黃)하게 있는데 촌
1860년 3월 8일 | 哲宗 11 | 庚申
<인명>순학(順學)인명> 놈이 부중(府中)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내일 또 부(府)에 들어가 편지를 부칠 것이라고 했다. 소실(小室)이 두경(痘警)이 있음을 알려 과연 올 생각이 있으므로 오는 16일 가마꾼을 보낸다고 답서를 썼다.
1860년 3월 16일 | 哲宗 11 | 庚申 | 을풍(乙風)이 여전하다.
큰집의 하인이 이미 상경했다. 그 편에 <인명>우(宇)인명> 아의의 옷을 부치고 아울러 <인명>박순형(柳舜亨)인명>, <인명>김원방(金元方)인명> 및 반주(泮主)에게 편지를 부쳤다.
1860년 3월 24일 | 哲宗 11 | 庚申 | 맑다.
오전에 가정(家丁)들이 제니(薺苨)를 캐서 돌아왔다. 곧바로 여종들을 모아 거친 껍질을 벗기고 응달에 말리게 했다. 일을 많이 마치지 못했다. 가정(家丁)들이 말하기를, "배 생(裴生)이 잘 대해주었습니다."고 했다.
1860년 4월 2일 | 哲宗 11 | 庚申
채 아(蔡兒)가 오늘 온장탕(溫臟湯) 10첩을 다 복용했다. 그러나 배 안에 기생충의 증세가 또 있어 이것이 고민스럽다. 종일토록 개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몹시 초조하고 울적하게 보냈다.
1860년 4월 10일 | 哲宗 11 | 庚申
<지명>망천(忘川)지명>으로 사람을 보내 혼인 날짜를 전달하여 혼인을 재촉했다. 대개 두 집안이 서로 사고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명>재성(才城)지명> <인명>전재춘(田在春)인명>의 하인이 와서 상경(上京)할 짐말을 간청했다. 마지못해 빌려주었다.
1860년 4월 18일 | 哲宗 11 | 庚申 | 날씨가 매우 뜨겁다.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간행하는 비용을 배정하는 일로 풍암서원(豊岩書院)의 회문(回文)이 왔다. 오는 21일 노동서원(魯東書院)에서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인명>중거(仲擧)인명>와 가질(家姪)을 권하여 가도록 했다.
1860년 3월 1일 | 哲宗 11 | 庚申
아침에 <지명>포저(浦底)지명> <인명>홍덕언(洪德彦)인명> 형에게 편지를 써 집의 사람을 보냈다. 아울러 <지명>유곡(酉谷)지명> 사형(査兄)에게 편지를 부쳐 잔대풀을 구했다. 모두 손자의 증세를 진찰하고서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1860년 3월 9일 | 哲宗 11 | 庚申
<지명>소산(素山)지명> 김 진(金 鎭) 문중(文仲)이 보러왔다. <지명>신촌(新村)지명> 사답(沙畓)을 사려고 청했다. 대개 <지명>봉암(鳳岩)지명> 종답(宗畓)을 모두 사가는 길이었다. 청(請) 대로 하고자 하나 그 뜻이 좋지 못한듯하여 그만두었다.
1860년 3월 17일 | 哲宗 11 | 庚申 | 을풍(乙風)이 여전하다.
<지명>풍산(豊山)지명>의 예안이씨 한 사람이 와서 묵었다. 관음사(觀音寺)에 벌목(伐木)을 한다고 했다. 환우(患憂)로 여가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말이 몹시 패악하였으니 곤란한 사람이었다.
1860년 3월 25일 | 哲宗 11 | 庚申
박 진사(朴進士)가 돌아갔다. <지명>하상(河上)지명>에서 <지명>우천(愚川)지명>으로 가므로 류 침랑(柳寢郞)에게 편지를 부쳤다. 또 <지명>매원(梅院)지명>의 <인명>이상선(李相善)인명> 형에게 편지를 부쳐 채 아(蔡兒)의 병을 말했다.
1860년 4월 3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부터 구름 끼고 흐리다.
계아(季兒)가 오늘 아침에 <지명>망천(忘川)지명>으로 문장(問葬)하러 떠났다. 돌아오기까지 5일은 걸릴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7일의 부(府)의 시장에서 뱀장어 등의 물고기를 사오도록 시켰다. 마루 앞의 작은 못에 연(蓮)을 심은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지난여름
1860년 4월 11일 | 哲宗 11 | 庚申
<지명>군위(軍威)지명> 홍형(洪兄)이 멀리서 전하기를 "<지명>흥해(興海)지명> <지명>칠포(七浦)지명> 뒷산에서 문득 집 같은 큰 바위 18괴(塊)를 하룻밤에 어떤 사람이 산 위로 옮겼는데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고 했다. 매우 괴상하다.
1860년 4월 19일 | 哲宗 11 | 庚申
<지명>우천(愚川)지명> 아사(雅士) <인명>류여목(柳畬睦)인명>이 문병 차 왔다. 그의 백부(伯父) 승선(承宣)이 내게 편지를 했는데 장차 오늘 <지명>한양지명>으로 떠난다고 했다. 곧 창설재(蒼雪齋)를 입향(入享)하는 날이다. 종질(從姪)은 어제 들어갔다
1860년 4월 27일 | 哲宗 11 | 庚申
<인명>고언룡(高彦龍)인명> 형이 찾아왔다. <지명>하상(河上)지명> <인명>류도헌(柳道憲)인명> 아사(雅士)도 왔다. 족제(族弟) <인명>중칠(重七)인명>이 옥연서원(玉淵書院)에서 『여지(廬誌)』 인소(印所)로 돌아와 정축년(丁丑年) 명첩(名帖)으로 상
1860년 3월 5일 | 哲宗 11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저녁부터 비가 와서 다음 날 아침까지 개지 않다.
들으니, <지명>오천(浯川)지명> 시장에 무악(巫樂)이 크게 펼쳐졌는데 인근의 잡류들이 모두 모였고 호화스럽다고 했다. 들음에 몹시 불미스러웠다. 서족종(庶族從) <인명>중갑(重甲)인명>이 <지명>한양지명>에서 와서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