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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2월 15일
| 哲宗11
| 庚申
| 잠깐 흐리고 잠깐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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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5월 11일
| 哲宗11
| 庚申
| 아침까지 비 오다가 낮부터 잠깐 흐리고 잠깐 개고, 밤에는 맑다.
밤에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달이 대낮 같이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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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2월 17일
| 哲宗11
| 庚申
| 흐리고 저녁부터 밤새 4, 5촌 가량의 눈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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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2일
| 哲宗 11
| 庚申
족질(族姪) 마동 빈(馬洞賓)이 그의 아우 신평 빈(新坪賓)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나에게 <지명>한양지명> 길을 떠난다고 고했으니, 또한 가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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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일
| 哲宗 11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목 아(木兒)가 처가로 갔으니, 대개 신례(新禮)를 이달 22일로 통지해서이다. 계단 위의 모란 떨기를 나누었으니, 이달이 소춘(小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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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9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다. 낮에 또 비가 내리다.
아이들이 <지명>장려동(長麗洞)지명> 절사(節祀)에 가서 참석하고 저물녘이 되어 옷이 젖은 채 돌아왔다. <인명>이 홍주(李洪州)[이휘재(李彙載)]인명>가 그의 외손 윤아(輪兒)를 데리고 오늘 낮에 <지명>선성(宣城)지명>으로 출발했는데 잠시 뒤에 또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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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9월 30일
| 哲宗 11
| 庚申
| 날씨가 조금 풀리다.
신평 족군(新坪族君)의 행차를 <인명>금우(金牛)인명>에게 들으니, 이달 23일에 그와 함께 출발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분명히 도중에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근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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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8일
| 哲宗 11
| 庚申
<인명>이 홍주(李洪州)[이휘재(李彙載)]인명>와 함께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병파(屛派)와 호파(虎派)가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뜻이 있었으니, 그 말이 매우 좋으나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다만 좋은 뜻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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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6일
| 哲宗 11
| 庚申
| 모질게 춥다.
계아(季兒)가 <지명>응봉(鷹峰)지명> 절사(節祀)에 갔고 <지명>대지(大枝)지명> 경직(京直)놈은 문중일로 <지명>재산(才山)지명>에 가서 백자(柏子)를 사오려 했으나 허탕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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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9월 27일
| 哲宗 11
| 庚申
| 서리가 내리다.
식후에 <인명>금우(金牛)인명>가 내려갔다. 듣건대,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편안하다고 하니 위로되고, 시장(諡狀)도 등사(謄寫)하여 온다고 하니 다행이다. 임금이 신문내(新門內) 대궐(大闕)로 거처를 옮기는 것을 어제 이미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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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5일
| 哲宗 11
| 庚申
어제 낮에 듣건대 홍주(洪州) <인명>이휘재(李彙載)인명>가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와서 온 면(面)에 발문(發文)하여 『여지(廬志)』에 관한 일로 회의(會議)를 청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름을 얻어 농단(壟斷)하는 뜻에서 나온 것 같다. 이어서 듣건대, 손녀(孫女)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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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3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매우 춥다.
목 아(木兒)가 <지명>망천(忘川)지명>에서 비로소 돌아오자 이어서 <지명>우안(愚安)지명> 절사(節祀)에 보냈다. 사급 족질(泗汲族姪)이 폭설(暴泄)을 만나 병을 조섭하게 했다. 두문(斗文) 족인(族人)과 족질(叔姪)이 와서 유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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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21일
| 哲宗 11
| 庚申
| 따뜻하다.
<지명>회평(會坪)지명> 감찰(監察) <인명>김병욱(金炳昱)인명>이 내방하였는데 호원(湖院)의 입향참례(入享參禮) 행사 때문이었다. 삽시간 수작하고 내일 저녁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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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29일
| 哲宗 11
| 庚申
| 겨울이 따뜻하여 봄과 같다.
소회(小晦)이다. 길한 조짐인지 모르겠으나 호환(虎患)이 없는 곳이 없으며 돌림병과 잡다한 병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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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1월 8일
| 哲宗 11
| 庚申
아침에 <지명>위라(位羅)지명> <인명>몽일(夢日)인명> 놈이 비로소 <지명>한양지명>에서 돌아와 <인명>우흠(宇欽)인명>의 편지를 전해왔는데 날짜를 계산해보니 24일이었다. 그 늦는 이유를 물으니 면화(棉花)가 값이 좋지 않아 편지를 보여드리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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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4일
| 哲宗 11
| 庚申
듣건대, <지명>간산(艮山)지명> 정 정랑(鄭正郞)의 집에서 <지명>한양지명>에 하인을 보내기에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에게 편지를 부치고 아울러 문중의 돈 11민(緡)을 부쳐서 시장(諡狀)을 걸 때에 쓰게 했다. 진장(鎭將) <인명>정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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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2일
| 哲宗 11
| 庚申
종손(從孫) <인명>낙주(洛周)인명>가 초택(草擇)에서 낙방하고 돌아왔다. <지명>매원(梅院)지명> 소종손(小宗孫)이 시(詩)로 참방하여 왔는데, 그 방성(榜聲)을 듣고서 놀람을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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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20일
| 哲宗 11
| 庚申
| 따뜻하다.
이른 아침 세 심부름꾼과 말 두필을 <지명>망천(忘川)지명> 신행(新行)에 보내는 데 혹 어둡기 전에 이르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어찌 없겠는가? 하물며 가마와 여러 도구들 대부분이 본가(本家)로 들어가기를 꼭 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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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3일
| 哲宗 11
| 庚申
낮에 집하인 <인명>영직(英直)인명>이 <지명>망천(忘川)지명>에서 비로소 돌아왔다. 장차 모레에도 <지명>영서(嶺西)지명> 길을 떠날 것이니, 대개 가을에 그의 숙부를 매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여러 날 길을 떠나니 이것이 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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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1일
| 哲宗 11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어제부터 초택(草擇)을 행했지만 비 기운이 이와 같으니, 시험장의 상황이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다. 각처의 제종(諸宗)들이 <지명>대지(大枝)지명>로부터 와서 돌아가기를 고했다. 사급 족질(泗汲族姪)이 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