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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5월 14일
| 哲宗10
| 己未
<지명>법흥(法興)지명> <인명>이관수(李觀秀)인명> 형이 내방하여 유숙했는데 그의 말에는 적막함을 달래 것들이 많았다. <지명>표곡(瓢谷)지명> <인명>류안변(柳安邊)인명>이 주면(主面)을 다시 새겼는데 또한 시변(時變)과 연관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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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5월 22일
| 哲宗10
| 己未
| 종일토록 구름 끼고 흐리다. 동풍이 불고 매우 춥다.
차아(次兒)가 <지명>춘평(春坪)지명>, <지명>신양(新陽)지명>에 갔다가 돌아왔다. <지명>양동(良洞)지명> 주서(注書) <인명>이재규(李在奎)인명>가 와서 가동(家僮)들에게 동쪽 답에 모내기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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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1일
| 哲宗10
| 己未
| 비가 개고 해가 나오다.
가동(家僮)들로 하여금 비로소 남초 씨를 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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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9일
| 哲宗10
| 己未
| 산만하게 흩어진 엷은 구름이 있으나 실제 비가 내릴 조심은 아니다.
호환(虎患)이 곳곳에 들리는데 <지명>북협(北峽)지명> 모처(某處)에 민가의 여인이 호랑이에 물렸다고 하니 참으로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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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17일
| 哲宗10
| 己未
| 흐리다가 맑다가 하다. 오후에 큰 비가 내리다.
오후에 큰 비가 내려 봇도랑들이 모두 가득 찼다. 삼농(三農)의 바람에 위안이 되었으나 <인명>낙규(洛圭)인명>의 비통한 하관이 오늘이라 마음이 매우 측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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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5월 25일
| 哲宗10
| 己未
| 비가 조금 개다.
<지명>초현(初峴)지명>, <지명>백양(白陽)지명>, <지명>영광(永光)지명> 땅으로 말을 타고 가서 <지명>춘평(春坪)지명>에 돌아왔다. 피로감이 매우 심했다. <지명>거촌(巨村)지명> 김 상사(金上舍) 마을 앞에서 만나는데 <지명>하상(河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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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4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비가 밤까지 이어졌다.
5일 새벽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고통이 늙어서 그런 것이니 슬픈 탄식을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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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12일
| 哲宗10
| 己未
작은 손녀(孫女)가 월초(月初)부터 배안에 덩어리가 만져지며 고통스러워했다. 시험 삼아 곽강탕(藿薑湯)과 소합원(蘇合元)을 달여 수일동안 복용시켰더니 대변에 누에고치만한 덩어리가 나왔다. 매우 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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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3일
| 哲宗10
| 己未
계아(季兒)가 <지명>위라(位羅)지명>로부터 돌아와 김 서방(金書房)의 말을 전했는데 역시 세변(世變)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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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11일
| 哲宗10
| 己未
비로소 벼에 김을 매러 논에 들어갔으나 가뭄이 벌써 심해, 거북등처럼 많이 갈라져 추수가 없을 것 같아 어찌 고민됨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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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5월 28일
| 哲宗10
| 己未
| 흐렸다가 해 떴다 하다.
가동(家僮)들로 하여금 앞밭에 보리를 거두게 했다. 처마 풍령이 밤에 요란하게 울려 편안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인명>이곡(而谷)인명>의 권 태(權台)가 객관에 걸어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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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7일
| 哲宗10
| 己未
수상한 배가 <지명>동래(東萊)지명> 포구에 정박하여 심하게 징색(徵索)하자 부사(府使) <인명>김석(金鉐)인명>과 접위관(接倭官) <인명>강진규(姜晉圭)인명>가 모두 크게 두려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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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15일
| 哲宗10
| 己未
| 하늘에 한 점의 빗방울도 없었는지 벌써 11일이다.
논들을 우러러보니 모두 말라 갈라졌다. 일찍이 상해를 입은 끝이라 농사에 대한 기대가 매우 걱정스럽다. 아이들이 <인명>낙규(洛圭)인명>의 상에 곡하러 갔다가 모두 오대조고(五代祖考)의 제사에 참석했다. 슬픈 탄식이 얼마나 더했겠는가? 화계 족숙(花溪族叔)이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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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24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어제 오후 신나게 일이 이루어져, <인명>원방(元方)인명>이 있는 곳에 편지를 부쳐 답서를 보았다. 무릇 선대의 일을 부탁한 것이 이미 10여일이 되어도 여전히 흑백이 없었다. 자손(子孫)의 성의로 노심초사하였고, 오히려 자기 신상의 일까지 더해졌었다. 원래 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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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2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눈 같은 두터운 서리를 보다.
소회(小晦)이다. <인명>영직(英直)인명>놈을 <인명>원방(元方)인명>이 사는 곳으로 보내 그로 하여금 귤피지황탕(橘皮地黃湯)을 제조해 보내게 했으나 우선 값 8냥을 내야 해서 짓지 못하고 왔다. 대저 직접 약국에 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조반 뒤에 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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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23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가 해가 나자 조금 개다.
오늘 한 곳에 인사를 닦아야 했으나 탈 것이 없어 행하지 못해 답답했다. 승보시 삼초(三抄)를 행한다고 했다. 저녁에 <지명>위라(位羅)지명> 면상(綿商) 등이 5명이 솜을 팔고 돌아감에 더러운 의복 7건, 대련복안(大練卜鞍), 모삼정(毛參丁), 북두마륵(北斗馬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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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28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비가 오다.
<지명>회곡(檜谷)지명> 면상(綿商) <인명>김학이(金學伊)인명>가 비를 무릅쓰고 돌아감을 아뢰어 30민(緡)에 환치(換置)하고 가서(家書)를 부탁했다. 편지 속에는 손부(孫婦)가 복용할 가미불수산(加味佛手散) 15첩, 신혼(新婚) 모시치마 20척(尺) 저협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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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20일
| 哲宗10
| 己未
| 새벽부터 비오다.
<지명>위라(位羅)지명> 면상(綿商) 등이 모두 솜을 지고 닭이 울자마자 다른 가게로 나갔다. 과연 비에 젖지 않을지 모르겠다. 오늘은 바로 죽은 형의 첫 수일(晬日)이다. 궐에 들어온 후 여러 차례 꿈에서 보았는데 항시 살아계시는 것처럼 별다른 가르침의 말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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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19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오늘 나는 남촌(南村)에 인사를 닦을 겸 사람들을 찾아 볼 계획이 있었으나 탈 것이 없었고 빌릴 곳도 난감하여 류 침랑(柳寢郞)이 사는 객관으로 하인을 보내자 과연 빌려왔다. 식후에 <지명>남촌(南村)지명>으로 갔다. 길에 <인명>원방(元方)인명>을 방문하고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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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18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병든 말이 오늘 점심에 죽었다. 원래 값은 50냥이었는데 낡은 짚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수개월간 노심초사 치료했고 적지 않은 물품들이 들어갔으니 또한 어찌할꼬? 혹 액땜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까? 날 보내기가 매우 무료하여 <지명>한천(寒泉)지명>에 하인을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