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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21일
| 哲宗10
| 己未
<지명>유곡(酉谷)지명> 사형(査兄) <인명>권재기(權載基)인명>가 하인을 보내 편지로 안부했고, <인명>권수도(權璲度)인명> 형도 편지로 문안했으며, <인명>권병연(權秉淵)인명> 형, <인명>권대연(權大淵)인명>, <인명>권노연(權魯淵)인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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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2일
| 哲宗10
| 己未
| 새벽에 또 천둥소리가 났다.
곧 경칩(驚蟄)이다. 이는 바로 양기가 막 생겨나 천둥이 어룡(魚龍)을 움직이는데, 적막한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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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0일
| 哲宗10
| 己未
<지명>묵계(默溪)지명> 상사(上舍) <인명>김여용(金汝用)인명>이 역방(歷訪)했다. 오전에 가아(家兒)들이 모두 돌아왔다. 지난 가을 <지명>영서(嶺西)지명>의 농사는 큰 흉년에 이르지 않았으나 도로의 상황이 좋지 못해 날이 저물지 않아도 다니는 것이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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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8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점차 따스해지다.
사방에 쟁기와 보습을 가지고 나왔으니 봄씨뿌리기는 수일간에 마칠 수 있을 듯했다. 헐렁한 옷을 입은 빈민들은 손가락을 꼽으며 보릿고개를 계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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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26일
| 哲宗10
| 己未
| 따뜻하다.
부리(府吏) <인명>김영순(金永順)인명>이 찾아왔다. 조정에서 결정한 일로 도서원(都書員)에게 패(牌)를 부쳤다. 들으니 감회시(監會試)의 방노(榜奴)가 문 앞길을 지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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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5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밤에 큰 바람이 불다.
유곡 부(酉谷婦)가 해산 후 14일이나 되었으나 여전히 증세가 있어 완쾌할 기약이 없어 고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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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13일
| 哲宗10
| 己未
| 가랑비가 종일 내리다.
땅이 낮고 축축한 밭에는 씨앗뿌리기가 염려된다. 큰 흉작의 여년에 수확하지 못한다면 불쌍한 빈민들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동당(東堂)의 방에 고대해도 소식이 없다. 필시 허사로 돌아 간 것이니 탄식하기 않을 수 없다. 적막함을 풀기위해 노비들로 하여금 채마밭과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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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21일
| 哲宗10
| 己未
<지명>감현(甘縣)지명> 족숙(族叔) <인명>종각(宗珏)인명>씨가 편지로 문안 해 와 나도 서화첩을 만들어 등송(謄送)했다. 일용공(一慵公) 육로회(六老會)는 휘함한다. 【육로계회(六老禊會): 일용공(一慵公), 류 졸재공(柳拙齋公), 학계공(鶴溪公), 별좌(別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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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2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구름 끼고 흐리다.
<지명>우천(愚川)지명> <인명>류여목(柳畬睦)인명> 군(君)이 귀가했다. 가동(家僮)들이 줄지어 서쪽 고랑을 갈았다. 세 아들은 <지명>우안(愚安)지명> 추재(楸齋)에서 돌아왔다. 글자 가르치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백종존(伯從孫) <인명>낙주(洛周)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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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2일
| 哲宗10
| 己未
짐을 꾸려 사은숙배 길에 가려는데, 늦은 아침 가질(家姪)의 편지가 <지명>지곡(枝谷)지명> 권 형(權兄)이 내려오는 편에 왔다. 그 편지를 보니 형세로 보아 정조(正朝)의 제향(祭享)에 미치기 어려울 것 같아 지난 해 말에 아뢰어 바뀌었다고 하니 참으로 무거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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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23일
| 哲宗10
| 己未
<지명>갈전(葛田)지명> <인명>권도(權燾)인명> 형, <인명>안병추(安秉樞)인명> 형이 문안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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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3일
| 哲宗10
| 己未
| 비로소 봄기운이 있다.
문중 마을 여러 유생들이 모두 경과(京科)에 실패하여 쓸쓸함이 매우 심하다. 아침 소문을 들으니 조금 불안한 조짐이 있었는데, <인명>권합(權閤)인명>이 <지명>연산(連山)지명>에 부처(付處)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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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1일
| 哲宗10
| 己未
족제(族弟) <인명>경회(景會)인명> 또한 <지명>한양지명>에 갔다가 돌아와 저녁에 들렸다. 들으니 정월 27일 세자 백일 기념 과거에서 주상이 친히 향유(鄕儒)들을 발탁했다고 한다. 【<지명>칠곡(漆谷)지명> <인명>정기용(鄭己龍)인명>과 <지명>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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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9일
| 哲宗10
| 己未
| 온화하다. 저녁에 비올 기미가 있다.
이른 아침에 계아(季兒)를 부(府)로 보내 제반 집안 살림을 헤아리게 했다. 또 두 놈을 시켜 패(牌)로 <지명>헌읍리(軒浥里)지명> 풍헌(風憲) 김가 놈【<인명>광용(光用)인명>】을 불러 민결(民結)을 작간(作奸)한 것으로 문책했다. 오늘 저녁으로 고환(羔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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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27일
| 哲宗10
| 己未
| 바람 불다.
일전에 내가 용 아(用兒)의 혼사를 허락한 것을 <지명>현애(玄厓)지명> 이 우(李友)에게 발설한 적이 있는데, 오늘 아침 허락하는 의사가 있어 매우 다행이다. 양곡 부(良谷婦)의 순산한 지 초칠일(初七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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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6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산에 가득하여 햇빛이 없다.
오늘 동당(東堂) 회시(會試)가 있었는데 왼쪽에 앉아 장내(場內) 일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이 랑(李郞)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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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14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비가 쏟아 붓듯 내리다. 점심때 개어 비로소 해를 보았다.
<인명>범악(範岳)인명> 놈이 <지명>안역(安驛)지명>에서 돌아와, 김 동지(金同知)가 은택을 입어 오는 16일 나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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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28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들으니 <지명>달성(達城)지명> 감영 방(榜)의 기별을 들었는데 면(面)의 모모(某某) 곳의 사람들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촌(村)은 적막하니 매우 통탄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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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6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가 점심에 잠깐 해가 나오다.
<인명>채응(蔡應)인명>의 인마(人馬)가 돌아오고 그는 <지명>우천(愚川)지명>에서 머무른다고 했다. <지명>매원(梅院)지명> 이상선(李相善) 형의 문안 편지가 왔는데 편지 끝에 우 시소(右試所) 상시(上試)에 거자(擧子)들에게 변고가 있었다는 기별이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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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4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쾌청하고 온화하다.
비복(婢僕)들을 불러 앞 밭 동쪽 답(畓)에 보리를 심었다. 나는 오래 감기로 칩거한 터라 걸으며 마음을 풀 계획으로 지팡이를 짚고 교외에 나갔다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