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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3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타는 듯 덥다.
늙은 농부의 말을 듣자니 사방 교외의 높은 곳의 논은 모두 논바닥이 갈라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초화(椒花)도 모두 말라버렸으며, 면실(綿實)도 모두 떨어져버렸으니 농사가 매우 염려된다. 내일은 곧 대왕대비 김 전(金殿)의 종상(終祥)이다. 처음에는 가질(家姪)과 곡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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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1일
| 哲宗10
| 己未
| 맑다.
오후에, 차아(次兒)를 데리고 갔던 <인명>영직(英直)인명> 놈이 3일 반 만에 곧장 내려왔다. 대개 8일의 정사(政事)에서 내가 감조관(監造官)에 제수되었으니 기특하다. 매우 감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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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9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비로소 영(營)으로 가 직책을 맡을 계획으로 반인(頖人) <인명>이천길(李天吉)인명>을 시켜 뉴자(靵子) 및 사모(紗帽), 흑대(黑帶), 목혜(木靴) 등의 물품을 사오게 했다. 저녁에 전 반주(泮主)에게 가서 만났는데, 그의 집이 매우 협소하기가 이를 데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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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7일
| 哲宗10
| 己未
| 밤에 비가 한 호미 내리다.
입직(入直)했다. 안부편지를 써서 벗 <인명>김병욱(金炳昱)인명>에게 부쳤다. 나는 뱃속이 끓고 아프고 소변도 잘 보지 못하여 밤새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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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6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입직(入直)했다. 하인을 보내 편지를 <지명>장동(長洞)지명>에 부쳤다가 이 태(李台)의 답장을 받아 봤는데, 관복(官服)을 흔쾌히 빌려준다고 하니 다행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정랑(正郞) <인명>김상희(金相喜)인명>가 운서암(雲栖庵), 학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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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6일
| 哲宗10
| 己未
| 큰 눈이 내리다.
<지명>하상(河上)지명> <인명>류결성(柳潔城)인명>과 <인명>류광목(柳光睦)인명>이 편지로 안부를 물었고 또한 말린 물고기와 음식물을 보내왔다. <지명>오계(梧溪)지명> 문중의 장로들이 연명의 편지로 안부를 물어왔다. 【족질(族姪) <인명>종욱(宗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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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9일
| 哲宗10
| 己未
| 종일 구름 끼고 흐리다.
입직(入直)했다. 오늘은 중양절(重陽節)이다. 그래서 동료들 각 집에서 좋은 음식들을 마련해 왔다. 그들이 먹기를 권하였는데, 먹지 않는 것 또한 조속(粗俗)한 것에 관계된지라 그들과 함께 배불리 먹었다. <지명>전고(前臯)지명>의 척종질(戚從姪)인 상사(上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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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19일
| 哲宗10
| 己未
감시(監試) 초장(初場)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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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조금 풀리다.
새벽하늘이 너덧 번 천둥이 치자 닭들이 요란하게 울다 그쳤다. 아침 전에 또 울었다. 점심에 <지명>지례(知禮)지명> 이제(姨弟) <인명>소수(邵壽)인명>가 내방했다.【자는 덕부(德夫)이고 신유(辛酉)년에 태어났음.】 요 몇 년 사이 두 아들과 손자 하나를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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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9일
| 哲宗10
| 己未
<지명>망천(輞川)지명> <인명>김종진(金宗鎭)인명> 형과 <인명>김회행(金會行)인명>이 내방했다. 밤에 촌내(村內) <지명>한양지명>에 간 유생들 서너 명이 먼저 와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집안 아이들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들으니 <지명>오계(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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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7일
| 哲宗10
| 己未
| 오후에 구름 끼고 흐리다.
아침에 범 한(範漢)을 <지명>예천(醴泉)지명>에 보내 패(牌)를 <지명>위라(位羅)지명> 서원(書員)에게 부탁했다. 반경좌(班景座)의 복수(卜數)를 규정(規正)하기 위함이다. <지명>마동(馬洞)지명> 족질(族姪)이 겸하여 사람을 보낸다하여 오재(梧齋)에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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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5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입직(入直)했다가 오후에 나왔다. 금관복(金冠服)을 빌리는 일 때문에 <지명>장동(長洞)지명> 이 참판(李參判)의 집에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직장(直長) <인명>김형집(金亨集)인명>이 하인을 통해 편지를 써서 『청송집(聽松集)』과 『우계집(牛溪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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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4일
| 哲宗10
| 己未
둘째 셋째 두 아들이 모두 어제 경과(京科)를 보러 갔는데 증광감시(增廣監試) 초시(初試)로 오는 19일에 있다. <지명>감현(甘縣)지명> 족제(族弟) <인명>중두(重斗)인명>, <지명>오치(梧峙)지명> <인명>이횡원(李黌源)인명> 우(友)가 편지로 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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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26일
| 哲宗10
| 己未
| 며칠 전부터 아침마다 안개가 짙다.
<지명>달성(達城)지명>에 과거보러 간 유생(儒生)들은 먼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듣자하니 <인명>손갑(孫甲)인명>은 달성 감영에서 시험을 보았고, <인명>채응(蔡應)인명>은 <지명>달성지명> 감영에서 함안 우시(咸安右試)를 보러 갔다고 한다. 쌓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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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5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가 저녁엔 일광(日光)이 없다.
광흥사(廣興寺) 승려 지봉(指奉)이 찾아왔다. 채 아(蔡兒) 고대하나 돌아오지 않아 매우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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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3일
| 哲宗10
| 己未
| 종일 큰 바람이 불다. 또한 한발의 조짐이 있다.
도성(都城)에 도적의 알림이 있었는데, 지난 가을부터 변괴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올 봄 2월초에 포도대장 행로(行露)가 훈련장으로 돌격하여 적괴(賊魁) 18인을 베었다고 한다. 협박당해 추종했던 자들도 벌을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통쾌하고 다행이다. 집 가까이 적경(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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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15일
| 哲宗10
| 己未
밤에 개기 월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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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월 30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또 춥다.
27일에 들으니 세자(世子) 백일 기념 과거가 있다고 하는데 경감(京監)의 소식이 모두 막연하고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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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8일
| 哲宗10
| 己未
| 오후에 바람 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소와 말을 <지명>토진(兎津)지명>으로 보내 소금을 사고, 그 편에 손자에게 편지를 써서 타고 오게 했다. 족제(族弟) <인명>중유(重裕)인명>가 <지명>영천(榮川)지명> <지명>반포(反浦)지명>에서 와서 전하기를, 그의 동생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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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2월 16일
| 哲宗10
| 己未
<지명>형호(衡湖)지명> 재종형(再從兄)이 80 노구에 황달 증세가 있다고 하여 가서 증세를 진찰하고, 둘째 <인명>거종(擧從)인명>을 대면하여 여막(廬幕)과 뜻을 이어받을 것을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