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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6일
| 哲宗10
| 己未
| 저녁에 구름 끼고 흐리다가 비가 내리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아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 정돈했다. <인명>영직(英直)인명> 놈을 시켜 말을 먹이라고 했는데 말이 말죽을 먹지 않고 또 복통을 일으키니 일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격인지라 어찌 급작스러운 상황에 변통 할 수 있겠는가? 병든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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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8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장시간동안 마치 안개가 뒤덮인 것 같아 해가 나와도 빛이 없다.
아침에 도감 서리(都監書吏)가 내일 습의(習儀) 이후 의물(儀物)을 받들어 입궐하는 것 때문에 와서 고목(告目)을 올렸다. 그래서 병든 상황이 이와 같아 나아가 참여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도감소(都監所)에 편지로 통보했다. 아침 늦게 비로소 좁쌀미음 반 그릇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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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12일
| 哲宗10
| 己未
| 조금 쌀쌀하다.
<지명>장동(長洞)지명> <인명>이태(李台)인명>가 말을 빌리자는 요청에 매우 난처해했다. 식후에 <인명>영직(英直)인명>으로 하여금 그의 집으로 끌어가게 했다. 그 등에 난 창(瘡)을 보니 현황(玄黃)의 모습이었다. 답서(答書)에 장난삼아 "먹이고 단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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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7일
| 哲宗10
| 己未
| 음무(陰霧)의 기운이 나날이 심해져서 아침 내내 햇빛을 볼 수 없다.
이른 아침에 한 차례 설사를 겪고 나니 입맛이 변하고 근력이 시들해져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오늘은 봉록(捧祿)을 받는 날이다. 하인과 말을 <지명>광창(廣倉)지명>에 보내버려서 수하에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위장(胃腸)을 평안하게 할 약을 지어오고자 했으나 속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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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10일
| 哲宗10
| 己未
해가 뜰 때 안개 같으면서 악기(惡氣)같은 기운이 성내(城內)에 가득했다. 어찌 때 아닌 기운들이 멋대로 행해짐이 심해지는가? 내일은 또 존숭(尊崇)하고 진하(陳賀)하는 날이다. 문 열기를 기다려 입궐할 텐데, 미리 경과에 대한 마음 씀이 절실하다. 주서(注書)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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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4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조금 맑다.
책보(冊寶)를 들이는 것과 존숭(尊崇) 습의(習儀)에 참여하는 것 때문에 서리(書吏)의 고목(告目)에 의하여 동 틀 새벽에 일어났다. 촛불을 밝히고 세수 하고 머리를 빗고는 세 푼의 장반(醬飯)으로 요기한 후 율관청(律官廳)에 갔다. 여러 동료들이 늦은 이후 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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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6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이불을 가지고 입직(入直)하였는데, 음무(陰霧)의 기운이 침범하여 매우 힘들었으나 당번에게 있어서 어찌하겠는가? 공조청(工曹廳)에 들어가 동료 <인명>이원성(李源星)인명>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묘(祔廟)의 의물(儀物)들을 봉심(奉審)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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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11일
| 哲宗10
| 己未
닭 울음을 듣고 일어나 앉아 병(餠)과 죽(粥)으로 요기했다. 의관을 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가니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곧장 들어가 상서원(尙瑞院) 앉자 동료들이 차례로 모였다.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로 들어가 조금 쉬자 백관들이 모두 모였다. 대가(大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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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5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매우 춥고 서리가 눈처럼 내리다.
해가 난 이후에도 <지명>남산(南山)지명>은 항상 운무(雲霧)에 싸여 흐리하게 비췄다. 아침에 매우 춥고, 짙은 서리가 눈처럼 내려서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다. 대개 올해의 서리는, 여태까지는 된서리[肅霜]가 없어서 나뭇잎들이 다만 붉고 말랐으나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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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30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음려(陰沴)하다. 밤에 소나기가 오다.
음려(陰沴)의 기운으로 아침에 <지명>잠두봉(蠶頭峰)지명>을 바라봐도 산의 형체도 보이지 않으니 기상(氣像)이 시름겹고 참담하다. 오늘 아침에 또 붕어[鮒魚] 5마리를 사서 사람을 시켜 푹 달이게 하였고, 또 미음을 만들게 했으나 위장(胃腸)이 냉(冷)한 것이 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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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5일
| 哲宗10
| 己未
| 가랑비가 내리다.
입직(入直)했다. 담당 당상관(堂上官)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오후에 직소(直所)를 나왔다. 아침 전부터 또 설사 증세가 있어 입맛이 변하여 아침을 먹지 못했으니 객지에서의 생활이 갈수록 더욱 견디기 힘들다. 식주가(食主家)에서 와서 식대를 달라고 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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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3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창문을 열어 보니 안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성내(城內)에 가득 퍼져 <지명>남산(南山)지명> <지명>잠두봉(蠶頭峰)지명>의 형체가 희미했다. 곧바로 창을 닫고 적막히 앉았다. 할 일 없는 것이 괴로워 책을 펴서 열람하고자 했지만 창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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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5일
| 哲宗10
| 己未
들으니 <지명>동래(東萊)지명>의 수상한 선박이 돌아 갈 때 면(面)의 <인명>아탐곡(阿呑谷)인명>놈이 행상으로 동래부에 가서 동래 사람 여럿이 그 배에 올라타고 갔다고 하여 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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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3일
| 哲宗10
| 己未
| 비 조짐이 개지 않다. 훈증을 견디기 어렵다.
<인명>용흠(龍欽)인명>이 또 <지명>하상(河上)지명>에서 <지명>지곡(枝谷)지명>을 거쳐 찾아왔다. 두 곳의 말을 전했지만 그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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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1일
| 哲宗10
| 己未
| 맑다.
이른 아침 입직(入直)했다. 족질(族姪) <인명>문흠(文欽)인명>을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보내니 서운하고 암담한 회포가 없지 않다. 동료 <인명>정기덕(鄭基德)인명>이 회동 대신(會洞大臣)이 복을 누리는 이유에 대해 말하길, "대신(大臣)의 친산(親山)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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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이른 아침 가마를 타고 <지명>장동(長洞)지명>으로 가서 이 태(李台) 집안의 상(喪)에 조문을 했다. 금관복(金冠服)의 여러 피복 건들에 관해 물으니 홍상(紅裳), 홍삼(紅衫), 후수(後繡), 제구(祭屨) 4건(件)이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지명>이현(泥峴)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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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9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또 전날과 같다.
오늘은 곧 존숭(尊崇)하는 첫 번째 습의(習儀) 날이고, 또 각양의 의장(儀仗)을 받들고 여러 당상관(堂上官), 낭관(郎官)들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나는 아침 전에 설사로 혼절하여 인사불성 상태였다. <인명>영직(英直)인명> 놈을 시켜 붕어[鮒魚]와 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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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4일
| 哲宗10
| 己未
입직(入直)했다. 말의 병이 시종 차도가 없고 등의 피부가 썩어 뼈가 나와 폐사할 지경이니 거듭 공고(公故)를 매일 알려오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달 20일 이후 연달아 습의(習儀) 일정도 있으니 시름겹고 고민됨을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아침 전에 승선(承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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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2일
| 哲宗10
| 己未
| 종일 구름 끼고 흐리다.
종일 구름 끼고 흐린 것이 흑기(黑氣)와 같았기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지명>한양지명>에 입성한 이후 어제 밤에야 비로소 편안히 잤다. 정랑(正郞) <인명>정창휴(鄭昌休)인명>가 숙소로 찾아왔으니 적막하던 가운데 그의 뜻이 진실로 감사하다. <인명>영직(英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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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4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들으니 <지명>병곡(屛谷)지명> <인명>권남대(權南坮)인명> 공이 첩(帖)을 내려 주시어 당내(堂內) 너덧 명이 함께 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다행히 종일 미풍이 불어 무더워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