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8년에 안동에 거주하는 권자겸 등 13인의 사대부들이 결사한 친목 모임의 계회첩
내용 및 특징
안동일대에는 조선초기 이래로 중국의 「香山九老會」「眞率會」를 모방한 상당수의 노인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李增의 「友鄕稧」, 李浤의 「眞率會」, 權暐의 「壬癸會」등이 그것이다. 우향계는 이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수계된 계회로서 조선 태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李原(1368∼1430)의 아들 李增(고성이씨)이 안동으로 낙향하여, 1478년에 학덕있는 안동의 선비 12명(안동권씨 3명·흥해배씨 4명·영양남씨 4명·안강노씨 1명)과 함께 우향계를 조직하고 회원 13명이 ‘계첩’을 하나씩 나누어 가진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에는 회원 13명의 직역·성명·본관·아버지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한 명부와 원첩 및 당시 문호인 서거정(1420∼1488)이 조선 성종 9년(1478)에 쓴 7언시의 頌詩가 첨부되어 있다. 우향계축에 기재된 인물들은 계를 결성할 당시 50~60세에 이르렀으며 정치적인 성향은 주로 世祖 受禪에 반대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거나 官爵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둔한 지사들이었다. 이들이 정한 우향계란 이름은 “한 고을의 선한 선비는 그 고을의 선한 선비와 벗하고(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라는 『맹자』의 한 구절에서 취하였다. 이후 계원들은 이날의 모임을 기리기 위해 稧軸을 만들어 나누어 가졌는데, 계축에는 13인의 좌목과 당시 조정의 원로이자 문장가인 四佳亭 徐居正이 지은 「附友鄕稧歌」란 訟詩가 실려 있다. 이 우향계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족의 후예들이 안동출신 사족들과 연대하여 결속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자 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여러 명칭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우향계안에 이름을 올렸는데 1478년부터 1903년까지 계회에 참여한 인물들은 약 570인에 이른다. 좌목에는 주로 계원들의 직역과 성명, 본관, 字, 생년, 거주지 등의 항목을 적고 부친이나 우향계의 창립선조들과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이 밖에도 취회 일시와 장소, 참여인원 등이 기록되어 있어 우향계의 계승과 확장 과정을 잘 알 수 있다. 이들 13인이 우향계를 조직한 뒤, 李增의 아들 李浤이 그의 아우, 매부 및 다른 회원의 子壻 등 15명과 함께 ‘眞率會’를 조직하였으며, 이굉의 서자 李側이 아버지의 碑陰記에 진솔회를 결성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이러한 우향계와 진솔회를 ‘稧軸’으로 만들어 회원이 나누어 가졌는데 그 원본의 하나가 충재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우향계축(보물 제896-1호)이다. ‘우향계첩’은 상기 원본을 전사 및 추후 정리한 것으로 그 내용은 1.당초 友鄕계軸, 2.眞率會, 3.重修友鄕계回文, 4.世好稧案과 座目, 5. 詩帖, 6.修好稧案과 시첩 등 우향계가 처음 작성된 성종 9년 이래 고종 광무 7년(1903) 4월 17일 廣興寺修계時까지 425년간의 ‘우향계’가 진솔회→세호계→수호계로 계승·확장해 온 과정과 각 계회의 조직 경위와 회원 명단 및 송시첩까지 차례대로 기술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友鄕稧帖’은 당초 ‘우향계축’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승한 ‘진솔회'와 ’세호계‘ 및 ’수호계‘까지 400여 년간 당초 회원 13명의 내외후손들이 그때 그때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확대 재결성하고 모임 때마다 회원들의 송시첩을 잘 정리해 놓은 책자로서 1478년에 작성된 우향계가 어떻게 계승· 발전해 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조선시대 계회의 변천사례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중 ’우향계축‘은 성종 9년(1478)에 안동에 거주하는 권자겸 등 13인의 사대부들이 결사한 친목 모임의 계회첩으로 조선전기 契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충재종택, 『友鄕契軸』(보물 제896-1호) / 안동민속박물관,『友鄕稧案』, 시도유형문화재 제327호.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安東의 契』, 安東民俗博物館 編, 安東民俗博物館, 2006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