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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도산서원(陶山書院) 통고(通告)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F.1906.4717-20160630.y165010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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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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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고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고
작성주체 도산서원, 동강서원,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19.5 X 43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6년 도산서원(陶山書院) 통고(通告)
1906년 6월 27일, 경주손씨들이 부당하게 실기를 간행하고 패지를 돌린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동강서원 창고지기에게 보내는 도산서원의 통고문이다. 통고문은 먼저 손씨의 실기 책자 속에 들어 있는 이 글들은 세 집안을 불행하게 하는데 근자에 출간되었다고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손씨들은 참으로 뉘우칠 줄 모르고, 또한 그들 자신이 집요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어찌된 까닭으로 조화롭게 하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서 실기에 새겨 첨부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들의 글에는 선조를 존중하고 호위하는 도리에 큰 흠결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믿고 선조를 존중하려는 생각은 않고 도리어 조롱하고 핍박을 하며, 그것을 빌미로 회재의 문집을 근거 없이 마음대로 꾸며지은 것으로 없애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방자하게 편지에다가 적어놓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좋지 못한 버릇으로 우리 유학계에서 얻은 죄가 그 글을 지은 사람들보다 가볍다고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간행된 책자는 결단코 사사로이 도내에 배포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선언을 했다. 그런데 근자에 사사로운 정의와 친분으로 책자를 받은 사람들에게서는 낱낱이 모두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보내온 패지는 반드시 손씨댁에 가지고 가서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말로 통고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고문 자체만을 보면 경주손씨들의 잘못을 꾸짖는 내용인 것은 알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사태는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에 ‘후학’이라고 쓴 것은 퇴계가 쓴 것이 아니라 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말을 진성이씨인 이만도, 이만규, 이병호 세 사람으로부터 나왔다는 소문에서 비롯되었다. 손씨들은 이 말을 근거로 󰡔회재집󰡕을 없애야 한다는 패지를 돌리고, 도산서원에서는 그것은 근거 없는 말이라며 이 통고문을 보내 손씨들을 질책한 것이었다. 이 통고문은 원래 우재를 배양하는 동강서원으로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도산서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후학’이라는 말이 손씨들의 주장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통문을 옥산서원에 보내면서 함께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통고문이 동강서원의 창고지기 앞으로 된 것은, 패지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권리를 이양하여 아랫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 이수건, 일조각, 1995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 『민족문화논총』 4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6월 27일, 慶州孫氏들이 부당하게 實記를 간행하고 牌旨를 돌린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東江書院 창고지기에게 보내는 陶山書院의 通告文
1906년 6월 27일, 慶州孫氏들이 부당하게 實記를 간행하고 牌旨를 돌린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東江書院 창고지기에게 보내는 陶山書院의 通告文이다.
이 통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씨의 실기 책자 속에 들어 있는 이 글들은 세 집안을 불행하게 하는데 근자에 출간되었다고 했다. 손씨들처럼 先祖를 망각하고 義理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어느 때인들 없었겠는가마는, 그들의 행동을 聲討하는 말들이 몰려들고 있는데도 그들은 참으로 뉘우칠 줄 모르고, 또한 그들 자신이 집요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어찌된 까닭으로 조화롭게 하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서 실기에 새겨 첨부했는가라고 되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들의 글에는 선조를 존중하고 호위하는 도리에 큰 흠결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믿고 선조를 존중하려는 생각은 않고 도리어 조롱하고 핍박을 하며, 그것을 빌미로 晦齋의 문집을 근거 없이 마음대로 꾸며지은 것으로 없애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방자하게 편지에다가 적어놓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좋지 못한 버릇으로 우리 유학계에서 얻은 죄가 그 글을 지은 사람들보다 가볍다고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간행된 책자는 결단코 사사로이 道內에 배포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선언을 했다. 그런데 근자에 사사로운 情義와 친분으로 책자를 받은 사람들에게서는 낱낱이 모두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보내온 패지는 반드시 손씨댁에 가지고 가서 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말로 통고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고문 자체만을 보면 경주 손씨들의 잘못을 꾸짖는 내용인 것은 알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이 통고문이 보내진 배경은 1904년에 재연된 孫仲暾의 후손인 경주 손씨와 회재의 후손인 驪州李氏 사이의 是非가 있다. 그 당시 손씨들은 이씨들의 종가인 無忝堂에 所藏하고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愚齋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를 발견했다. 이것은 손씨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 동안 손씨와 이씨 사이에는 회재우재의 학문을 的授했는지 아닌지를 두고 두 차례나 싸웠다. 첫 번째는 1773손중돈을 배향하는 동강서원의 廟宇를 중건할 때 그 上樑文에 大山 李象靖회재우재의 道脈을 바로 이어받았다고 기술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회재의 후손인 여주이씨들의 강력히 항의로 인해 대산의 상량문는 그날로 勘定되어 本家로 돌려보내지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두 번째는 1845년 손씨들이 󰡔�愚齋實記󰡕를 증보하여 간행하면서, 문제가 되었던 대산의 그 상량문을 다시 실으려 한 것이었다. 이때 이씨들은 이전과 달리 강력하게 저항하는 손씨들에 맞서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들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러자 도내의 여론은 이씨들에게 기울어졌고, 결국 󰡔우재실기󰡕에는 그 상량문을 싣지 않는 것으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이렇게 두 번의 아픔을 겪은 손씨들은 󰡔여강세고󰡕에서 발견한 그 장문과 만사는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회재우재의 학문을 이어받았다는 증거로 삼을 만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손씨들은 󰡔景節公實記󰡕를 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통고문에서 손씨의 실기라는 것은 바로 이 󰡔경절공실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실기에 새롭게 발견된 장문과 만사만 실은 것이 아니었다는데 있었다. 손씨들은 회재우재의 학문을 바로 이어받았다는 전제하에 회재의 諱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문제가 되었던 대산의 상량문에 나오는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를 하고, 마지막에는 이를 근거로 眞城李氏인 李晩燾, 李晩煃, 李炳鎬 3인으로부터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했다는 내용의 詩와 跋文을 받아 󰡔경절공실기󰡕에 실었다. 그리고 이것을 1904년 4월에 배포했다. 이 통고문에서 이들의 글에는 선조를 존중하고 호위하는 道理에 큰 흠결이 있다고 했을 때의 이들이 바로 이 진성이씨 세 사람이다. 이들로 해서 도산서원은 자신들 또한 손씨와 이씨 사이의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기에 이것이 세 집안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손씨들의 이러한 행위는 이씨들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이씨들은 즉각 인근의 14개 門中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의 연원과 관련된 것이기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것이 아니라 士林 전체의 道脈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을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과거에는 이씨와 손씨의 문중 싸움이었던 것이 단숨에 경상도 전역의 문제로 번져나가면서 두 집안은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손씨들은 이번 실기를 重刊할 때까지만 해도 이전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자신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여러 정황들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통고문에서도 보는 것처럼 여론은 이번에도 이씨들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간행된 󰡔경절공실기󰡕는 배포의 금지를 공론으로 결정했다. 이 통고문에서 배포된 책자를 낱낱이 모두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공론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론이 결정되자 사태는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사태에 또 다시 불을 붙이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退溪가 쓴 회재의 行狀에 ‘後學’이라고 쓴 것은 퇴계가 쓴 것이 아니라 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말을 앞의 세 진성이씨로부터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렇게 되자 수세에 몰려있던 손씨들은 이것을 빌미로 멋대로 지어진 󰡔회재집󰡕을 없애야 한다는 패지를 돌리며 이씨들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 일마저도 손씨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 일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도산서원에서는 1906옥산서원에 통문을 보내 직접 손씨들의 주장을 부정하며, 󰡔晦齋集󰡕에도 ‘後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퇴계의 문집에도 원래부터 있었다고 이씨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 통고문에서 손씨들을 향해 뉘우칠 줄도 모르고 집요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고 한 것은 소문을 믿고 패지를 돌린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손씨와 이씨 사이에 있었던 세 번째 시비에서도 이씨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통고문은 원래 우재를 配享하는 동강서원으로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옥산서원에 있게 된 것은 문제가 되었던 ‘後學’이라는 말이 손씨들의 주장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통문을 보내면서 함께 보냈기 때문이었다. 도산서원에서 이렇게까지 한 것은 이 시비에서 진성이씨들이 관계되어 진성이씨의 대표로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향촌에서 이씨들의 위세가 손씨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통고문이 동강서원의 창고지기 앞으로 된 것은, 패지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권리를 이양하여 아랫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고문은 18세기 이후 영남의 班村에서 일기 시작한 士族 상호간의 시비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그 시비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직간접으로 연관된 사람들까지 연루되어 더욱 큰 시비로 번졌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 통고문은 孫氏와 李氏 사이의 시비에서 상황들이 어떻게 전개되고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그에 연관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 이수건, 일조각, 1995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 『민족문화논총』 4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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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江庫子處
除孫氏實紀冊子中此中作文
三家不幸近出其忘先背義何
代無之聲討踏至而苦不知悔
抑未知執拗何由孫氏勝然不省
故爲刊附此等人文字大有欠於
爲先尊衛之道而不性罔念尊
祖反乃侮逼 先正杜撰毁板
等字肆然筆之於書是何等
悖習得罪斯文惡可曰輕於作
家乎謬刊冊子斷不可私布
道內而此近所謂情面所受
者這這推還玆又投牌 須
持告于孫氏宅爲可
丙午六月二十七日
陶山書院堂中

此亦中前狀
所來東江所牌悖
逼並爲還逐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