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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F.1906.4717-20160630.y165010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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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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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중철, 이중찬, 이만현, 이만윤, 도산서원,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88 X 60.2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906년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1906년 6월 18일, 3인의 진성 이씨로부터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고 한 것은 여주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말을 근거로 󰡔회재집󰡕의 파판을 주장하는 경주손씨들을 유적에서 삭제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옥산서원에 알리는 도산서원의 통문이다. 그래서 이 통문은 먼저 경주손씨들의 허위로 떠들어대면서 시비를 일으켰다며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 손씨들의 문제가 되는 행위들을 하나씩 들어가면서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재의 실기인 󰡔경절공실기󰡕를 중간하겠다는 것은 헛된 일로, 공론에 의해 간행하지 못하도록 결정된 사안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손씨들은 실기를 중간하여 몰래 도내에 배포하기에 도산서원에서 실기의 목판을 파기하라고 통보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간혹 손씨와의 정의나 안면 때문에 받기도 하고, 또 집안 사이의 인연으로 생긴 사사로운 정 때문에 억지로 받는 곳이 있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적인 것으로 어찌 공적인 마음이나 공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그 후에 손씨들이 소란을 떨며 없는 말을 지어내 유학계를 어려움에 빠지게 했다고 했다. 그 소란이란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에 ‘후학’이라는 글자를 이씨들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니 󰡔회재집󰡕의 목판을 부셔야 한다는 패지를 손씨들이 돌린 것이었다. 하지만 퇴계의 문집을 간행하는 당사자인 도산서원이 이 통문을 돌려 ‘후학’이라는 글자가 퇴계의 문집에 분명히 실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손씨들의 이런 태도는 시운이 험난한 때를 당하여 공의가 사라지고 사사로운 견해가 퍼진 것이고 손씨들을 향해 직접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손씨들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 볼 수 없어 그들을 儒籍에서 영원히 삭제하려고 하니 양해해주기 바란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1773년부터 시작된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사이의 시비가 1845년에 다시 일어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해결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여론이 이씨 쪽으로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통문은 손씨와 이씨 사이의 시비가 어떻게 전개되고, 또 그 결말이 어디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 이수건, 일조각, 1995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 『민족문화논총』 4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6월 18일, 3人의 眞城李氏로부터 晦齋의 行狀에 退溪가 ‘後學’이라고 쓴 것은 驪州李氏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말을 근거로 󰡔晦齋集󰡕의 破板을 주장하는 慶州孫氏들을 儒籍에서 삭제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陶山書院의 通文
1906년 6월 18일, 3人의 眞城李氏로부터 晦齋의 行狀에 退溪가 ‘後學’이라고 쓴 것은 驪州李氏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말을 근거로 󰡔晦齋集󰡕의 破板을 주장하는 慶州孫氏들을 儒籍에서 삭제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陶山書院의 通文이다.
이 통문은 먼저 세속이 갈수록 저급하게 되어 마침내 時運이 험난한 때에 이르러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公議는 사라져버리고 일시적인 사사로운 견해만 마구 흘러 넘쳐 유학계에 온갖 변괴들이 있게 되었다는 탄식의 말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서 慶州孫氏들의 허위로 떠들어대는 말들에 이르러 괴이하고 패악한 것이 극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1904년부터 다시 시작된 驪州李氏와 경주손씨 사이의 是非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시비에서 손씨들의 행위를 질타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문은 손씨들의 문제가 되는 행위들을 하나씩 들어가면서 비판하였다.
먼저 愚齋의 실기인 󰡔景節公實記󰡕를 중간하였다고 마구 떠들어대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배포가 불가하다는 것을 이미 공론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내의 여러 학자들이 간파하여 모두 알고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고 분변하여 밝힐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손씨들은 실기를 몰래 도내에 배포하기에 도산서원에서 실기의 목판을 파기하라고 통보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간혹 손씨와의 情義나 안면 때문에 받기도 하고, 또 집안 사이의 인연으로 생긴 사사로운 정 때문에 억지로 받는 곳이 있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私的인 것으로 公的인 마음이나 공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그 후에 손씨들이 소란을 떨고 없는 말을 지어내 유학계를 어려움에 빠지게 한 것은 갈수록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에 ‘後學’이라는 글자를 이씨들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니 󰡔晦齋集󰡕의 목판을 부셔야 한다는 牌旨를 손씨들이 돌린 것은 유학계의 변고 가운데 가장 흉악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통문은 ‘後學’이라는 글자가 퇴계의 문집에 분명히 실려 있다고 했다. 그리고 퇴계의 문집을 처음 간행할 때부터 여러 차례 중간을 거치기까지 300여년에 이르지만 여기에 대해 한마디도 의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회재집󰡕을 처음 간행했을 때부터 국내의 여러 선생들이 교정을 하고, 회재 본가의 여러 어르신들이 살펴서 바로잡았을 것이니, ‘後學’이라는 두 글자가 원래부터 없었다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이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친히 받아 믿고 따라 고침이 없었기에 그 후 한결같이 퇴계의 문집을 󰡔회재집󰡕에 따라 보충하여 중간하였지만 이상한 견해나 괴상한 주장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손씨와 이씨 사이의 시비에서 멋대로 이전에 없던 말을 지어내어 막되고 괴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시운이 험난한 때를 당하여 공의가 사라지고 사사로운 견해가 퍼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무슨 역량으로 무엇을 믿기에 󰡔회재집󰡕을 없애야 한다는 패지를 무엄하게 베껴내어 유학계에 걱정거리를 만드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했다. 그래서 이런 습관은 자라게 할 수 없어 손씨를 儒籍에서 영원히 삭제하려고 하니 양해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장차 이러한 뜻을 도내에 통고하여 󰡔경절공실기󰡕을 몰래 받거나 억지로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것이 공적인 것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을 알게 하여 선비들의 趨向을 바르게 하고 유학계를 호위할 수 있었으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영남의 3대 시비 중의 하나라는 孫李是非와 관련된 것이다. 이 시비는 18세기 때부터 시작된 오래고도 뿌리 깊은 것이다. 이 시비는 1773孫仲暾을 배향하는 東江書院의 廟宇를 重建할 때 大山 李象靖이 그 上樑文에 회재우재의 道脈을 바로 이어받았다고 기술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자 회재의 후손인 여주이씨들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결과 대산의 상량문은 그날로 勘定되어 本家로 돌려보내지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845년 손씨들이 󰡔愚齋實記󰡕를 증보하여 간행하면서 문제가 되었던 대산의 상량문을 다시 거기에 실으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이씨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손씨들도 쉽게 물러나려하지 않자 이씨들은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사태의 부당성을 알리며 손씨들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三溪·東洛·洛峰·南江書院 등을 비롯한 다수의 서원들이 이씨들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온 반면에, 虎溪書院과 같이 양자를 중재하는 통문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남은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당시의 여론은 이씨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 결과도 이씨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손씨들이 도내의 여론에 밀려 문제가 되었던 상량문을 󰡔우재실기󰡕에 싣지 않은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을 본 것이 아니었다. 이 통문이 있기 2년 전인 1904년 이씨들의 종가인 無忝堂에 소장되어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우재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면서 그 동안 잠복되어 있던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손씨들은 이 글들을 계기로 󰡔경절공실기󰡕를 중간할 계획을 세우면서 새롭게 발견된 장문과 만사를 추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씨들을 격분케 하는 일들을 계획했다. 먼저 회재우재의 학문을 바로 이어받았다는 전제하에 회재의 諱를 쓰고, 이어서 문제가 되었던 대산의 상량문에 나오는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를 하고, 마지막으로 이를 근거로 진성이씨인 李晩燾, 李晩煃, 李炳鎬 3인으로부터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했다는 내용의 詩와 跋文을 받아내어 󰡔경절공실기󰡕에 실어 1904년 4월에 배포하였다. 이번에 손씨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자신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여러 정황들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손씨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씨들의 항의는 격렬했다. 이씨들은 인근의 14개 門中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의 연원과 관련된 것이기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것이 아니라 士林 전체의 道脈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을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과거에는 이씨와 손씨의 문중 싸움이었던 것이 단숨에 경상도 전역의 문제로 번져나가면서 두 집안은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론은 이씨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본 통문에서 말한 것처럼 󰡔경절공실기󰡕를 배포하지 못하도록 공론으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손씨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배포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이 통문은 말하고 있다.
손씨와 이씨 사이에 벌어진 세 번째 시비는 그렇게 하여 어느 정도 매듭이 지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비의 단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퇴계회재의 행장을 쓰면서 ‘後學’이라는 말을 썼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씨들이 멋대로 써넣은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주장이 다름 아닌 세 사람의 진성이씨, 즉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한다는 시와 발문을 쓴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떻게 이런 말이 생겼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동안 여론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있던 손씨에게는 시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손씨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내용의 패지를 각 院祠와 문중에 돌렸다고 이 통문은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사태는 손씨들의 예상과 어긋나게 나아갔다. 그러한 증거는 바로 이 통문이 보여주고 있다. 퇴계의 문집을 간행하는 주체인 도산서원에서 먼저 나서 손씨들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도산서원에서는 󰡔회재집󰡕을 초간할 때 이미 국내의 여러 선생과 이씨 집안의 여러 어른들로부터 교감을 받았으며, 그 이후 󰡔회재집󰡕에 근거해서 퇴계의 문집을 간행할 때도 ‘後學’이라는 글자에 대해 아무른 이의를 달거나 괴이한 주장을 하는 것이 없었다며, 손씨들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그러면서 도산서원에서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손씨들의 습속을 좌시할 수 없어 영원히 儒籍에서 삭제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경주 손씨와 여주이씨 사이에 벌어진 세 번째의 싸움에서도 여론은 여주 이씨들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8세기 이후 영남의 班村에서 일기 시작한 士族 상호간의 시비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사실상 막혀버린 영남의 南人들이 鄕村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데서 생겨난 것이다. 이 통문은 그러한 싸움이 단순히 향촌 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道內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다투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통문은 당시의 상황들이 어떻게 전개되고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 이수건, 일조각, 1995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 『민족문화논총』 4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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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通諭事嗚呼世級逾下運泊陽九百世之公議浸泯一時之私論橫流種種有斯文之怪變至於孫氏之譸張怪悖而極矣倡說實紀之重刊
變幻公案之已決者已爲道內僉斯文覷破良遂則固不必覶縷辯析而所謂重刊實紀之潛布道內也又有鄙院之破板通告然或因爲孫氏情面
而受之或因爲作家顔私而强受▣▣▣▣之公心公見乎且其後孫氏之變亂誣逼愈出愈駭至以狀文下後學字勒歸杜撰而便有 先正
集毁板之所謂牌旨斯文之變於斯極矣後學字之昭載於 老先生文集而自初刊至於屢經重刊今幾至三百餘年無一辭置疑者抑
何也當初校訂之國內諸先生監校之本家諸人老於玉山初刊無此二字未有不見不知之理而親炙爐鞴 服信 師旨遵而無改其後一依陶
山本追補於玉山重刊時亦未聞有異見怪論者矣今忽於孫李氏之是非倡出無前之說敢肆駭悖之擧意以謂當此陽九之時公議可泯
私論可施耶以何力量有何依賴而 先正集毁破之牌無嚴寫出爲斯文後日之慮此習不可長 僉須諒悉孫氏諸家永削儒籍將此
辭意通告道內使潛受者强受者知所以私不可掩公之義以正士趨以衛斯文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丙午六月二十八日陶山書院上有司郡守李康準
齋有司幼學 李健鎬
製通前參奉 李中植
幼學 李中岳
郡守 李中喆
寫通前正字 李中燦
幼學 李秉鎬
李中洙
會員 幼學 李晩昌
李晩璞
金輝璟
通政 李晩鉉
牧使 李晩胤

幼學 李中稷
李晩範
琴鼎基
李中七
李昺淵
李彙容
琴鎬基
李晩鳳
李廷鎬
李中約
李中鉉
李中恿
柳道民
李中錫

金達源
李中鐸
吳䢖永
李晩璟
進士 李鉉燮
幼學 李中寅
李中韶
許禎
李中奕
金性敎
金濟栓
李中瑨
參奉 李仁和
幼學 金禹奎

李中聃
李中柄
李斗鎬
李炳七
李晩祿
參奉 李晩旭
李忠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