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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이효순(李孝淳)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10+KSM-XF.1869.4717-20180630.0794257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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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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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효순, 이만임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69
형태사항 크기: 26.3 X 43.7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온혜 진성이씨 노송정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869년 이효순(李孝淳) 서간(書簡)
1869년 1월 13일에 이효순이 청계서원의 복설을 청하는 유생을 보내어 주선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온혜 문중에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새해인사를 전하고, 자신은 설사로 기력을 모두 소진하여 오늘 회의에서 생각을 말하지 못해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서원의 일은 통한스러운 일이지만 부득이한 일이며, 복설은 시일을 기다린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한두 명의 유생을 보내 남들과 주선하게 하는 것이 시의에 부합할 것 같다고 하면서, 이런 뜻을 잘 헤아려 처리하라고 당부하였다.
1차 작성자 : 서진영

상세정보

1869년 1월 13일, 李孝淳이 淸溪書院의 복설을 청하는 유생을 보내 時宜에 따라 주선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李晩恁에게 보낸 편지
1869년 1월 13일, 李孝淳온혜 문중에 淸溪書院의 훼철을 부득이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 복설을 청하는 유생을 한두 명 보내어 時宜에 따라 주선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고종 무진년(1868)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다음해 1월, 문중의 대처 방도에 대하여 상의하는 내용이다.
먼저 새해 정초에 여러분들의 건강이 만중하다니 위로가 된다고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우연히 걸린 설사로 하룻밤에 중년 시절의 기력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며, 오늘 회의에서 또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니 더욱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서원의 일은 올해도 한 달이 지났으나 어찌 하루라도 통곡하며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그러나 끝내 좋은 계책이 없다면 부득이한 일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위패를 임시로 봉안할 때 의논을 정하였는데, 그 때의 쟁점은 다만 擇日 문제였을 뿐이었다고 하고, 누추한 곳에다 오래 위패를 머물러두는 데 대하여 미안함이 더욱 심하다고 하였다. 이제 춘절 향사가 임박하였으나 香을 올릴 길이 없고, 이대로 시일을 끌다가 요행히 복설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의 미안함과 부득이하였던 일은 마찬가지일 따름인데, 더구나 復設은 시일을 기다린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하였다. 현재 부득이함을 논하는 자나 신중히 할 것을 논하는 자가 똑같이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지만, 자신의 입장 또한 부득이하다는 쪽이라 밝히고, 신중히 하여 시일을 끌다가 더욱 미안하게 될까 두렵다며 대저 이 일은 부득이하다는 세 글자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서원을 훼철하고 임시로 봉안하자는 것도 이미 부득이하다는 것에게 쫓기어 그랬던 것이니, 지금 또한 부득이하다는 마음으로 부득이한 일을 거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또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소를 올리자는 의론이 나온 데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반드시 사람들의 의사를 충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며, 똑같은 조상을 두고 다른 사람은 조상을 위하여 상소하자고 하는데 나는 時宜를 참작하여 나중을 기다리자고 한다면, 조상을 위하는 일을 꺼린다고 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으로는 한두 명의 유생을 보내어 남들과 함께 주선하게 하는 것이 시의에도 함께 부합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뜻을 여러분들이 잘 헤아려 처리하라고 한 후, 몸은 물러나 있으면서 말만 앞세우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발신인 李孝淳(1789~1878)은 본관은 眞城, 자는 源伯, 호는 洛北이다. 아버지는 龜鼎이다. 1822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홍문 교리를 지냈다. 영해 부사에 취임하여 청렴한 치적을 남기고, 이후에 형조 판서를 지냈다.
수신인 李晩恁(1798~1891)은 본관은 眞城, 자는 德彦, 호는 蠹齋이다. 아버지는 鉉禹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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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69년 이효순(李孝淳) 서간(書簡)

伏惟新元。
僉體度萬重。慰仰慰仰。族從。偶
病冷泄。一晝夜所損。爭似中
年氣力。今日會席。又無以進聽
緖論之餘。殊以倀〖悵〗歎。院事于今
歲朔。何日非痛哭深思。痛哭深
思者。通國皆是。而未聞有善策
以處之者。終亦無有乎善策。已旣無
善策。則終亦有不得已之擧而已。當
初權奉之時。此擧已是定論。而所爭。
只擇日與否耳。因循至于今日。則陋
地久淹。未安尤甚。春享此迫。薦香
無路。設令依樣拖過。幸而至此
若復設。其間未安。與不得已之擧。等耳。況復設。非
時月議到者乎。見今爲不得已之論者。爲鄭重之論
者。勻之爲先。而鄙意亦以不得已之論
爲歸者。恐鄭重因循。而益致未安也。
大抵。此事不得已
三字外。無他道理。
撤院權奉。已是
迫於不得已者。則
今亦以不得已之
心。行不得已之擧而已。
惟僉裁之如何。至
於疏論。發於一方年
少。未必盡厭人意。
而等是爲祖先。人以
爲祖先而發。我以
參時義。日後爲。則
恐亦有嫌於爲先也。
鄙意亦以爲起送
一二儒生。以與人周旋。似兩合
時宜。亦惟僉裁之。切仰。
身處言出。極知僭矣。更望
僉恕之。如何如何。餘。不備禮。
己巳 改月 十三日。族從 孝淳 拜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