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彙載가 李晩恁에게 젊은이들의 淸溪書院 복설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려는 움직임에 대한 견해를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李彙載가 李晩恁에게 젊은이들의 淸溪書院의 복설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작게는 위험에 빠지며 크게는 분의를 어기는 일이라 하고 장로들이 신중히 하는 뜻으로 우선 정지하게 하자는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밤사이 건강은 어떤지 묻고 어제 모임은 어수선하여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하였는데 서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그러할 것이라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다만 가벼이 다룰 수 없는 것이 상소 논의인데, 大院君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當宁에 하소연하는 것은 극히 엄중한 일로 신중히 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 논의가 젊은이들에게서 나온 것은 그 마음이 착한 것이었으므로 당초 대번에 뜻을 누르지 못하였지만, 장로들이 신중을 지키면서 조용히 이해시켜 과도한 행동을 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이 일은 작게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며 크게는 분의를 어기는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磻南의 견해도 이것을 염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더욱 본읍의 유생들이 만약 회합에 참석한다면 반드시 떠밀어 앞장을 세울 것이라 하고, 어제 생각 없는 한두 유생들의 주장은 과연 합치할 수 없을 듯한데도 오히려 가려는 자가 있으니, 이는 좌하께서 단연 의리로 재제하고 힘써 조정해야 할 것이라 하고, 蘇湖里와 河回, 내앞[川前], 무실[水谷] 등지의 사람들이 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어찌 견해가 없어서 그렇겠느냐고 하였다.
추신에서, 어떤 사람은 上書하자고 말하지만 궐문이 지척간인 곳에서 유생이 떼지어 마치 대궐로 들어갈 것처럼 한다면 이는 上疏보다 더 미안한 일이라 하고, 우선 멈추고 좋은 시기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이 편지의 발신 시기는 1869년 1월 13일에 李孝淳이 편지를 보낸 직후인 것으로 보인다.
내용에서 언급한 磻南은 李同淳(1779~1860)의 당호인 ‘樊南’을 가차한 것인데, 번남은 이 때 타계하였으므로 그 아랫대를 지칭한 말인 듯하다.
발신인 李彙載(1795~1875)는 본관은 眞城, 자는 德輿, 호는 雲山이다. 아버지는 林淳이다. 1827년 증광시 생원에 장원으로 입격, 선릉 참봉과 장악원 주부를 거쳐, 안성군수, 청풍 부사를 지냈고, 나중에 호조 참의, 한성부 우윤을 역임하였다. 문집 『雲山集』이 전한다.
수신인 李晩恁(1798~1891)은 본관은 眞城, 자는 德彦, 호는 蠹齋이다. 아버지는 鉉禹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