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영양남씨(英陽南氏) 영해부(寧海府) 익동(翼洞) 산송문서
일련문서는 1892년 2월에 영해부(寧海府) 괴시리(槐市里)에 사는 영양남씨(英陽南氏) 문중이 익동(翼洞) 뒤에 있는 선산을 두고 박씨(朴氏) 문중과 벌인 산송(山訟) 관한 것이다. ①1892년 2월 10일 경에 남유순(南有錞) 등 영양남씨 사람들이 연명하여 영해부에 올린 상서(上書)와 ②같은 해 2월 12일에 박한상(朴漢相)이 바친 다짐(侤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익동(翼洞)은 영양남씨가 세거하던 인량리(仁良里)의 병칭으로, 현재 전통마을이 구성되어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이다. 마을 뒤에 있는 선산에는 당시 5대조 할머니인 박씨(朴氏)의 부모[考妣] 무덤이 있었는데, 영양남씨 문중 사람들이 관리해 오고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 박씨 후손 측에서 종숙(從叔)의 무덤을 투장(偸葬)함으로써 발생하였다.
①번 문서에 의하면, 영양남씨 문중에서 처음부터 정소를 한 것은 아니었다. 편지를 보낸다거나 박한상 측 인물들에게 구두로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한상 측에서 이를 거절하여 정소가 진행된 것이다. ①번 문서에는 2월 11일, 12일, 18일에 작성한 총 3건의 제음(題音)이 적혀 있다. 11일에 박한상(朴漢相) 박하장(朴漢章)을 잡아 오라는 처결에 따라 12일에 잡혀온 이들이 무덤을 이장한다는 다짐(侤音)을 바쳤다고 하고 있다. 이때 바친 다짐이 바로 ②번 문서이다. 그러나 이 다짐은 이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18일에 영해부 수령이 박한상 등을 질책하고 면주인(面主人)과 마을의 두민(頭民), 동장과 함께 무덤을 철거하라고 재차 지시하였고, 그 내용을 담은 제음을 ①번 문서 뒤에 적어준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는 한 지역 안에서 사돈으로 맺어진 가문 사이에서 산송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박한상과 박한장의 경우 선조의 무덤 사이에 종숙의 무덤을 매장했으나, 동의 없이 진행한 투장이며 이전부터 영양남씨 측에서 관리하던 무덤이라는 점에서 영해부에서 영양남씨 문중의 정소가 타당하다는 처결을 내렸다. 이행의 방식으로 철거 의무자가 자발적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고음(侤音)을 작성하는 절차도 확인된다.
문서 번호 |
자료명 |
발급 |
수취 |
① |
1892년 남유순(南有錞) 산송관련 상서(上書) |
남유순 등 |
영해부 |
② |
1892년 유학(幼學) 박한상(朴漢相) 산송관련 다짐[侤音] |
박한상 등 |
영양남씨 |
1차 작성자 : 김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