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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화민(化民)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산송관련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B.1873.0000-20160630.02922310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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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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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이현발, 이상화, 영해도호부
작성시기 1873
형태사항 크기: 94.0 X 56.4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인량 재령이씨 우계종택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872년~1873년 재령이씨(載寧李氏) 영해부(寧海府) 부서면(府西面)의 산송문서
이 문서는 1872년~1873년 재령이씨(載寧李氏) 영해부(寧海府) 부서면(府西面)의 산송 관련 자료이다. ①1872년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등 산송(山訟) 관련 상서(上書), ②1873년 신상이(申商彛)의 산송(山訟) 관련 수표(手標), ③1873년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등의 산송(山訟) 관련 상서(上書), ④1873년 이수근(李壽根) 산도(山圖), ⑤1873년 신원연(申源淵)의 다짐(侤音), ⑥1873년 이현발(李鉉發) 이상화(李相樺) 등의 산송(山訟) 관련 상서(上書), ⑦1873년 이수근(李壽根)의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 ⑧1873년 영해부의 전령(傳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72년 11월, 재령이씨 문중의 선산은 부서면 삼동에 있으며, 10여대 300여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수호하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조상의 묘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투장한 이후 무덤을 파낼 수 있도록 관에 ①과 같은 상서를 올렸다. 관에서는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을 안 이후에야 논의할 수 있다고 처분하였다. 이듬해 재령이씨는 선산에 투장(偸葬)된 무덤 주인이 같은 고을의 신서방(申書房)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무덤 주인의 동생인 신상이(申商彛)가 무덤을 파내겠다는 ②의 수표(手標)를 재령이씨 가문에 작성하여 주었다. 그러나 재령이씨는 신상이가 작성해 준 수표는 사적인 것이니 관으로 하여금 확실히 독촉해주기를 바라는 ③의 상서를 올렸고 관에서는 신씨가 투장을 하고 표를 세워 공갈하니 매우 놀라울 따름이며, 수표가 있고 관에 바친 다짐(侤音)이 있기 때문에 즉시 무덤을 파내게 독촉하라는 처분을 내려주었다. 이 처분으로 보건대 현재 문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신씨 집안에서 맞대응 하는 소장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3일 후 관에서는 재령이씨와 신씨를 대동하여 선산에 가서 ④번 문서인 산도를 그렸다.
④번 문서를 살펴보면 신원연이 새로 점유한 지점은 이수근의 증조모의 묘지와는 75보 거리에 앉으나 서나 보이는 곳이고, 또한 이수근의 선산과는 98보 거리에 보이지 않는 곳이면서, 참판공(參判公)의 묘지와는 168보 거리에 있으나 앉으나 서나 보이는 것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지난 해 11월의 상서(上書)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여러 조상의 묘지의 이웃 지맥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관에서는 신씨를 독촉하겠다는 처분을 내린다. 이후 무덤 주인인 신원연이 10월 20일까지 무덤을 파낼 것이며, 만일 기한을 넘긴다면 관에서 무덤을 파낼 것을 다짐하는 ⑤의 문서를 관에 올렸다. 그러나 기한을 넘겨도 신씨는 무덤을 파내지 않았고, 이에 재령이씨에서 신씨가 무덤을 파내지 않으니 관에서 무덤을 파내어 줄 것을 요청하는 ⑥의 상서(上書)를 올리게 된다. 관에서는 장교(將校)로 하여금 무덤을 파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장교는 땅이 얼었다는 이유로 무덤을 파내지 않았고, 이에 재령이씨는 장교가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무덤을 파내지 않는다며 관의 처분을 요청하는 ⑦의 소지를 올린다. 관에서는 해당 장교(將校)에게 핑계가 거짓이라면 신속히 무덤을 파낼 것을 명령하는 ⑧의 전령(傳令)을 내렸다.
조선후기 빈번한 소송 가운데 하나가 산송이다. 이는 산지를 점차 사유화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산지를 사유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따라서 누군가 산지를 이용하기 위해 점유하고자 하면 특정 산지에 조상의 분묘를 세우고 그 주위의 산지를 수호하며 그곳에서 생장하는 송추(松楸)를 금양(禁養)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몇 대를 걸쳐 이루어지면 그 산지는 특정 가문이 점유하여 점차 사유화되었다.
위의 문서를 통해 미루어보면 재령이씨의 산송 또한 300여년에 걸쳐 점유하였던 산지를 신씨가 투장으로 침범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산송을 판결하는 데에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용호(龍虎)였다. 풍수지리설의 유행으로 당시 분묘를 둘러싼 안산(案山), 주산(主山), 청룡(靑龍), 백호(白虎)의 사산(四山)에는 입장(入葬)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특히 청룡과 백호, 줄여 용호(龍虎)를 중시하였다. 이 사건의 경우 신씨가 투장한 위치는 용호(龍虎)나 뇌안(腦案)을 모두 침범한 곳이니 입장(入葬)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 문서를 통해 산송은 여러 차례 소지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이 잘 해결되지 않는 점을 알 수 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투장자는 입장한 무덤을 파 옮기지 않기 위해 장교와 결탁하기도 하며, 수기나 수표와 같은 문서를 통해 시일을 미루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한 겨울이 되면 땅이 얼기 때문에 이굴할 수가 없으므로 투장자로서는 어떻게든 겨울까지 기다리기도 하였다. 위의 문서는 조선시대 산송의 실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1872년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등 산송(山訟) 관련 상서(上書)

이상화 외

영해부 관아

1873년 신상이(申商彛)의 산송(山訟) 관련 수표(手標)

신상이

이생원댁 문중

1873년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등의 산송(山訟) 관련 상서(上書)

이상화 외

영해부 관아

1873년 이수근(李壽根) 산도(山圖)

영해부 관아

 

1873년 신원연(申源淵)의 다짐(侤音)

신원연

재령이씨 문중

1873년 이현발(李鉉發), 이상화(李相樺) 등의 산송(山訟) 관련 상서(上書)

이현발 외

영해부 관아

1873년 이수근(李壽根)의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

이수근 외

영해부 관아

1873년 영해부의 전령(傳令)

영해부 관아

장교

1차 작성자 : 조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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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정보

1873년 화민(化民)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산송관련 상서(上書)
1873년(고종 10) 8월에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및 재령이씨 문중사람들이 연명하여 영해부(寧海府)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상서(上書)이다. 지난해 투장한 무덤의 주인을 찾아서 수표(手標)를 받고, 이를 함께 바치며 군교(軍校)를 보내서 무덤을 파내게 독촉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873년(고종 10) 8월에 李相樺 李鉉發 및 재령이씨 문중사람들이 연명하여 寧海府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上書
1873년(고종 10) 8월에 李相樺 李鉉發 및 재령이씨 문중사람들이 연명하여 寧海府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上書이다. 분쟁의 대상이 된 지역은 寧海의 府西面 三洞에 있는 선산이다. 李相樺 등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지난 번에 三洞의 산지에 관한 일로 이미 지난 겨울에 呈訴하여 무덤주인을 찾아낸 후에 무덤을 파 옮기는 것을 논의한다는 처분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직접 찾아 무덤 주인을 찾았는데, 즉 같은 고을에 사는 申書房이라는 자였다. 그의 伯兄이 寧海英陽 사이의 깊은 산속에 살고 있으므로, 일전에 그 집에 가서 對卞해 보려고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더니 갑자기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같이 사는 女壻로부터 무덤 주인의 동생이 元邱里에 산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가서 데려왔다. 여기서 무덤 주인의 동생은 관련문서에 의하면 申商彛이다.
무덤 주인의 동생은 말하길, 법정에 갈 필요 없이 자기가 담당하여 무덤을 즉시 파내겠다는 手標를 바쳤다. 하지만 재령이씨 문중사람들은 사적으로 마무리할 수는 없다면서 관아에 呈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난번 訴狀과 手標를 동봉하여 바치면서, 軍校를 따로 정하여 함께 독촉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관아에서는 19일에 처결을 내렸는데, ‘몰래 偸埋하고서는 적반하장 하는 계획을 꾸미고 표를 세워[立標] 공갈하다니 정말 놀랍다.’라는 구절이 있다. 상대방이 標를 세웠다거나 협박했다는 사실은 본 상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추측 건데 같은 시기에 소송의 상대방인 申書房이 재령이씨 문중에 맞대응하는 訴狀을 올렸거나, 재령이씨 문중에서 소장을 올리면서 따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처결에서는 이어서 申氏를 잡아 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같은 날에 이어서 내린 처결이 있는데, ‘이미 즉시 무덤을 파내겠다는 手標가 있고, 또 관아에 侤音을 바쳤다. 그런즉 즉시 무덤을 파내게 독촉해야 한다. 만약 미룬다면 잡아올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3년 화민(化民) 이상화(李相樺) 이현발(李鉉發) 산송관련 상서(上書)

化民李相樺李鉉發等。仰達于
城主閤下。伏以。三洞山事。業已呈訴於前冬。則有求得塚主然後。可議掘移之題。故民等躬搜極覓。始爲査得。則乃是同鄕內申書房云者也。其伯兄寓居於間深峽。故日前民等往其渠家。欲
爲對卞。則右人此頉彼頉。忽地逃走。無路求得。故與其渠之同居女壻而來。則其言內謂我是外人。塚主之弟在於元邱云。故民等躬往與來。以法從事。則渠云不必入於法庭。以擔當掘去之意。期於不日。成標記
以納是乎羅。竊念。前已呼訴於
閤下。則旣有題音。而不可私相求竟。故玆以帖聯前狀及渠之標記更呈爲去乎。伏願。率待右人。題下掘移。而別定軍校。眼同督飭。千萬祈懇之至爲只爲。
行下向敎事。
城主處分。
癸酉八月日。李相侃李相辟李心燦李學榮李壽根李壽岳李德榮李壽華李壽昌李壽栢李壽憲李鉉植李鉉夏李性浩李鉉成等。

使「押」。

暗地偸埋。反生荷杖之計。
立標恐喝。誠一變怪。嚴
治督掘次。所謂民。卽
爲捉待向事。
十九日。
旣有卽日掘去之標記。又
有官庭納侤。則卽日督掘
是矣。若又延拖。捉待向事。
同日。追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