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8년(憲宗 4) 3월, 하회 풍산 류씨 문중이 醴泉郡守에게 柳台佐가 묻힌 墳山의 권역을 보장하는 完文의 발급을 요청하는 所志
내용 및 특징
1838년(憲宗 4) 3월, 하회 풍산 류씨 문중이 醴泉郡守에게 柳台佐가 묻힌 墳山의 권역을 보장하는 完文의 발급을 요청하는 所志이다.
생전에 大谷山 墳山 권역 확보에 매진하였던 柳台佐(1763~1837)는 안동 하회 풍산 류씨 서애 찰방공파로서, 柳師春의 아들이다.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다. 정조의 명으로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으로 이(나 台)좌로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여군수, 안변부사, 김해부사, 한성부우윤, 우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후진을 교육하였고, 蔡祭恭 신원상소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柳台佐가 죽은 일자는 1837년 11월 26일이고, 다음에 2월 7일에 이르러서 山所에 入葬하였다. 그의 山所는 醴泉郡 古縣面 倉里 앞에 있는 古峴山(白峴) 九月峰에 마련하였다. 入葬한 후, 류씨 문중은 같은 해 3월에 이 산의 권역을 확보하기 위해 完文을 요청하는 所志를 醴泉郡守에게 올린 것이다. 所志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중의 參判令監의 襄禮는 올해 2월에 醴泉郡 古縣面 倉里의 앞 산록에서 지냈습니다. 그때 營邑의 은택을 입어, 부족함 없이 묘를 꾸밀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주변을 禁養하는 일은 저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飛鳳山 산록은 남쪽으로 수 里를 웅거하는 형세로서 古縣里의 主山입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떨어지는 한 자락은 북쪽으로 비로 내려와 白峴을 이루어, 古縣里의 동쪽 상록이 됩니다. 白峴에서 남쪽으로 내달리면, 東里의 뒷 산록에 이릅니다. 이곳들을 구분지어 품은 곳이 곧 우리 문중에서 山所를 들인 곳입니다.
主龍은 길이가 6~7帿 정도에 불과하고, 墓穴은 너비가 8~90보에 불과합니다. 산세는 전체적으로 민둥산인지가 오래되었고, 간혹 무너질 것 같은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농문들이 태반은 개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편한바 대로 소나무를 심을 계획입니다.
산소와 가까운 곳에 산 아래 주민이 땅을 나눠 차지하고 보호하는 곳이 있습니다. 첫째는 金哥의 봉분입니다. 이는 우리 문중 산소의 內砂角에 위치합니다. 본래 이 산록은 周哥의 墳山이었는데, 金哥는 대대로 周哥의 산지기였습니다. 그런데 周哥가 멸명하자, 金哥가 犯葬하고 차지한 것입니다. 둘째는 梁哥의 봉분입니다. 이는 우리 문중 산소의 單臚豆에 위치합니다. 이 金哥와 梁哥를 우리 문중 산지기로 일하게 하려 합니다.
그리고 內靑龍으로 빗겨나간 곳에 比安에 사는 鄭氏 양반의 분묘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본래 경계를 정하여 禁養한 일이 없이 金哥가 점유한 곳 안에 섞여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 풀이나 나무가 하나도 배양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문중에서 산소를 들인 이후로는 경계를 논하지 않고, 피차가 함께 禁養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四山으로 금할 곳을 경계 지점을 세워 엄히 수호하는 것은 법전에 근거할 수 있습니다. 白虎는 先德里의 前麓까지, 靑龍은 東里의 後麓 가장 아래까지, 主龍은 白峴의 大路까지입니다. 경계를 정할 때에 將校를 보내주셔서 함께 거행하게 해주십시오.
산소를 禁養하는 일은 산지기들에게 오로지 위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보호해 주어, 그들이 보호하는 일을 편히 하게 해야 합니다. 산지기 3명을 특별히 차출하니, 환곡와 잡역을 영영 면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항을 完文을 성급해주십시오.】
이와 같은 요청에 대해, 수령은 같은 달 28일에 완문을 성급해주라고 처결하였다.
『朝鮮後期 山訟 硏究』, 전경목, 전북대박사학위논문, 1996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김경숙,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2
김경숙, 『규장각』 2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2
『조선후기 安東 河回의 豊山柳氏 門中 연구』, 김명자, 경북대박사학휘논문, 2009
이욱, 『안동학연구』 7, 2008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