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풍북면오미동에 사는 김창섭이 가족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900년(光武 4)에 安東豊北面五美洞 3통 8호에 사는 金昌燮이 豊山縣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동년에 관에 제출하여 관의 확인을 마친 또 다른 호구단자가 있는데, 그 문서에는 처의 四祖가 등재되어 있으며 관에서 확인한 朱點과 관인이 있다.
김창섭의 당시 나이는 31세이고, 본관은 豊山이며, 幼學의 신분이다. 가족으로는 모 李氏(53세), 처 柳氏(33세)가 있다. 김창섭은 秉均의 아들로 秉鈺의 양자가 되어 풍산김씨 虛白堂 金楊震 문중의 16대 종손이 되었다. 김창섭의 부는 秉鈺, 조부는 洛中, 증조부는 魯欽, 외조부는 李在徵이다.
이 문서에는 統戶番 위에 몇 년도 호적인지를 알 수 있게 干支를 써 넣었으며, 1896 이후 편성된 10家1統制에 따라 김창섭의 거주지에 3통 8호라고 쓰고 있다. 또한 노비와 함께 기와집의 칸수를 표시하였다.
오미리는 풍산현에 속해 있었으나 1895년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괴정리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미리가 되었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게 되었다.
五陵·五美는 오미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김자순 때부터이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五陵洞이라 불렀다. 그 후 김의정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畝 자를 넣어 五畝로 고친 것이다. 그 후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가운데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近代 公文書의 誕生』, 김건우, 소와당, 2008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