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예안현에 사는 김굉이 가족원의 인적사항과 소유노비 현황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780년(正祖 4)에 禮安縣邑內面月峴里에 사는 金紘이 예안현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김굉은 이 문서를 제출한 뒤에 그 해에 죽는데, 이로 인해 손자인 金是瓚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호구단자를 다시 작성해서 올리게 된다. 김굉의 당시 나이는 79세이고, 본관은 光州이며,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의 신분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김굉이 올린 이전의 호구단자들을 통해 1780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주지는 관에서 朱墨으로 길게 줄을 그어 표시하고,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위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다. 호구단자의 거주지 기재는 호주가 호구단자를 제출하면 五家作統에 의해 정해진 각 가호의 통호번을 朱墨이나 黑墨으로 기입해 주는 것이 원칙적인 방법이지만 호주가 호구단자를 작성하면서 직접 기입해 제출하거나 이 문서처럼 통호를 비워두는 경우도 있었다. 통호 기재 방식은 1675년에 반포된 「五家作統事目」에 따른 것으로, 오가작통이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 統으로 묶은 행정자치조직을 말한다.
김굉의 가족으로는 처 淑夫人李氏(73세), 子婦 宜人李氏(47세), 손자 是瓚(27세)과 손부 鄭氏(25세), 손자 是瓘(23세)과 손부 李氏(23세)가 있다. 김굉의 부는 尙晉, 조부는 碩昌, 증조부는 耀亨, 외조부는 金汝鎔이며, 처 이씨의 부는 守泰, 조부는 楶, 증조부는 誠哲, 외조부는 金翰國이다. 숙부인이씨는 김굉이 당상관인 折衝將軍의 품계를 지녔기 때문에 그에 맞는 정3품 外命婦 품계를 받은 것이다. 자부 이씨가 받은 의인은 6품을 지닌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봉작이므로 죽은 김굉의 아들 聖翼이 6품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년에 김시찬이 제출한 호구단자에는 성익에 대해 6품의 품계를 기재하지 않고 成均生員으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사조는 관직과 함께 외조부이면 그 본관까지 밝히고, 처와 자부, 손부에 대해서도 본관을 밝히고 있어 집안의 관직 내력과 혼인 관계를 알 수 있다.
각 가족 구성원은 별행으로 列書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이후 대체적인 호구단자의 특징이다. 노비현황은 몇 글자 낮추어 써서 가족원과는 확연하게 구별하였으며, 노비는 이름과 나이, 부모의 신분과 이름까지 기재하였다. 그러나 솔거노비 3구 이하로 문서가 잘려나가 실제 이 집안에서 소유한 노비규모를 정확한 알 수 없지만, 이로부터 33년 뒤인 1813년에 김시찬이 예안현으로부터 발급받은 立案에는 1810년 당시 소유 노비의 수가 35구로 나타나 있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이 문서는 관에서 확인한 후 호주에게 돌려준 단자라 볼 수 있는데, 이 문서를 확인․대조하였음을 알 수 있는 “准”를 문서 하단 여백에 써서 김굉에게 돌려주었다.
[자료적 가치]
호구단자는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호구파악을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3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호주 및 처의 사조와 솔거자식 및 소유노비 현황을 자세하게 등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들 문서를 통해 각 호구의 가족원과 관직 내력 및 혼맥, 소유노비수와 노비의 내력 및 노비 이동 경로, 그 지역내에서의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김굉은 김부륜의 후손이다. 김부륜에게는 아들 김령이 있고, 김령은 아들 김요형이 있다. 김요형은 넷째 동생인 김휘세의 아들 김석창으로 대를 이었다. 김석창도 아들이 없어서 김휘세의 손자 김상진으로 대를 이었다. 김상진에게는 김굉과 김적 두 아들이 있다. 김굉은 동생의 아들 김성익을 후사로 삼았다. 김성익은 아들 김시찬과 김시권을 낳았고, 딸은 이병운에게 시집갔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崔承熙, 『奎章閣』7,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3
문숙자, 『藏書閣』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文現妵, 韓國學中央硏究院 碩士學位論文,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