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민 교육과 교화의 산실이었던 향교는 고려 인종대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하여 고려 말까지 대개 소수의 대읍에만 설치되었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면서 각 도의 안찰사에게 향교진흥책을 명하고, 부목군현에 1교(校)씩 설치하도록 한 이래로 성종대에 오면 대체로 ‘일읍일교(一邑一校)’, ‘일관일교(一官一校)’의 원칙이 이루어졌다. 향교의 본래 기능은 제례와 교육이었지만, 조선후기로 가면서 교육적 기능은 점차 위축·쇠퇴해져갔다. 그러나 향교는 군현의 유일한 관학(官學)으로서 재지사족들의 관심은 계속되었으며, 따라서 사림세력의 향권 주도와 향촌교화를 위한 결집체로서 향청(鄕廳)·서원(書院)과 함께 중요한 향촌운영기구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조선후기의 향교는 교육적 기능보다는 제례 기능을 통한 교화활동과 양반들의 모임의 장소이자, 공론의 소재지로써 정치·사회적 기능이 더욱 중요시 되었다.
여기에서는 대구·경북지역에 소재한 43개소의 향교 소장 자료를 대상으로 정리하였다. 현전하는 향교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이들 자료는 조선시대 향교와 해당 지역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