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풍양조씨 오작당(悟昨堂)은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思泉]에 위치하며,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 1636~1705)의 종택이다. 조대윤의 후손은 사천을 중심으로 세거했기 때문에 사천파라고도 한다. 종택 건물은 1601년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이 세웠던 것을 증손인 조대윤이 1661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세거 과정과 성장
풍양조씨는 조지린(趙之藺)을 1세로 한다. 15세 조정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외가가 있던 상주에 정착하였다. 그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에게 수학했으며, 약봉 김극일의 사위가 되었다. 조정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광흥창부봉사, 예조좌랑, 대구판관, 봉상시정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지방 재정의 확충과 함께 사회 안정에 주력했으며 도남서원의 설립과 향약의 실시 등을 통해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조정의 가계는 기원(基遠)→릉(稜)→계윤(啓胤)·대윤(大胤)으로 이어지며, 대윤의 가계는→해(瀣)→시경(時經)→석우(錫愚)→목수(沐洙)→술지(述志)→관영(觀榮)→홍구(弘九)→남각(南珏)→흥연(興衍)→성덕(誠德)→정희(正熙)→용권(庸權)로 계승된다.
풍양조씨 오작당은 대대로 학문과 덕행을 숭상했고 홍유석학(鴻儒碩學)을 많이 배출하였다. 유집은 17명이 있고, 문과급제자는 4명이며, 생진시에 합격한 자는 2명이다.
조릉(1607∼1683)은 1654년(효종 5)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덕행이 준수하여 주위에서 장차 향리를 짊어질 중요한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조대윤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환 중에 있을 때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며, 통덕랑에 제수되었다. 조석우의 아우 조석철(趙錫喆, 號: 靜窩, 1724~1799)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에게 수학하였다. 1753년(영조 29)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성균관에 머물렀으나 학규가 문란한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한 채 상주로 돌아왔다. 조석목(趙錫穆, 號: 精舍, 1726~1793)은 1756년(영조 32) 문과 급제 이후 주서, 정언,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조석룡(趙錫龍, 號: 晩樂薺, 1721~1792)은 1756년(영조 32)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홍문관부정자,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승정원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다. 조목수(趙沐洙, 號: 舊堂, 1736∼1807)는 퇴계학통을 이은 대유학자로 명성이 높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자기 수양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처럼 상주의 풍양조씨는 퇴계학을 가학으로 계승하는 가운데 과거 합격자와 사환으로의 진출이 이어졌다. 그들은 향촌 사족들과의 교유와 혼인 및 적극적인 향촌 활동을 통해 명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