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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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정의와 분류

첩정(牒呈)은 조선 초기부터 1895년에 보고서(報告書)라는 문서 양식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사용된 관부(官府) 문서 가운데 한 종류다. 하급기관에서 상급기관으로 올릴 때 사용하였으며, 관(關)이라는 문서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문서(官文書)다.
원래는 국가의 공식적인 관료조직에서 사용하는 문서로만 규정되어 있었으나, 점차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 향촌사회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고을 수령에게 의견을 전달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하급기관이나 수령의 하부조직에서 특정한 일을 보고하거나 청원하려고 할 때 첩정(牒呈)을 작성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급기관에서 보내 온 관(關)에 대한 답변을 보낼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첩정(牒呈)과 유사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서로 문보(文報)와 보장(報狀)이 있다. 문보(文報)의 경우는 면리(面里)조직이나 유향소ㆍ향교ㆍ서원 등의 행정 실무자가 수령에게 전달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보장(報狀)은 ‘보고문서’ 라는 개념으로 각종 사료에서 경우에 따라 첩정(牒呈)을 지칭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김완호, 「조선시대 牒呈 연구」, 한국학대학원 석사논문, 2012.
박병호, 「世宗21年의 牒呈」, 『법사학연구』1, 한국법사학회, 1974.
박준호, 『禮의 패턴:조선시대 문서 행정의 역사』, 소와당, 2009.
심영환, 「朝鮮初期 官文書의 『洪武禮制』 呈狀式 受容 事例」, 『藏書閣』21, 2009.
윤경진, 「14~15세기 고문서 자료에 나타난 지방행정체계-진성(陳省)의 발급과 송부체계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29,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증보판).

문서의 기원

조선시대 첩정(牒呈)의 기원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찾을 수 있다. ‘첩(牒)’이라는 문서는 한대(漢代)부터 확인되며, 당대(唐代)에 9품 이상에서 사용하는 공문(公文)으로 규정되면서 관부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문서였다. 이후 송대(宋代)에는 상행(上行), 평행(平行), 하행(下行)으로 분화되어 쓰였으며, 원대(元代)에는 평행(平行) 또는 하행(下行)으로 쓰인 첩(牒)과 구별하기 위해 ‘첩상(牒上)’ 또는 ‘첩정상(牒呈上)’이라 하였으며, 명대(明代)와 청대(淸代)에 ‘첩정(牒呈)’으로 불렸다.
조선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중국 문서 제도는 명대 간행된 『홍무예제(洪武禮制)』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정(咨呈), 정장(呈狀), 신장(申狀), 첩정(牒呈), 첩상(牒上) 등의 하급기관이 상급기관에 올리는 여러 종류 문서가 실려 있다.
조선은 『홍무예제(洪武禮制)』에 규정되어 있는 여러 상행문서(上行文書) 가운데 첩정(牒呈)만을 채택하여 하급기관에서 상급기관으로 문서를 올릴 때 사용하도록 하여 문서행정 시스템을 간소화하였다. 서식에 대한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첩정식(牒呈式)’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서의 양식<1>

위의 문서(문서1)는 성종 21년(1490)에 봉화현감(奉化縣監) 남(南)이 관찰사(觀察使)에게 올린 첩정(牒呈)이다. 봉화현(奉化縣)에 살고 있는 하원(河源)이 소지(所志)를 올려 자신의 사조(四祖)에 대한 진성(陳省)을 성급해달라고 하자, 봉화현감이 계미년 호적(戶籍)을 토대로 하원의 사조를 확인하고 그 인적사항을 첩정에 기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문서 양식은 위 그림과 같이 ①~⑤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① ‘奉化縣監爲陳省事’는 기두어다. 일반적으로 첩정의 기두어는 ‘발급기관+爲+발급사유[某衙門爲某事]’형식으로 작성되었다. 봉화현감이 진성(陳省) 때문에 첩정을 보냈다는 뜻이며, 이를 통해 문서의 첫머리에서 이 문서를 누가 보내는지와 문서를 작성한 목적에 대해 대략 알 수 있다.
② 본문 내용이다. 본문을 작성할 때는 일반적으로 그 문서를 발급하게 된 계기나 근거가 실려 있는 이전에 작성된 문서 내용을 먼저 인용하여 베껴 쓰고, 그 뒤 발급자의 보고나 청원 사항에 대해 기재하였다.
위 문서에서 근거 문서는 ‘소지(所志)’이며, ‘內’자를 쓴 후 근거 문서의 내용을 기재하기 시작하였다. 근거 문서인 소지(所志) 내용의 끝에는 근거문서명과 이두를 합하여 ‘所志是乎等用良’라고 표시하였는데 ‘이러한 소지의 내용이온바’라는 뜻이다. 그 뒤부터는 첩정(牒呈)을 발급한 봉화현감이 근거문서에 대한 이후 조처 사항을 작성한 후 ‘爲白遣’라는 이두를 기재하여 본문 내용을 끝맺었다.
③ 결사와 수취자를 표시하였다. ‘合行牒呈 伏請照驗施行 須至牒呈者’는 첩정(牒呈)의 결사로 법전의 문서식에 규정된 투식이다. ‘右牒呈 觀察使’는 ‘이 첩정을 관찰사에게 보낸다.’라는 뜻으로 ‘右+牒呈+수취자’의 양식을 갖춘 것이라 보면 된다.
④ 작성시기와 발급자의 착명(着名)ㆍ서압(署押), 방서(傍書), 관인을 날인하였다. 대부분 첩정(牒呈)에서 시기를 작성할 때는 년, 월, 일만 표기한다. 그런데 위 문서에서는 ‘弘治三年六月十日辰時’라고 중국 연호를 먼저 기재하고 지금의 오전 7~9시에 해당하는 ‘辰時’라는 작성시간까지 기재하였다.
착명(着名)과 서압(署押)은 문서의 작성자가 본인이 작성한 것임을 밝힌 부분이다. 작성 시기 밑에 기재된 ‘行縣監 南’은 첩정(牒呈)을 작성한 봉화현감의 관직과 성(姓)이다. 작성자의 이름 바로 아래에 있는 것이 착명(着名)이고, 착명 아래 있는 것이 서압(署押)이다. 착명은 요즘의 싸인(signature)처럼 자신의 이름자를 변형한 것이며, 서압은 ‘일심(一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쓴 것이다.
방서(傍書)는 기두어에서 기재한 문서의 작성 목적과 동일하게 기재하는 것이 보통이다. 위 문서의 경우도 ‘진성(陳省)’이라고 기두어에서 발급 사유를 기재하고 작성 시기 옆에도 동일하게 기재하였다.
관인은 ‘봉화현인(奉化縣印)’으로 작성 시기와 후록(後錄)한 내용의 처음과 끝 모두 3곳에 찍혀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공문서에 관인을 날인할 때는 홀수로 찍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인장을 찍는 이유는 무엇보다 문서의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데에 있었으므로 작성 시기와 후록(後錄)한 내용이 있을 경우 그곳에 문서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도록 반드시 인장을 찍었다.
⑤ ‘後’ 자 이후에 기재한 내용은 하원(河源)의 나이와 본관, 그리고 사조(四祖)에 해당하는 하원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이다. 이는 문서를 받아보는 관찰사가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때 필요한 내용이다. 이처럼 첩정의 본문 이후에 작성된 후록은 첩정(牒呈)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는 아니지만 본문의 내용에 따라 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록의 내용이 많은 경우에는 첩정을 보낼 때 위와 같은 낱장문서가 아닌 성책문서로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다.

문서의 양식<2>

앞서 살펴본 첩정(牒呈)이 고을 책임자인 현감(縣監)이 도내(道內) 책임자인 관찰사(觀察使)에게 올린 사례였다면, 이 문서는 현감의 지시를 받은 약정(約正)이 현감에게 올린 첩정의 사례로 향촌사회에서 작성한 첩정의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문서<1>의 구성요소와 비교하였을 때 ①~④의 구성요소는 일치함을 알 수 있고, ⑤는 후록(後錄)이 아닌 현감의 제사(題辭)다. 제사는 수취자가 발급자의 보고에 대한 대답을 기재한 것으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말하는 글이므로 정서(正書)가 아닌 초서(草書)로 기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서<1>과 문서<2>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첫째, 방서(傍書)가 없다. 문서<1>의 경우, ④ 작성 시기 옆에 기두사에서 기재한 발급 사유를 동일하게 적어두었지만, 위의 문서에서는 작성 시기 옆에 발급 사유를 써두지 않았다. 둘째, 작성 시기가 중국 연호가 아닌 간지(干支)로 기재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였을 때는 작성 시기를 문서의 시작 항(行)인 평항(平行)에 기재하였지만, 간지를 사용하였을 때는 평항보다 아래에 기재하였다. 또한 작성 시기에 찍혀있어야 하는 인장이 위 문서에서는 찍혀있지 않다. 셋째, 발급자의 착명만 있고, 서압은 기재하지 않았다. 수령 하부기관에서 수령에게 올리는 문서의 경우 공통적으로 착명만 나타난다.
첩정(牒呈)은 수령이 자신의 상부관원이나 조직에게 올리는 문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위의 경우처럼 수령의 하위관원들이 수령에게 보고를 할 때에 첩정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두 가지 경우 문서의 전체 구성 요소는 큰 차이가 없지만, 발급자의 신분이 수령인지 아니면 수령 이하의 관원인지에 따라 구체적인 구성 요소별로는 조금씩 다르게 문서가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