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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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정의와 분류

소지(所志)는 백성들이 관청(官廳)에 작성하여 올리는 소송(訴訟)ㆍ청원(請願)ㆍ진정(陳情) 등의 성격을 띤 문서를 말한다. 즉 소송을 제기하거나, 자신의 권리나 재산에 대해 그 소유권을 인정해 달라고 청구하는 문서들을 통틀어 소지라고 한다. 그 용어와 문서 형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전하는 최초의 자료는 고려시대 지정14년 노비문서(至正十四年 奴婢文書, 보물 제483호)이다. 이 문서는 고려 공민왕3년(1354)에 윤광전(尹光琠)이 그의 큰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 1구를 물려주고 이를 공증 받은 내용으로, 소지(所志) 4장과 입안(立案) 2장으로 되어 있다. 그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의 소지와 유사하므로, 소지라는 용어와 문서식이 다른 변화 없이 조선시대까지 이어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소지를 작성하는 문서의 형태가 크게 변한다. 이후 소송문서는 괘선이 있는 규격화된 인찰지(印札紙)에 작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형식면에서도 이전의 문서형식을 따르면서도 다른 면모를 보이고, 그 용어에 있어서도 ‘원고인(原告人)’, ‘피고인(被告人)’, ‘소장(訴狀)’, ‘소답(訴答)’이라고 그 양식을 규정하였다.
민원을 제기하여 소지를 작성하는 작성자의 범위는 사서인(士庶人)부터 천민인 노비, 그리고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소지의 명칭은 이 작성자의 신분과 판결관에 따라서 달라진다. 조선시대 소지에 대해 구체적인 법식을 제정한 법률서는 없다. 소지에 대한 구분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1785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는 편자 미상의 『유서필지(儒胥必知)』이다. 이 책의 범례에서 작성자와 수취자에 따라 소지를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단자(單子)’, ‘발괄(白活)’, ‘의송(議送)’으로 나누어 그 구분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소지류에 포함할 수 있는 문서는 이와 함께 ‘상서(上書)’, ‘원정(原情)’, ‘등장(等狀)’, ‘소지(所志)’를 합하면, 전체적으로 그 문서명과 범위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소지에 작성한 관청의 처결문은 수령일 때는 제음;뎨김(題音)이라 하고 관찰사일 때는 제사(題辭)라고 부른다. 소송자는 개인이든 단체든 이 제음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소송자는 소지를 잘 보관하였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소지는 현존하는 고문서 가운데 매매문서 다음으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소송과 관련된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 같은 사안에 대한 여러 장의 소지나, 그와 관련된 입안(立案)을 본다면 해당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완호수호를 주장하는 소지를 통해 문벌층이 특권을 가지기 위해 주위를 결합시키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소지는 여타의 관찬사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갈등과 요구사항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일차적 사료로서 그 중요성을 가진 문서이다.
문서의 명칭은 특정 부분을 보면 대체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간간이 한 문서 안에 두 개 또는 세 개의 문서명이 사용된 것도 있어, 이에 대해 명칭을 엄밀하게 정하는 것에는 어려움도 뒤따른다. 그 서식에 있어서도 한문만을 사용한 것이 있고, 이두를 섞어 사용한 것이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도 조금씩 달리하므로, 하나의 체제로 쉽게 정리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나마 『유서필지』에 상언류(上言類) 서식 12종을 비롯하여 원정류(原情類) 4종, 소지류(所志類) 24종이 실려 있어 참고할 만하다. 아울러 참고할 만한 법전서와 관련 자료를 통해 소지에 대한 양식과 서식을 심도 있게 연구함은 하나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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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작성 절차

소지의 구분은 행정절차적인 측면에서 크게 소송(訴訟)관련 소지와 청원(請願)관련 소지의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시대 소송과 청원의 절차를 먼저 살펴보겠다.
첫째, 소송관련 소지는 분쟁이나 갈등에서 빚어진 사건에 대해 권리나 의무 따위의 법률적 관계를 확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문서를 말한다. 백성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구든지 관청에 호소할 수 있었고, 수령은 이를 해결해 주어야 했다. 조선시대 소송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① 먼저 소송자인 원고(原告)가 관청에 소지를 제출하는 ‘고장(告狀)’을 한다. 이렇게 소송을 제기하는 행위를 ‘기송(起訟)’이라 하며, 이 때 소지는 ‘피척(被隻)’인 피고가 소재한 관청에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② 그러면 관청에서는 이를 접수하고, ‘피척을 데려오라’는 내용의 제음을 작성해 준다. 피고는 원고가 직접 데리고 와야 했다. 간혹 피고가 이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경우에 원고는 피고를 잡아오게 해 달라고 다시 소지를 올린다. 피고가 죄질이 나쁘면 관청에서 직접 장교나 포졸을 보내 잡아오게도 하였다.
③ 원고가 피고를 데리고 오면 관청에서 함께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내용의 시송다짐(始訟侤音)을 한다.
④ 그런 후에 원고와 피고의 본격적인 재판을 시작하였다. 재판의 심리는 종문권시행(從文券施行)이라 하여 관련된 문서가 있으면 그에 따라 시행하였다. 수령은 문서의 진위성을 판별하였고, 이 후 그 사실에 따라 판결을 하였다.
⑤ 마지막으로 원고와 피고가 남김없이 변론하여 소송을 종결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이들이 연명(連名)문서로 판결해 줄 것을 청구하였다. 이를 ‘결송다짐’이라 한다.
⑥ 그러면 수령은 비로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기본적인 사상은 양시양비(兩是兩非)론에 입각하기 때문에 원고와 피고의 화해가 최고의 덕목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령이 작성해 주는 문서를 ‘결송입안(決訟立案)’이라 하며, 처음 소송을 일으킨 때부터 판결에 관한 사항까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적어놓는다.
소송에서 진 경우를 ‘낙송(落訟)’이라 하고 판결에 굴복하는 것을 ‘이굴(理屈)’이라 한다. 경우에 따라 소송에 진 사람은 기한 내에 처분을 이행하겠다는 다짐장을 작성하거나, 이것에 불복할 경우는 다시 상급관원인 감영에 절차에 따라 소장을 작성해 올린다. 이를 ‘의송’이라 하는데, 원래 의송이란 말은 관찰사가 수령에게 내리는 제사라는 뜻이었으나, 16세기 이후 관찰사에게 올리는 소장이란 뜻으로 변하였다. 소지를 작성할 때 수령을 거치지 않고 관찰사에게 바로 의송을 올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둘째, 청원관련 소지는 소송과 다르게 자신의 이권이나 권리에 대해 그 보장을 청구하는 것들을 말한다. 특히 입안 신청과 관련한 문서는 선현(先賢)의 포양(襃揚)요청과 이에 대한 제수품(祭需品) 지원을 요구, 서원과 사우에 대한 보호와 수세(收稅) 경감 등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획득한 전답이나 노비 등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보장받도록 관청에 청구하는 것이다. 입안(立案)이란 어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관청에서 절차에 따라 발급하는 공문서(公文書)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절대적인 근거가 되는 문서를 말한다. 조선전기에는 노비와 토지에 대한 입안만 발급하였으나, 후기에는 사유 개념이 확대되면서 모든 소유물에 대해 입안을 발급하였다.
입안신청 소지는 그 내용에 따라 제출 기관이 다르다. 지방은 해당 관아에 제출하였고, 서울은 토지와 가옥, 소송에 관한 것은 한성부(漢城府), 노비는 장예원(掌隷院), 계후(繼後)와 봉사(奉祀) 등은 예조(禮曺)에 제출하였다. 지방이라도 사우나 서원의 완호를 요구하는 것과 후손을 입양하는 계후와 관련된 내용은 최종적으로 임금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봉사나 계후와 관련된 절차는 해당 소송자가 관청에 소지를 올리면, 관청에서는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연말에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예조에 지금의 결재에 해당하는 계하(啓下)를 하면, 예조에서는 사실 확인을 한 후에 임금에게 다시 아뢰어 계후에 대한 최종 계하를 받았다. 그리고 이를 관찰사에게 통지하였고, 그 절차는 다시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봉사와 관련된 문제는 수령이 항상 신중히 처리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아에 제출하여 재산의 소유권에 대한 증빙을 요구하는 입안신청 소지가 있다. 이는 앞의 소지와는 다르게 내용이 상당히 간소하다. 그 절차는 우선 매수자가 먼저 양도나 매매를 증명하는 문서인 명문(明文)에다 입안신청 소지를 작성하고 이를 붙여 관청에 올린다. 관청에서는 이와 관련된 양도자와 증인 2명, 문서를 적은 집필자 1인을 불러 그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를 초사(招辭)라 한다. 만약 사대부가의 여성일 경우에는 공함(公緘)이란 문서를 보내 서면으로 답장을 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초사는 양도자 초사 1장과 증인과 집필자 초사 1장으로 총 2장이다. 그러면 이를 토대로 관청에서는 최종적으로 이들의 사실관계를 따져 입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초사와 입안을 점련(粘連, 풀칠하여 붙임)하고, 점련한 곳에 관청의 관인(官印)을 찍어 신청자에게 돌려주었는데, 이런 문서를 ‘사급입안(斜給立案)’이라 부른다.

문서의 양식<1>

소지의 종이 규격은 일정하지 않다. 주로 세로로 긴 문서가 대중을 이루고, 정사각형 형태로 된 것이 있으며, 가로가 좀 더 긴 것도 있다. 소지의 대략적인 모양은 작성자가 소자(小字)의 정자로 적은 본문과 수령이 대자(大字)로 써 준 착관과 제음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첫줄에 작성자의 이름과 둘째 줄에 소지를 지칭하는 용어가 있으며, 본문 마지막에 ‘성주처분(城主處分)’ 등의 문구를 보고 소지류의 문서라고 우선 감별할 수 있다. 실제 문서를 통해 소지의 기본적인 양식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위 문서는 진주 단목(丹牧)의 진양하씨(晉陽河氏) 단지(丹池) 종택의 문서로서, 『고문서집성』57권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1720년 11월에 하윤관(河潤寬), 하윤수(河潤洙) 등이 장석한(張錫漢)이 자신의 조상을 대북(大北)의 여얼(餘孼)이라고 무고한 것에 대해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소지의 양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시면(始面) :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의 거주지와 이름. 간혹 문서명을 아래에 씀
② 기두어(起頭語) : 문장을 시작하는 첫 구절. “우근진소지의단(右謹陳所志矣段)~”을 적음
③ 본문 : 본론의 내용을 적음
④ 결사(結辭) : 소송자가 바라는 처분의 내용을 적음
⑤ 판관의 존함 : 판관의 존함과 처분이란 글자를 적음
⑥ 작성일 : 소지를 작성한 날짜
⑦ 착관(着官) : 판관이 관명을 휘필(揮筆)함
⑧ 서압(署押) : 판관의 싸인. 대체로 “일심(一心)”을 변형하여 사용
⑨ 제음(題音) : 판결문. 주로 초서로 적음
⑩ 판결일 : 접수를 받고 판결한 날짜. 제음 마지막 부분에 적음
⑪ 관인(官印) : 해당 지역의 관아 인장. 주묵(朱墨)에 홀수로 찍음

『유서필지』에는 서식의 용어로 ‘시면(始面)’, ‘기두어(起頭語)’, ‘결사(結辭)’를 사용하였다. 즉 위 문서의 ①번이 시면이며, 시면에는 소송자의 주거지와 이름을 기입하는 곳이다. 소송자의 관할 관아일 경우에는 자신이 거처하는 지역명을 생략한다. 이름 아래에는 상전을 대신하여 노(奴)가 올릴 경우에 자신의 손마디를 표시한 수촌(手寸)을 그린다. 단자나 상서일 경우에는 그 아래 문서명을 기입하기도 한다. ②번은 기두어로서 “우근언 소지의단(右謹言所志矣段), 위의 삼가 말씀드리는 소지의 내용은~”이나 “우근진 지원정유사단(右謹陳至冤情由事段), 위의 삼가 진술하는 지극히 원통한 사정은~” 등의 투식적인 문구를 사용한다. 그리고 단자를 올릴 경우에는 “공감 복이(恐鑑伏以), 송구스러우나, 엎드려 아뢰건대~”를 썼다. ③번은 본문으로 본론을 작성하였는데, 주로 그 문장의 구성은 과거의 상황, 뜻밖에 상대가 저지른 만행, 자신이 입은 원통한 사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④번은 결사이니, 본론에 서술한 원통한 사정 때문에 정소하므로, 피고를 어떻게 처리해달라는 청원을 작성하는 부분이다. ⑤번은 판관의 존함을 쓴 부분이다. 수령일 때, 노비가 쓰면 안전주(案前主), 사도주(使道主), 평민이 쓰면 관주(官主), 관사주(官司主), 양반이 쓰면 성주(城主), 관료가 쓰면 모모현감, 모모현령이라 썼다. 그리고 의송일 때는 순상합하(巡相閤下), 순사도(巡使道)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⑥번은 소송자가 소지를 작성한 날짜이다. 그 아래 문서명을 기입한 것도 있다. ⑦번은 판관의 착관이다. 판관의 직책에 따라 관(官), [지역명]관(官), 사(使), 관찰사(觀察使), 암행어사(暗行御史) 등의 글자를 초서로 휘필한다. ⑧번은 판관의 싸인인 서압이다. 조선 말기에는 인장으로 대체되었다. ⑨번은 제음으로 판관의 판결문이다. 주로 초서로 왼쪽 하단에 써주며, 글자 수가 많을 때는 뒷면에다 쓴다. ⑩번은 접수를 받고 판결문을 작성해 준 날짜이다. ⑪번은 관인으로 해당 지역 관아의 인장을 사용하여 붉은색 인주로 찍었다. 인장은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찍었고, 제음 위에 찍는데 주로 날짜 위에 하나를 찍는다. 제음의 내용이 길 때는 그 위에다가 수를 늘려 꼭 홀수로 찍는다.

문서의 양식<2>

소지에서 제음의 날짜 부분에 쓰는 인명과 직임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가 단지 명사로 된 단어만 적혀 있어 그 해석에 있어 어려운 점이 뒤따른다. 이는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아래 사진의 ①번 경우처럼, 제음을 작성할 때 판관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를 쓸 경우이다. 수령 등이 다른 임무로 인해 본지를 벗어나 타 지역에 있을 경우가 있다. 이 때 소송자가 찾아와 그 처분을 요구하면, 제음을 작성해 주고 판관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를 아울러 표기하였다. ①번은 7일에 처결을 해 주고, 그 아래에 “재경(在京)”이라 적어주었으니, 그 당시 판관이 서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재[지명](在[지명])” 형태로 표기를 한다. 둘째는 ②번의 경우처럼, 고과(告課) 형리를 표시하는 경우이다. 수령이 소송에 대한 업무가 과다하게 늘어나면, 비슷한 처리를 요구하는 사안일 경우 좌수(座首)나 형리(刑吏)가 대신 처결하는 대리심(代理審)을 하게 하였다. 이 때는 “고[성명](告[성명])”의 형태로 작성한다. 셋째는 ③번처럼, 행정업무를 지시하는 대상자를 적어 줄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주로 “동임”, “도색”, “형리”, “장교” 등의 직임을 적는다. 동임이나 형리는 제음에 지시한 대로 그 업무를 실행하였다. 특히 감영에서 처결하는 의송일 때는 “본관”, “척재관” 등의 용어를 써서 소송자의 소재지에 있는 본관에게 되돌려 주었으니, 소송 사안에 대해 참고하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또 “장자(狀者)”, “장민(狀民)”이라 적혀 있을 경우에는 그 문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되돌려 줄 때 사용하는 경우이다.

상언

‘상언’은 정려(㫌閭), 증직(贈職), 가증(加贈), 복작(復爵), 입후(立后), 산송(山訟), 설원(雪冤) 등의 내용으로 올리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백성들이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릴 수 있는 문서이다. ‘상언’을 작성하는 문장은 한문만을 사용하여 작성하는 것과 문장의 조사격인 이두(吏讀)를 섞어 사용하는 것이 있다. 사대부들이 올린 것은 주로 한문만을 사용하였다. 또 여성이 올릴 경우에는 한글로 된 언문을 사용하였다. 상언의 절차는 친제(親製, 직접 작성), 친정(親呈, 직접 올림), 기한내현신(期限內現身, 기한내 출도)이 3대 원칙이다. 즉 자신이 직접 작성하여 제출하며, 수일 내로 기한에 맞추어 다시 출도를 해야 되는 것이다. 상언은 승정원의 상언별감(上言別監)에서 접수한 후 문서 내용에 따라 각방의 승지에게 보내어 국왕에게 회계(回啓)하였다. 상언은 국왕에게 올리는 만큼 절차와 격식을 중시하였으니, 만약 그것에 어긋나면 ‘위격(違格)’이라 하여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다음은 상언의 서식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 본 것이다.
① 허두(虛頭) : 기두어 부분에 해당하며 “구함신모(具銜臣某)”를 씀. 즉 자기의 직함과 이름을 적는 부분. 앞에 문서명을 적는 시면(始面)과 뒤에 중사 앞에 붙는 전사(前謝)가 생략되어 있음
② 중사(中謝) : “성황성공 돈수돈수 백배상언우주상전하(誠惶誠恐 頓首頓首 百拜上言于主上殿下)”라고 투식적으로 쓰는 부분
③ 후사(後謝) : “복이운운(伏以云云)”이라고 쓰며, 이후 본론을 적음. 위 문서에서는 “신부선도(臣父善道)”로 적혀 있다.
④ 결사(結辭) : “신~근매사이문(臣~謹昧死以聞)”등의 투식적인 구절을 적어 문장의 끝을 맺는 부분. 문(聞)자는 임금에게 올린다는 뜻으로, 한 줄을 띄워 쓰는 대두법(擡頭法)을 사용하였다.
⑤ 작성일 : 상언을 작성한 날짜
⑥ 작성자 : 작성자가 구함(具銜)하고 수결을 함
위 문서는 해남윤씨 가문이 소장한 것으로, 1649년 10월 5일에 생원 윤인미(尹仁美)가 국왕에게 올린 것이다. 그 내용은 윤인미가 부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상자에 겉봉을 싸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격으로 처리한 감사(監司)의 처분에 대해 그 부당함을 설파하고, 임금에게 부친의 충심을 전하니 이를 헤아려 달라는 것이다. 상언은 임금에게 올리는 것인 만큼, 절차가 까다롭고, 그 글씨는 해서로 방정하게 쓰며, 문서의 서식도 일정한 법칙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서

상언과 유사한 문서로 ‘상서(上書)’가 있다. 상서는 민들이 임금 이하의 왕세자나 관찰사, 그리고 고을 수령에게 제출하는 청원서이다. 상서의 양식은 상언과 유사한 것이 있는 반면, 소지와 유사한 것이 있으니, 그 양식에 있어 일정하지 않은 면모를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산송, 효행의 정려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며, 연명하여 올리므로 등장의 형태를 띤 것이 많다.
위 사진의 왼쪽은 1827년 9월에 유상조(柳相祚)가 왕세자에게 올린 상서이다. 자신의 부모 산소가 비로 인해 무너질 사정이라 자신이 가봐야 하므로 이를 헤아려달라는 내용이다. 우측은 갑진년 8월에 정재철(鄭在哲) 등이 순찰사에게 올린 무담(騖潭) 영당(影堂)을 수호하기 위해 완문을 내려달라는 내용의 상서이다. 문서의 명칭은 표시한 곳처럼 ‘상서’라는 단어가 나오므로 이에 따라 정해졌다. 그러나 정재철 상서는 순찰사에게 올린 것이므로 의송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여러 명이 연명하였으므로 등장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유상조의 상서는 전체적인 양식이 상언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해서로 반듯하게 쓴 글씨와 존자에 대한 대두법을 엄밀하게 사용, 구성에 있어 허두부터 작성자 이름을 쓰는 부분까지 모두 상언의 형식 그대로이다. 그런 반면 우측의 정재철 상서는 전체적인 양식이 소지의 모습을 띠고 있다. 청원자가 해서로 쓴 내용과 순찰사가 써준 제사와 서압에서 소지의 양식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재철 상서의 서식에 있어서는 상언의 허두와 후사를 차용한 부분에서 소지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보통 소지에서는 기두어에 “우근언소지의단”으로 시작을 하지만, 상서에서는 “~정재철등 근재목재배 상서우순상합하 복이~(~鄭在哲等 謹齋沐再拜 上書于巡相閤下 伏以~)”로 시작하니, 오히려 소지보다는 상언의 서식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또 결사에 있어서도 위 문서에서는 “복걸~비진숭봉지도 행하하기암 행하아이샨일~(伏乞~俾盡崇奉之道 行下爲只爲 行下向敎是事)”이라고 이두를 함께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다른 상서들을 본다면, “근모매이진(謹冒昧以陳)”, “천만기간지지(千萬祈懇之至)”등의 용어를 많이 쓰고 있으니, 상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유생 등의 사류(士類)들이 작성하므로, 이두를 생략하고 한문만으로 문서를 작성하는 관행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장은 한문문체에서 표문(表文)의 작성방식에 따른 것이다.

원정

‘격쟁’은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제도를 말한다. 아울러 ‘원정(原情)’이란 문서를 올리므로 격쟁원정이라 한다. 격쟁은 형조에서 담당하였으니, 먼저 격쟁인에 대해 죄인으로 취급하여 벌을 주고서 이후에 그 소원을 접수하였다. 격쟁은 횟수 제한이 없어 같은 사안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하여 소원할 수 있었다. 원정은 임금뿐만 아니라 관찰사, 유수, 수령에게도 올렸다. 임금에게 올린 원정의 원본 문서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상측에 있는 문서는 경주 옥산의 여주이씨 문중에서 소장한 문서로서, 1841년 이진택(李眞宅)이 작성하여 수령에게 올린 원정이다. 자신이 선조의 정려문제로 집을 비운사이, 자신도 모르게 비변사의 정장(呈狀)에 이름이 올라가 죄를 받게 된 것에 대해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문서는 부안의 부안김씨 문서로, 1732~1767년쯤 김득문(金得文)이 작성한 원정이다. 그 내용은 도망 간 여종 춘단(春丹)을 잡아와서 벌을 주다가 다른 병으로 죽었는데, 그녀의 자식들이 처벌을 주장하므로, 이에 대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원정은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설파하기 때문에, 그 문장을 읽어보면 여타의 소지에 비해 당사자의 억울한 심정이 절실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원정의 양식은 위 문서에서 보다시피, 시면에 ‘원정(原情)’이란 용어를 쓰고 있어 단번에 문서명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상측의 문서에 표시한 부분처럼 “화민이진택 원정”이라 썼고, 기두어에 “우근언”이라고 한 반면, 하측의 문서는 “원정 유학김득문(수결)”, “삶등(白等), 아뢰건대”이라 하고 있어 서식이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상측문서는 소지와 양식이 비슷하지만, 하측의 문서는 구함과 수결을 하고 있고, “아뢰건대”의 뜻인 이두를 사용하고 있어, 초사(招辭)의 서식과 유사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제음이 있는 원정이 있는 반면, 아래 문서처럼 제음이 없는 것도 있다. 제음이 없는 원정은 다짐장의 역할을 하므로 특별한 처결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간혹 다른 문서들 속에 첨부문서로 사용되기도 한다.

단자

‘단자(單子)’는 사부(士夫)가 직접 소송하는 경우와 서울의 사대부가 산송(山訟) 등의 일로 오부(五部)나 한성부에 올리는 경우에 사용한다. 단자라는 용어자체가 사주단자, 호구단자, 부의단자, 제물단자, 세계단자 등 여러 문서에 사용되고 있고, 간찰형식 중에서도 단자라는 문서가 있어 그 구분에 주의가 요구된다. 그러나 소지단자는 문서 형태가 초서로 된 제음이 있어 다른 단자와 구분이 용이한 점도 있다.
소지단자는 시면에 ‘단자(單子)’라고 문서명이 적혀있어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다. 단자라는 문서명 위에 작성자의 구함을 쓰지만, 간혹 “성주전 단자(城主前 單子)”라고 수취자를 쓰고 있는 경우도 있다. 발급자와 수취자가 뒤바꾸어 쓰고 있으며, 이 때는 그 아래에다 자신의 구함을 적는다. 위 사진의 문서처럼 자신의 수결도 같이 하는 경우도 있다. 기두어는 주로 “공감 복이(恐鑑伏以~)”를 쓰며, 또는 “황송 앙달우성주합하 복이~(惶悚仰達于城主閤下 伏以~)”라는 투식적 문구를 쓴다. 결사는 사부들이 직접 작성하므로 이두를 쓰기보다는 한문형태로 끝을 맺는다. “복걸~천만행심(伏乞~千萬幸甚)”이 이에 해당하는 부문이다. 이 문서는 1789년 9월에 전라도 나주의 임홍원(林鴻遠)이 자신의 숙부 산소의 혈처에다 임영진(林瀅鎭)이 몰래 아이의 무덤을 쓴 것에 대해 파가라는 처결을 받았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다시 올린다는 내용이다.

발괄

‘발괄(白活)’은 사부(士夫)들이 남자 노(奴)의 이름으로 올리는 경우, 사부가 땅이나 산이 있는 곳의 수령인, 즉 토주관(土主官)이나 산재관(山在官)에 정소하는 경우, 일반 백성들이 산송(山訟), 채송(債訟), 탈군역(頉軍役) 등으로 정소하는 경우, 여인이 정소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발괄’이란 용어는 이두로서, 조선후기가 되면 ‘발괄’과 ‘백활’이란 발음이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문의 사진은 1892년 유진사댁(柳進士宅) 노(奴)인 연대(連大)가 자신의 상전을 대신하여 전세(田稅) 문제로 올린 것이다. 전체적인 양식과 서식, 또 그 내용들이 소지와 같다. 시면에 ‘발괄(白活)이라고 적고 있으나, 기두어에 다시 “우근진소지의단(右謹陳所志矣段)”이라 적어 놓은 것이 있어, 시면이 훼손되면 그냥 소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의송

‘의송(議送)’은 수령의 처분에 불만이 있을 경우, 상급기관인 감영(監營)에 항소할 때 사용하는 문서이다. 물론 감영에도 ‘소지’, ‘단자’, ‘발괄’을 제출할 수는 있다. 이 문서는 해남윤씨 녹우당 문서로서, 1755년 백련동(白蓮洞)의 상하 민인들이 전라감영에 올린 의송이다. 그 내용은 백사휴(白思休)가 풍수상 대충(對沖)의 자리에 무덤을 써서 마을 사람들이 해를 입으니, 이를 파가도록 청원한 것이다.
위 사진의 상단에 표시해 둔 네 곳을 통해 이 문서의 문서명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시면의 하단, 기두어, 판관의 존함, 작성일 아래 부분, 제사에 본관(本官)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통해 의송이라는 문서명을 확정할 수 있다. 위 경우는 시면에 “~등장(等狀)”이라 되어 있고, 기두어는 “우근언소지의단”이라 되어 있으니, 이는 소지이면서 등장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이다. 경우에 따라서 시면에 “~의송”이라 되어 있거나, 기두어가 “우근언의송사단”이라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문서는 작성일 아래 있는 의송이란 용어에 따라 문서명을 확정할 수 있다. 그리고 제사에 있는 ①번은 “산재관 삽(山在官卅)”을 적어 놓은 것이며, 이는 관찰사가 소송을 벌이는 산이 소재한 관아에 다시 되돌려 보낸다는 의미이다. 수령에게 보내기를 조사하여 만약 죄상이 발견되면 피고를 가두고 무덤을 파가게 하라하였다. 의송은 대개 제사에 “본관(本官)”, “척재관(隻在官)”, “산재관(山在官)”, “지역명”을 적었으니, 이는 감영이 처분을 내려 해당관아로 되돌려 보낸 것에 대한 표시이다. 삽은 날짜로서 30일에 처결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②번에서 보다시피 “병자시월초십일 도부(丙子十月初十日到付)”라 되어 있으니, 이는 병자년 10월 10에 이 의송을 해당관아에다 다시 접수하였다는 표시이다.

등장

‘등장(等狀)’은 2인 이상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는 소지를 말한다. 등장의 문서명은 시면에 ‘등장’이나 ‘등’이 붙거나, 기두어에 등장이라고 적혀있는 것에 따라 정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상서나 의송 등의 소지류 문서가 등장의 형태를 띠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므로, 딱 잘라 등장이라고 문서명을 붙이기에는 어려움도 따른다.
위 사진은 시면과 기두어에 분명하게 등장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좌측 여백에 여러 사람의 성함을 연이어 적어 놓았다. 이 문서는 경주최씨 문중의 소장 문서로서, 1819년 4월 16일 용산서원 수직노(守直奴)인 최명운(崔命云) 등이 조석으로 공궤(供饋)를 하는 곳인 남청(南廳)이 훼손된 것에 대해 보수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청원한 것대로 시행하라고 제음을 내렸으며, 이를 풍헌(風憲)에게 지시하였으니, 처결일 옆에 풍헌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풍헌은 조선시대 면리의 여러 행정적인 실무를 담당하였던 직책이다.

기타소지

1. 입지신청 소지

‘입지(立旨)’는 이전에 있던 문서가 도둑을 맞거나 불에 탔을 경우에 관청에서 재발급 받았던 증빙문서이다. 입지는 입안 발급의 복잡한 절차와 과중한 부담, 왜란과 호란 등의 사회적으로 혼란 등으로 인해, 입안을 대체하여 동일한 공증력을 지닌 제도가 필요함에 의해 생겼다. 입지는 입안과 같은 종국적 확정력을 갖지 못하였으며, 반증이 있을 때에는 효력을 상실하는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였다. 입안은 원본과 부본을 작성하여 후일의 증빙을 위해 원본을 관에 보관하였다. 반면 입지는 작성자가 “후고차 입지성급안일(後考次立旨成給向事), 훗날에 참고하기 위해 입지를 작성해 주실 일”라고 입지를 신청하면, 수령이 제음으로 “입지성급안일(立旨成給向事), 입지를 작성해 줄 일”이라고 적어 돌려주었다. 입지는 따로 문서를 발급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소지가 입지인 것이다. 이는 소지의 내용을 읽어보고 아울러 초사로 된 제음을 판독해야 확인할 수 있다. 입지를 그냥 소지로 분류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위 사진은 유금리(有今里)에 거주하는 사노(私奴) 갯똥(介叱同)이가 작성한 문서이다. 갯똥은 묵은땅을 개간하여 자기 이름으로 척량했는데, 주변 땅의 작자(作者)들이 함부로 침탈하려 하였다. 이가 걱정되어 훗날의 참고하기 위해 그 소유권을 확인해달라는 소지를 작성하여 올렸고, 그에 대해 수령이 입지를 작성해준다는 제음을 내렸다. 본문의 마지막에 “후고차 입지성급일(後考次立旨成給事)”이라 되어있고, 제음에 “입지일(立旨事)”이라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입지성급을 청원하는 소지로 보겠지만, 문서명은 입지라 해야 할 것이다.

2. 입안신청 소지

다음 문서는 사급입안에 점련되어 있는 소지이다. 이것은 『고문서집성』32권에 실려 있는 경주손씨 집안의 문서이다. 이 문서는 1594년 손시(孫時)의 호노(戶奴) 연수(連守)가 박응순(朴應純)에게서 매득한 비(婢) 소매(小梅)에 대해 그 소유권을 청구하기 위해 경주부에 올린 소지와 그에 대해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사급입안이다.
위 문서에서 보면, ②번은 손시의 호노 연수가 박응순에게 비를 구입하면서 작성한 명문(明文)이다. 그러면 연수가 입안을 청구하는 소지인 ①번 문서를 작성하여 그 둘을 붙여 관아에 제출한다. 소지의 내용은 “청도에 사는 박응순에게서 구매한 비 소매에 대해 사급을 신청함”이라 하였고, 제음에는 “증인과 집필자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면 관련된 사람과 함께 관아에 가서 그 매매사실을 확인하는 초사(招辭)를 작성한다. 바로 ③번이 소매의 전주인인 박응순의 초사이고, ④번이 증인인 조대행(曺大行), 최옥림(崔玉林)과 필집자인 신몽득(辛夢得)의 초사이다. 이후 ⑤번은 경주부윤이 그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발급해준 사급입안이다. 경주부윤은 그 이전에 소매를 매매한 문서인 구문기(舊文記) 2장과 겸순찰사(兼巡察使)가 보낸 관(關) 문서에 의거해서 그 사실관계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입안에 모두 기입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이들 문서를 모두 붙이고 이어진 곳마다 관인을 찍어 청구인에게 돌려준다.
위 사진은 사급입안을 청구하는 소지의 확대부분이다. 시면에 표시한 ①번은 호노 연수의 손마디를 표시한 것이다. 이를 수촌(手寸)이라 하는데, 천인들이 문서를 작성할 때는 이름 아래에 자신의 수장(手掌)이나 수촌을 표시하였다. 여자는 오른쪽 손을 사용하고, 남자일 경우는 왼쪽 손을 사용하는데, 수촌일 때는 가운데 손가락의 두 마디를 표시한 후 그 안에 우촌(右寸), 좌촌(左寸)이란 글씨를 써 넣었다. ②번은 제음으로 “증필솔래안일(證筆率來向事) 형이십구일(刑二十九日)”이라 적혀 있다. 즉 작성자에게 증인과 집필자를 데리고 오라고 처결하였다. 그리고 형은 형방을 말하고 29일은 처결날짜이다. 형방은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서 형전(刑典)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향리를 말한다. ③번은 판관(判官)이 쓴 착관으로 ‘판관(判官)’이란 글자를 휘필한 것이다. 간혹 행수법에 따라 행직일 때는 ‘행판관(行判官)’을 휘필하기도 한다. 판관은 종5품 관직으로 소속관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거나, 지방관을 도와 행정과 군정에 참여한 관직이다. 경주부 같은 경우는 1671년쯤에 판관제가 폐지되어 그 이후는 이 표시를 볼 수 없다.

3. 근대식 소장

조선시대 소지는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그 작성방식에 일대 변혁기를 가져왔으니, 이후부터 근대식 소장이 생기게 된다. 1895년 4월 29일 법부령 제 3호 ‘민형소송규정’에 의하여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에 관해서 그 문서를 작성하는 요령이 제시되었다. 민사소송의 소장과 소답의 서식은 우선 이 둘을 구분하여 작성하도록 하였다. 우선 종이에 있어서는 괘선이 있는 규격화된 인찰지를 사용하게 하였다. 서식에 있었어도, 원고가 제출하는 소장 앞부분에 원고 자신의 주소, 직업, 성명, 나이는 물론 피고의 주소, 직업, 성명, 나이를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소구(訴求)와 사실(事實)을 구분하여 작성하게 함으로서 원고의 청원 내용을 간단하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형사소송인 경우는 고소장과 고발장의 서식을 따로 쓰게 하였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처벌해 달라하는 것은 고소(告訴)라 하였고, 공공의 문제에 대한 범죄로 인해 처벌을 요청하는 것은 고발이라 하였으니, 현대적 의미의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소송 관련 문서는 일반인이 작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갑오개혁 이후는 타인에 의해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대송(代訟)이 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