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류씨 화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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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풍산류씨(豊山柳氏) 화경당(和敬堂)은 안동 하회마을에 위치하며, 북촌댁으로 알려져 있다. 화경당 문중은 서애 류성룡의 8세손 류사춘(柳師春, 1741~1814)을 비롯한 그 후손을 일컬으며, ‘화경당’이라는 명칭은 1831년(순조 31)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가 ‘화경을 위주로 삼으라’는 선고의 유언을 받들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당호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세거 과정과 성장

풍산류씨는 안동부 풍산현의 토성으로, 하회에 세거하게 된 것은 고려 말의 류종혜(柳從惠)로부터 시작된다. 하회는 외적의 침입을 피할 수 있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가지고 있는 길승지였기 때문에 류종혜는 친구 배상공(裵尙恭)과 하회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조선중기까지 특정 성씨가 하회마을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처가살이 형태의 가족제도 하에서 여러 성씨들이 함께 살았다. 권옹(權雍)은 배상공의 손서가 되어 하회에 살았으며, 류종혜의 손자 류소(柳沼)는 권옹의 여서가 되어 그의 터전이 다시 류씨에게로 돌아갔다. 안종생(安從生)은 배상공의 아들 배소(裵소)의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를 하였고, 아들 안팽명(安彭命)은 외가에서 자라게 되어 안씨의 일부가 류씨와 함께 하회에 살았다.
16~17세기 풍산류씨는 류중영(柳仲郢)과 아들 운룡(雲龍)·성룡(成龍) 등 학문적·사회적으로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족세가 강해지면서 다른 성씨들은 차츰 하회를 떠났다. 이와 더불어 조선후기 부계적 가족 질서가 정착됨에 따라 가계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하회는 풍산류씨 중심의 전형적인 동성마을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풍산류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계와 인물

풍산류씨는 7세 류종혜 대에 하회에 정착한 이후 류백(柳伯)이 은사급제하면서 향리(鄕吏)에서 벗어나 사족의 반열에 올랐다. 12세 류중영(柳仲郢)과 13세 류운룡(柳雲龍)·류성룡(柳成龍) 형제 대에 와서 학문적·사회적으로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인물이 배출되면서 풍산류씨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거의 전 기간을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국난극복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그가 저술한 『징비록』은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류운룡·성룡 형제의 후손은 각각 양진당(養眞堂, 謙菴派)과 충효당(忠孝堂, 西厓派)로 분파되었다. 류성룡의 가계는 여(袽)→원지(元之)→의하(宜河)→후상(後常)→성화(聖和)→운(澐) 등으로 이어졌고, 화경당은 류사춘이 충효당으로부터 분가하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화경당은 이좌(台佐)→희목(希睦)→도성(道性, 1823~1906)→덕영(德榮)→기우(箕佑)→시경(時慶)→영하(寧夏)→세호(世浩)로 가계가 이어지면서 양반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특히 류이좌와 류도성 대의 화경당은 풍산류씨와 향촌의 사족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류이좌의 초명은 태조(台祚)였으나 정조의 명으로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의 ‘이좌(台佐)’로 고쳤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초계문신으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일족과 의장소(義庄所)를 만들어 주민의 구호활동에 앞장섰으며, 유림의 공의에 따라 『번암집』 발간, 『퇴계집』 중간, 『우복연보』 개간 등을 주도하였다.
류도성은 경상도 도사를 역임하였으며, 단발령 거부를 비롯하여 팔순이 넘은 나이에 항일의병운동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안동 유림사회의 가장 민감한 갈등인 ‘병호시비(屛虎是非)’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소작인의 소작료를 낮춰 주는 등 향촌 사회에 봉사하고 후학 양성 등으로 일생을 보냈다.

소장자료와 가치

화경당의 고서와 고문서 가운데 17,000여건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중이며, 그 가운데 고문서는 11,791점이다. 간찰이 7,019건으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며, 시문·치부·통문·치부기·명문 등 다양한 종류의 문서가 전한다. 조선후기 향촌사회 및 경제 활동 양상을 밝힐 수 있는 자료로 활용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