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기(分財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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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기의 정의

현대사회에서 재산 상속은 부모의 사후 뿐 아니라 부모 생전에 증여되기도 한다. 또한 가족 및 친족 구성원 별로 재산 상속 비율에 관한 법 규정이 있지만 부모의 뜻에 따라 재산 분배가 이뤄질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작성된 재산 상속문서를 분재기(分財記)라 한다. 이러한 분재기의 구성은 분재원칙 및 분재 사유를 밝히는 서문과 상속 내역이 기입된 본문, 관련자들의 서명 부분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보통 서문에는 각 가문의 재산 상속 관련 관행적 지침이나 법적인 지침이 수록된다.
조선전기에는 제사를 지낼 때 윤회봉사(輪回奉祀)가 이뤄진 만큼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 균분상속제였다. 그렇지만 누구나 같은 몫의 재산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분재 방식을 좌우하는 여러 요소 중 중요한 것은 재주(財主)의 의사였다. 재주는 통상 부모를 가리키며 재산 상속은 부모 살아생전 재산을 나눠주는 경우와 부모 사후 자식들이 주체가 되어 각자의 협의에 따라 나누는 경우로 구분된다.
살아생전 나눠주는 경우에는 재산이 모든 자식들에게 분재되었는지 아니면 특정 자식에게만 나눠주는지에 따라서 분재의 성격이 달라진다. 전자는 정식 재산상속으로 분급(分給), 분깃[分衿], 깃급[衿給]이 이에 해당하며, 후자로는 ‘별급(別給)’이 있다.
재주의 사후 자식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분재는 화회(和會)라고 한다. 이러한 화회는 형제간에 협의하여 부모의 재산을 나누는 행위를 가리킨다. 부모 사후에 이루어지는 재산 분재이므로 부모 생시의 유언이나 유교(遺敎), 부모가 생전에 작성해둔 초문기(草文記), 가문에 내려오는 전통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일 이러한 지침이 없다면 법전의 규정을 따라 분재되어야 했다.
일부 재산의 별급을 제외하면 분재기가 작성되는 시기는 주로 부모의 사망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조선사회는 문서주의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미리 재산을 받았더라도 부모의 사망을 전후한 시기에 물려받은 재산을 문서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분재기 작성을 통해 해당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작성된 분재기는 상속 대상자 수만큼 작성하여 각자 보관하도록 하였다. 만약 분재기가 불에 타 없어지면 소화입안(燒火立案)을 받거나 때로는 재분재를 해서 분재 사실을 명문화 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분재기 작성을 통해 친족제 유지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그 합리적 경영에 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때 금기시 됐던 것 중 하나가 손외여타(孫外與他)이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유래가 보이며, 조선전기에 더욱 눈에 띄는데 재산을 손외의 사람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가족 중 자식 없이 죽은 이가 생기면 재산의 직접적 상속자가 없으므로 대부분 손외여타를 금하는 내용을 분재기에 기재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손외여타 금지 규정이 분재기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 이는 가계 계승 방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조선 후기에는 승중‧봉사의식 및 부계 중심의 친족 체계가 강화되어 가면서 조선전기와 달리 무후(無後)하게 되면 양자를 들였다. 따라서 계후자(繼後子)가 혼인하기 이전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면 계후자에게 재산‧제사상속이 이루어졌으므로, 별도로 분재기 안에 손외여타를 기입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자녀 없이 죽은 망녀(亡女)의 재산 상속에 관한 소송에 있어서도 망녀의 재산 상속 권한 및 비율을 살펴보면, 시기가 빠를수록 망녀의 본족 쪽에 후기로 가면 의자녀 쪽에 소송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분재기는 제사 및 봉사의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경인문화사, 2004.
이수건, 『경북지방고문서집성-해제 및 연구편-』, 1981.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6.

시기별 분재 양상과 재산상속 방식

문숙자는 14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작성된 540건의 분재기를 분석하면서 양인 신분이 재주로 등장하는 분재기는 12건, 노비가 재주로 등장한 사례는 4건으로 이 두 계층은 전체의 3%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즉 현존하는 대부분의 분재기는 양반 신분의 분재기라고 하였다.
분재기의 시기적 분포를 살펴보면, 16~17세기에 작성된 분재기의 비율은 79%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 작성되는 분재기는 15%정도로, 분재기의 작성이 현저히 감소한다. 종류별로는 별급이 전체의 약 46%로 많으며, 분급과 화회는 각각 27%, 23%가 남아있다. 이처럼 18세기 중엽이후에 분재기 작성이 감소하는 것은 봉사 형태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봉사와 분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 이후 별급의 상당 부분이 재주의 의사대로 종자(宗子)‧종부(宗婦)에게 허여되었으나,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점차 장자우대 상속으로 바뀌어가면서 분급이나 화회문기는 물론 별급문기의 작성도 그 의미가 옅어졌다. 이는 몇 세대를 거치면서 균분에 의해 영세해진 재산은 별급이라는 편법 없이도 장자 중심으로 상속되었고, 다른 자녀들에게는 최소한의 재산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18세기 중엽 이후 분재기의 수를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재산상속은 『경국대전』을 통해 균분 방식의 상속제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로 분재기를 통해서도 이러한 균분원칙이 지켜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가문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제 상속제의 균분 상속 원칙은 나름대로 변모하며 진행되었다.
고려후기부터 조선조 17세기까지의 기본적인 상속 관습은 평균 분급이었다. 이런 의식이 분재기 서문에 ‘의법(依法), 평균분급(平均分給)’ 등으로 기재되는데, 이는 시기가 올라갈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1580년에 작성된 이은보(李殷輔) 남매 화회문기 중에는 ‘장남‧차남은 갑술년에 화회하고 문기를 만들 때 노비 1구씩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 문기에서 채워줄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이은보 남매의 유루분 화회문기의 추기(追記) 부분으로, 1차 분재에서 주지 못한 노비 1구를 균분상속 차원에서 2차 분재에서는 채워준 것이다.
이런 균분원칙은 노비의 지역별 배분에서도 잘 지켜졌다. 조선전기 재경관인(在京官人)들은 전국에 걸쳐 노비를 소유하였고, 이러한 노비를 분재할 때는 노비들의 거주지를 고려하여 배분이 이루어졌다. 이는 영해 재령이씨가의 재산상속에서 예를 들 수 있다.
위 이은보 남매 화회문기에 따르면 2차 분재에서 재분배하게 된 노비의 소재지는 함경도 경원, 충청도 서천, 전라도 임실 세 지역이었다. 모두 서천‧임실의 노비를 1구씩 받았으나 셋째 사위인 채계흥(蔡繼興)에게는 함경도 경원의 노비만 3구가 주어졌다. 그래서 차후에 분재에서는 셋째 사위 채계홍을 우선 배려하여 가까운 노비를 받을 수 있도록 화회문기 안에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균분원칙은 노비뿐 아니라 토지, 가사 등 재산항목에 관계없이 적용되었다. 이처럼 노비의 나이, 거주지, 성별 등이 고려되고, 토지의 경우는 비옥도가 고려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분재기에서는 일부 가문의 사위들이 물려받은 처가의 재산을 자진 반납 하는 행위가 발견된다. 이는 처가의 봉사(奉事)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점차 딸과 사위들은 윤회 봉사 및 균분 상속에서 제외되어 갔다. 17세기 이후에는 차등 상속이 나타나며 봉사조(奉祀條)가 가문마다 형성되기 시작한다. 봉사조란 조상을 항구적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상속재산을 분배할 때에 별도로 설정한 재산을 가리킨다. 분재기에는 봉사조(奉祀條), 승중조(承重條), 주사조(主祀條) 등으로 지칭된다. 분재기에는 봉사조 이외에도 묘에서 지내는 제사인 묘제를 위해 묘위, 묘제위를 설정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15세기 분재기에서 드물게 나타나던 봉사조가 독립적인 봉사조 설정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분재기의 종류와 양식

재산상속 문서는 일반적으로 분재기로 통칭되지만, 실제 분재 문서에 쓰이는 명칭은 분급명문(分給明文), 허여성문(許與成文), 허여명문(許與明文), 분깃기[分衿記], 화회성문(和會成文), 허급문(許給文), 별급성문(別給成文)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화회‧허여‧분급‧별급은 분재의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재기의 종류는 분재의 주체‧시기‧분재 대상물의 수량, 수급 대상자의 범위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분재기 안에 기입되는 재산 내역 즉, 물종(物種)은 각각 그 유래가 명시되었다. 예컨대 처변(妻邊), 부변(父邊), 모변(母邊), 세전 전답(世傳田畓), 자기매득(自己買得) 등 노비와 전답 등 그 소종래(所從來)를 구분하여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

(1) 화회문기(和會文記)

노비‧토지 등의 재산은 재주가 살아 있을 때 재주의 의사에 의하여 분재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재주 생전에 미처 분재하지 못한 경우에는 사후 그 자녀들의 화회에 의하여 나눠진다. 이와 같이 재주 사후에 어머니 및 자녀의 화회에 의해서 또는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후에 형제자매의 화회에 의하여 재산을 나누는 문서가 화회문기이다. 분재기에는 화회분집(和會分執), 화회성치(和會成置), 화회성문(和會成文) 등의 용어로 나온다.
화회는 재주의 유서가 있으면 이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으나 유서나 유언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자매가 모여서 화합한 가운데 분급을 하게 된다. 조선전기는 대개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봉사조 및 승중자에게는 오분의 1을 가급하고, 나머지는 중자녀가 평균 분급하였으며 양첩자녀‧의자녀‧양자녀‧천첩자녀 등에도 분재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화회는 부모의 3년상을 마친 후에 이루어졌으며 상속 대상자들이 모두 참석하는 것이 전제되었다. 참석자들은 분재 내용에 합의한다는 의미로 화회문기에 서압(署押)을 하였고, 상중이거나 나이가 어려 서압하지 못하는 경우 이러한 사유를 반드시 명시하였다.

(2) 분급문기(分給文記)

분재기의 일종으로 재주가 생시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문서이다. 분급의 내용은 대개 조선전기에는 균등분배를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장자우대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전기의 분급대상은 주로 노비가 많다. 그러나 문서상에 분급문기라고 지칭되더라도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별급인 경우가 있다. 예컨대 1502년 이선손(李璿孫)이 아버지 이훈(李薰)에게 받은 분급문기는 이선손이 등과 별급인 종친시에 합격하자 받은 분급문기이다.

(3) 깃부문기[衿付文記]

분재기의 일종이나, 분급문기나 화회문기와 구별되는 것은 형제자매의 분급내용을 동일문서에 표시하지 않고 자녀 일인씩의 몫을 별도로 작성해준 문서이다. 깃부문기의 예로는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아들 진안군(鎭安郡) 방우(芳雨)에게 준 문서가 있다. 그 형식과 내용을 살펴보면 첫 줄에는 ‘사(賜) 자(子) 진안군(鎭安郡) 방우(芳雨)’라 하여 아들 진안군 방우에게 줌을 명시하였다. 두 번째 줄부터는 방우가 받는 재산이 어디에서 전래된 것이 그 유래와 위치 등을 기록하였다. 1794년 재주인 아버지가 3남 1녀 중 말녀(末女)에게 작성해준 깃부문기는 약간의 세전(世傳)전답과 아버지 스스로가 매득하여 갈아 먹어온 약간의 전답을 막내딸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4) 별급문기(別給文記)

별급은 정식 분재와는 상관없이 특정 자손에게 축하해줄만한 일이나, 상을 줄만한 일이 발생했을 때 작성해서 준 것으로, 별(別)은 ‘특정인에게 일정한 재산을 특별한 사유에 의해 지급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별급(別給)은 별급 될 당시에는 따로 문서가 작성되지 않았다가, 차후에 모든 재산을 나누는 자리에서 과거 별급 사실을 기재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별급으로 인해 자손들이 받는 재산이 누구나 공평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별급은 넓은 의미에서는 분재문서에 포함될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재산상속과는 구별되며, 재주인 발급자가 부조(父祖)에 한정 되지도 않았다. 즉 별급은 대상자의 범위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외조부, 삼촌 등에게서 별급 받기도 하였다.
별급 되는 사유를 살펴보면 과거급제‧생일‧혼례‧병 치료‧득남(得男) 등으로 기념할만하거나 축하할만한 일이 있을 때, 빈곤하게 살고 있어서, 기특하여, 정이 들어서, 또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행해졌다.
별급의 범위와 사유는 다양하기 때문에 별급된 재산은 재산분재 시 또는 화회 시에 분집 이외의 별도의 재산으로 인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별급문기도 재주‧증인‧필집을 갖추게 되어 있으나, 재주가 필집을 겸하고 증인은 없는 경우도 있으며 재주의 신분이 높으면 문서작성에 참여하는 증인의 수효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별급은 재주가 특정한 자손 등에게 재산을 예외적으로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많았고, 특히 별급을 통해 조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재산이 타인에게 가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경국대전』 「형전」 사천조에는 재산을 별급하거나 상속할 때 관서문기(官署文記)가 필요 없는 주체를 규정하였다.

(5) 허여문기(許與文記)

분재기의 종류 중 허여문기에 관해서는 그 정의가 다양하다.
먼저 최승희는 허여문기를 재산을 허여하는 문서로 보면서, 직계 존속에 의한 경우도 있으나 방계 및 인척에 의한 경우도 많다고 정의하였다. 또한 분급이나 화회와 같이 정식의 재산분재도 아니고, 별급과 같이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허여하는 것도 아니므로 사후에 재산분쟁의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즉 조부 등 직계존속에 의한 허여라도 뒤에 후손들에 의하여 분쟁의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방계 및 인척에 의한 허여일 경우에는 더욱 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반면 이수건은 부모나 부 또는 모가 재주의 입장에서 자기의 자녀 전부를 대상으로 분재하여 급여해 준 문기로 보았다. 즉, 생전의 재주에 의한 전 재산의 분재를 허여문기로 보았다. 이수건은 허여를 별급과는 대칭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 허여라는 용어를 쓴 것은 성급‧허급‧분급‧허여 등 실제 고문서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표현 중 허여의 용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정구복은 1429년 김무(金務) 분급문기를 분석하면서 별급문기에도 허여라는 말이 쓰이므로 허여는 단순히 ‘준다’라는 의미 밖에 없다고 보고 분재기의 종류로 파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제 조선전기의 별급문기를 살펴보면 문기의 첫 부분에 허여로 표기한 경우가 많고 17세기 이후에는 별급으로 명확히 기재한 경우가 많아 문기의 앞부분만을 가지고 별급문기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견을 종합하면 허여문기는 재주가 직접 재산을 주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며 그 때 작성된 분재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수급대상자의 수와는 무관한 용어이다.

(6) 유서(遺書)

유서는 유언을 문서로 작성한 것으로 사후의 집안 내부의 여러 가지 일의 처리에 관한 것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사서(士庶)의 유서내용은 대개 조상의 봉사 문제와 재산분재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대개의 유서는 분재 문서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유서는 대개 아버지가 남기는 문서로서 자필(自筆)로 작성되는 것이 일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