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이씨 초초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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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진성이씨(眞城李氏) 초초암고택(草草庵古宅)은 안동시 예안면 하계리(下溪里)에 있으며, 진성이씨 17세 초초암(草草庵) 이태순(李泰淳, 1759~1840)과 그 후손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세거 과정

진성이씨는 고려 말의 이석(李碩)을 시조로 한다.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우왕 때 안동 마애촌[磨崖村, 현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에 정착하면서 진성이씨가 안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이자수는 말년에 와룡 주촌[周村, 현 와룡면 주하리]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그의 증손 이계양(李繼陽)이 예안현[현 안동시 도산면]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예안현 토계에 세거하던 이황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계, 원촌, 내살미, 의인, 섬마, 단천, 부포 등 인근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초초암고택이 있는 하계에는 이황의 손자 영도(詠道)가 자리를 잡은 곳이며, 그 후손들은 하계파에 속한다.

가계와 인물

진성이씨 초초암고택의 선계는 석(碩)→자수(子脩)→운후(云候)→정(禎)→계양(繼陽)→식(埴)→황(滉)→준(寯)→영도(詠道)→기(岐)→희철(希哲)→양(欀)→수약(守約)→세관(世觀)→귀원(龜元)으로 이어진다. 이귀원의 다섯째 아들이자 초초암고택의 주인인 이태순의 가계는 다시 휘원(彙遠)·휘운(彙運)→만억(晩億)·만덕(晩德)·만각(晩慤, 호: 愼庵, 1815~1874) 등으로 이어진다.

이태순은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했으며, 시강원 필선, 사간원사간, 봉사시정, 부응교 등을 역임했다. 장령이 되었을 때 시무 4조를 올렸으며, 부응교로 있을 때에는 유배되었던 채홍원(蔡弘遠)과 정약용의 석방을 청하기도 했다. 이후 대사간, 동부승지,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황이 머물던 양진암 터에 서재를 짓고 산수를 벗하며 여생을 마쳤다.

이만각은 이휘운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류회문(柳晦文)의 딸이고, 부인은 권명하(權命夏)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백부 이휘원과 외숙인 정재 류치명에게 수학했으며, 학문으로 일가견을 이루었다.

소장 자료와 가치

초초암고택에서는 2003년 소장하던 고전적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고서류는 89종 272책이고, 고문서류는 1,083건이다. 고서류는 『우재집(愚齋集)』을 비롯한 문집류가 다수를 차지한다. 고문서는 간찰 725건, 제문 142건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그 밖에 만사 43건, 안장기 14건, 명문 32건, 분재기 1건, 연길 33건, 성책 21건, 행장 4건, 시문 47건, 소지 7건, 상소 2건 등이다.

초초암고택의 고문서는 간찰, 제문, 만사, 안장기, 시문 등 사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으며, 사회경제적인 자료는 적은데, 이는 초초암의 주인인 이태순의 활동시기가 19세기 초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