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崔氏의 답장 편지
丙辰(1856) 12월 20일 : 崔濟健, 崔世信, 崔世應, 崔台壽, 崔聃壽
삼가 생각건대, 여러분의 體候가 평안하신지요? 저희들은 이미 세 차례의 편지를 가까이 두고 받들어 보존하며 거듭 읽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 가운데서 글을 지을 때 아마도 잘못된 곳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대개 道를 받드는 것은 사람에게 피차가 없고, 땅에 구분하는 제한이 없으며, 사사로우면 공평하지 않고, 공평하면 사사롭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한즉 여러분이 받드는 바는 곧 저희들도 받드는 바이며, 저희들이 받드는 바는 곧 여러분들이 받드는 바입니다. 그것은 저희와 여러분이 받드는 바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한 道가 받드는 바입니다. 한 道가 받드는 바일 뿐만 아니라, 바로 한 나라가 받드는 바입니다. 그러하니 어찌 일찍이 어떤 모순의 단서가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그 도리가 아니면, 비록 斯文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당일로 쫓아버려야 할 뿐입니다. 어찌 겨우 나누어 둘로 만들어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하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존중하는 것을 똑같이 존중하는 것은 이러한 지위에 해당하기에 만약 한 집안에 한 사람이 맡아서 주장한다면, 사사로움과 사사로움이 빼앗는 것이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너그럽게 생각하셔서 저희들이 한두 번 빈말을 하더라도 다시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저 상량문을 흐릿하게 하여 얻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나, 그것은 우리 사림의 명백한 正論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미진함이 됩니다. 이것은 典章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진실로 저희들이 용납할 수 없는 허물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뜻이 어찌 "우리가 존중하는 바를 너희가 어찌 감히 존중하는가? 너희가 존중하는 바를 우리는 반드시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두 가지는 하나의 ‘尊[존중하다]’이라는 글자에 실려 이루어진 것이나, 비교의 단서를 원래 비교가 되지 않는 것에서 끄집어내었으니, 이와 같이 경솔할 뿐입니다. 저희들이 비록 아는 것이 없고 졸렬한 못난 사람이지만, 또한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 그러는가?"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를 위한 일은 단지 합하려는 도리에서 나왔으나, 지금 여러분에게 도리어 힘을 분산하게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면, 처음에는 두 집안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였으나 좋은 해결법이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楚나라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齊나라 역시 잘하지는 못한 경우와 같습니다. 저희들이 진실로 제나라와 초나라의 사이가 된다면, 두 나라 사이에 낀 하찮은 하나의 작은 滕나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단코 義理에 굳게 발을 딛고 한 조목을 억지로 끌어대게 하는데 이른다면, 또한 유독 魯나라만 항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찮은 한 가지 일을 사리에 어그러지는 과격함으로 파멸시켜 비록 두렵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공평히 하는 것을 뜻으로 삼는 의리를 다시 어찌 감히 받아들여 감당하시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각자 하는 것을 하여 이기려는 마음을 없앤다면, 저희들은 "말을 한 번 잘못해서 생긴 오점을 오히려 깎아서 없앨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더구나 받드는 예절은 和解를 귀하게 여기는데, 화해라는 것은 조용히 급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이것을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士林이 염치에 온전히 힘을 써야하는데 한갓 미워하고 질시하는 것을 일삼아 先祖를 모시는 것을 막아서 못하게 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또한 龍山을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 반드시 景山의 일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획을 이루지 못하자 도리어 東江의 일에 고집을 부려 景山의 회원에게 악독한 짓을 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집에서 노한 것을 거리에서 나타내고, 마음속으로 보복할 틈을 엿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景山의 本孫의 입장에서 화려한 의식이 바야흐로 펼쳐지려고 하는데, 무리의 시기심이 가까이에서 나오게 되면, 어찌 미리 단단히 잡아서 단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한 손에 창을 들고 "執禮에게 禍를 전가한다."라고 말해서 일을 해야 할 사람이 태연히 언덕 위에서 방관한다면, 더욱 꺼림직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李氏들이 先祖 모시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도내의 사대부들에게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琴湖에 사는 李之乘은 때때로 생황을 불며 다시 前轍을 밟고,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배척하고 업신여기기에 본래 자신이 지닌 재주를 쓰고 싶어서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절교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나쁜 소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 士林에 이르러서는 나리들께서 비록 참는 도리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저 두고서 조목을 문책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으로서의 도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라도 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牌旨를 저 士林과 아랫마을에 보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溪上이 玉院書院을 거부하는 通文[李淸州가 혼자서 통지하였다. 戊午(1858)年 8월 일]
삼가 생각건대, 彙寧은 머지않아 죽을 몸이지만, 무릇 자신의 심신과 관계된 것에는 항상 구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더더구나 우리 무리들이 함께 아는 일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屛虎是非는 바로 우리 무리의 존망이 모인 것입니다. 제가 감히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앞의 것에 대해 소홀하였습니다. 대개 일찍이 입이 닿도록 화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바보스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진실로 힘을 써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하루아침에 눈을 감게 되면 千古의 恨을 이룰까 두려웠기에 부득이하게 앞의 것에 대한 의론을 다시 편 것은 우러러 여러분의 可否를 듣고자 한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 是非라는 것은 사람이 같이하는 것이나, 간혹 사사로움에 치우쳐 크게 중요한 것을 구속하게 되면, 是非를 공정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彙寧은 일찍이 여러분들이 "우리가 의지하고 돌아갈 廬江書院에는 이미 夫子께서 자리에 계시고, 顔子와 曾子가 앞뒤에서 모시는 形象과 施設을 한 것이 100년이나 되었으니, 숭고하고 존엄하며 고요하고 편안 것뿐만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다투는 것은 이 祠堂 안에서 일어나 40년 동안이나 말과 文字로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事體와 道理를 감히 편히 여기는데 심히 그릇됩니다. 여러분도 이것에 대해 이미 편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계십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우리 무리들은 모두 오래된 집안에서 연원하여 평소 서로 사랑하기를 마치 형제 같이하고, 和樂하기를 마치 가까운 친척과 같이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是非를 하고부터는 분명히 하늘의 이치는 없어지고 사람의 마음은 상실하여 의견이 같은 사람은 한패가 되어 의견이 다른 사람을 물리칩니다. 그래서 형제는 길가는 사람만 못하고, 멀리 있는 사람과 사귀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여 가까운 친척이 마침내 반목하여 떠나는데 이르니, 선현의 뜻을 체현하여 크게 화평함을 보존하는데 심히 그릇됩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에 대해 또한 이미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즉 여러분이 저 彙寧에게 말씀하신 바는 진실로 옳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 우리 무리는 한 집안이며, 다툼 역시 한 집안의 일입니다. 이미 편하지 않은 것을 알고, 또 옳지 않은 것을 알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마음을 공평하게 하고 듣기를 공정하여 사사로운 뜻을 점차 삭이고 客氣를 점차 물러나게 하면, 제각기 다른 망령된 생각이 무르익다가도 날마다 가만히 붙드는 것을 고요히 붙잡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꾀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高山에서 뜻을 내었으나 끝내 시비를 떨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근래에 듣자니 屛山書院에서 뜻을 계속 내어 장차 是非의 顚末을 아마도 한 통의 기록으로 만들 거라고 하니, 참으로 그것은 심합니다. 이것이 과연 영원토록 전하여 지킬 만한 커다란 의리가 있는 것인지요?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이리저리 짜 맞추어 오랫동안 강습하다가 영원히 보존된 후에야 그치게 될 것인지요? 진실로 이와 같다면, 편하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요? 이에 또한 감히 문을 닫고 입을 다물지 못하겠기에 요행히 바라는 것은 그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저번 廟宇를 보살필 때 祠堂에서 말하기를 "위에서 비가 내리니 아래가 축축해지고, 기와가 빠지니 자리가 부서지네. 섬돌이 무너져 기울고, 서까래가 썩어 비틀어지네. 濂溪의 사당이라고 탈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10여 년이나 오랜 뒤에 白鹿書院의 손실도 반드시 많을 것이다. 모여서 是非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서원의 사무가 제대로 거행될 것이다. 그러한즉 뜻에 따라 고쳐나가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지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아, 나중에 올 是非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高山의 뜻은 실제로 알려져 있지만, 屛山의 뜻은 계속 드러나면서 점차 나아가고 있습니다. 屛山으로 말을 하면, 저쪽으로 나아가면서 조금씩 깎여나갈 것인데, 이 때문에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면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서로 격렬하게 들추어내서 가지런히 바로잡을 기약이 없다면, 우리 무리는 진실로 어떻게 합니까? 尊道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게다가 최근 몇 달 사이에 들리는 바로는 廬江書院의 祠堂과 齋室, 그리고 樓閣이 차례대로 정돈을 하는데, 유독 尊道祠에 대해서만은 감히 하나의 서까래도 움직이지 못하고 하나의 틈도 보수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찌 여러분의 뜻이 祠堂에는 없고 이 서원에는 있는 것인지요? 진실로 이 是非에 걸려들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즉 그 근심과 두려움은 단지 是非가 굴러가다 어긋나는데 그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우리 몇몇 선비들은 같은 道에 살면서 이 祠堂이 오래지 않아 쓰러질 것을 아는데도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 昌平의 祠堂은 100년이나 오래 전에 중건되었고, 武夷의 廟宇는 8세대 후에 증축되었습니다. 道理를 사모하는 정성에 예나 지금이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비록 여러분들이 치우친 사사로움에 제한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함께 이렇게 서로 버티는 것을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道內의 여러 君子께서는 이번 가을 아무 달 아무 날에 통지하는 글을 보내 廬江書院에 일제히 모여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크게 편하지 못한 것과 크게 옳지 못한 것을 철저히 깨우치게 하여 是非가 잘 화합되기를 기약합시다. 이렇게 되면 진실로 큰 다행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금까지 是非한 文字를 모읍시다. 그래서 오래된 것과 최근의 것을 막론하고, 또 이미 간행된 것과 간행될 것을 막론하고 없앨 것은 없애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도록 합시다. 그러한 후에 派任을 합석시켜 좋은 날을 정하여 祭需를 늘어놓도록 합시다. 이것은 廟宇의 重修를 위하여 결단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모름지기 굽어 살펴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載寧 李氏 門中이 東江書院을 거부하는 通文
다음은 통지하여 알려드리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한 道의 선비들 모임은 바로 禮節로 사양하고 서로 숭상하는 자리입니다. 설령 論議에 모순되는 일이 있더라도 각자 경계하고 권장하고 힘써 따라서 화합하여 이후 道理를 다하고 여러 사람의 마음에 복종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景山에서 제사를 모시는 날에 저희 일족 중의 한 사람이 정한 날 모임에 갔는데, 한쪽에서는 선배를 위하여 우러러 사모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랜 친구를 위하여 함께 축하를 하며 두 집안의 시비에 대해 수수방관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그 사이에 어찌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에 기울어짐이 있겠습니까?
당일 새벽에 참관한 사람의 말로는 자리를 걷어 올리는 조처가 이미 극히 막되고 괴악스러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한 자리를 마련하였으나, 저희 일족 사람은 늦게 들어 알고서 들어가 참관하였으나, 그 분위기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보지는 못했으나, 닥쳐올 이야기의 방향이 바로 처지를 바꾸어 보라는 말에서 나왔으며, 그 뜻이 마치 "모습이 이와 같다면, 비록 일을 당한 바로 그 집안으로 하여금 처지를 바꾸어 처리하게 하여도 태연히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며, 쓸데없는 사단을 일으켜서 큰 변을 조장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해로운 일이 되며, 핍박하는 말이 됩니까?
東江書院의 일에 이르러서는 우리 가문에서 사사롭게 민망하고 답답하여 개탄하였으나. 이제 처지를 바꾸어 말을 하면, 한 道의 사람이 빽빽이 모여 있는 속으로 칼자루를 쥐고 앞장서서 뛰어 들어와 머리채를 잡고 담장 밖으로 끌고 가며 주먹을 휘두르고 욕설을 하였습니다.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마지막에는 衣冠을 찢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儒林의 집회가 있은 이래로 이러한 극단적인 변괴는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일족의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핍박하는 말과 일에 해되게 하는 실수를 있게 하고, 진실로 부당하게 이와 같은 변괴를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원래 실수한 바가 없었는데, 예사로운 한 마디 말을 실언으로 트집을 잡아 그 자손 된 사람이 전에 없던 변괴를 나타내니, 바로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진 뒤에 남이 그 집안을 무너뜨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東江書院의 문을 닫고 닫지 않는 것에 대해 道內에서 다시 의논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자손 된 사람은 또한 무슨 낯으로 道內의 사람들에게 先祖의 일을 말하겠습니까? 또한 載寧 고을이 비록 바다의 한쪽 구석이라고 말하고, 우리 일족이 비록 심히 빈한하지만, 또한 관리의 반열에 있습니다. 스스로 듣기에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심지와 담력이 떨려서 끝까지 침묵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通文을 발하여 우러러 듣게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께서 굽어 살펴 바로잡아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李相郁, 李相垕, 李相侃, 李相華, 李躋榮, 李心燦, 李鉉德, 李壽華 등 도합 20명
같은 때 龜岡書院의 都色을 거부하는 牌旨가 있었다.
翊洞에서 東江書院을 거부하는 牌旨[丁巳(1857)年 윤달 일, 孫氏를 무뢰배로 나타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번 景山의 道會에서 孫氏들이 일으킨 변괴를 너 역시 보고 듣지 않았느냐? 여기에 집안의 公的인 일이나 私的인 일로 문중의 유생들이 모임에 갔었다. 그래서 분위기를 보니, 비록 정중한 의론이 있기는 하였으나, 간섭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어찌 무리지어 서있는 뒤쪽에 입을 다물고 발을 포개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모임을 파한 후에 처지를 바꾸어 보라고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저 무뢰배들이 처지를 바꾸어 보라는 말을 트집 잡아 무리를 모아 패거리를 지어 會中에 쳐들어와 입으로는 욕하며 대어들고, 손으로는 구타하고, 발로는 차면서 衣冠을 찢는데 이르렀다. 그날 일으킨 변괴는 비록 樵童이나 牧童의 무리라고 해도 이치를 거스르고 윤리를 문란케 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히 이와 같이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모임에는 모두가 士林이고, 간혹 벼슬아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 무뢰배들 역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易地[처지를 바꾸어보라]‘는 두 글자를 가져다가 남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는 근원으로 삼으니, 이치로써 분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저 무리들은 이것에 대해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각골명심하였기에 樵童이나 牧童도 하지 않는 변괴를 한 道의 사람이 빽빽이 모인 가운데서 저지르는가? 儒林의 모임이 있은 이후로 이런 극단적인 변괴는 있지 않았다. 아아, 東江의 자손 가운데 어찌 이 같이 무뢰한 자들이 있는가? 필시 하늘과 땅의 온당치 못한 기운이 東江의 뒤쪽에 모였을 것이다.
'易地[처지를 바꾸어보라]‘는 두 글자가 과연 남들이 싫어하고 꺼리는 말이며, 또 온화하지 못하고 거만한 것인가? 아, 참으로 분통한 일이다. 저 무리가 하는 바는 일찍이 이와 같이 사악할 것이라고는 헤아리지 못했다. 지금 저 무뢰배들이 하는 것을 보니, 東江이 지금까지 문을 닫고 버려진 것은 東江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저 무리들의 죄이다. 오늘 저 무리가 말하는 것으로는 무릇 儒林을 위하난 사람이라면 누가 기꺼이 東江을 의논해서 처리하겠는가? 東江의 문을 닫은 것은 또한 저 무리들이고, 훼손한 것 역시 저 무리들이니, 東江이 문을 닫은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또한 사람의 중대한 윤리 가운데 父子의 관계보다 중대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저 무뢰배들은 혹시 아버지가 있는 자들인지, 혹시 사람의 자식이 된 적이 있는가? 혹시 아버지가 있어 사람의 자식이 된 적이 있는 자라면, 남의 아버지를 욕하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인가? 남의 아버지를 상하게 하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가? 저 무뢰배들은 ……… 또한 천하의 자식 된 사람들에게서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이후로 禮義를 저버리고 道理에 닿지 않는 부류는 내버려두고 상대하지 않는 것을 이 牌旨와 같이할 것이니, 본 고을의 각 집안에 두루 보이라.
丙辰(1856)年 8월 일 : 道의 訴狀에 대한 監營의 판결문[모인 장소는 大邱 硏經書院이었다.]
臨川에서의 패악한 행동은 儒生들이 정한 벌칙에 따라 징계하면 족할 것이다. 근래에 선비의 풍조가 스스로 우뚝 서지 못하고 있으니, 도리어 어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에 갑자기 官府로 하여금 그 죄를 다스리게 하여 부득이하게 수색하여 醴泉의 선비를 붙잡아 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權久相는 스스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權仁夏는 자식을 대신 보내 訟事에 굴복하기에 오히려 참작해서 용서할 일이라 큰 벌을 주는 것을 피하고 내용이 과장됨이 없이 사실에 부합하는지에 힘쓰고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반을 용서하고 그 반에 대해 죄를 주었다. 이것은 또한 한 道의 營門에서 그 죄를 성토할 수 있고, 溪上 李氏의 뜻을 잘 보호하고, 많은 선비들이 연원의 道理를 높이 받들게 하는 것이 지극하니, 이 정도에서 그만두도록 하라. 반드시 네 명의 權氏에게 다 죄를 주고난 뒤에 그치고자한다면, 혹시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한 것은 없는가? 비록 이것보다 더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범죄자 중에서 또한 한 사람에게 벌을 주게 되면, 같은 일을 한 사람에게 모두 벌을 주어야 한다. 이제 한 가지 일로 두 사람에게 벌을 주었으니, 이미 벌을 준 것이 아주 지나치다. 소문에 전하는 바로는 반드시 네 사람에게 모두 벌을 주고자 한다고 하는데, 유독 선비의 여론이 사리에 어그러지고 과격한 것이 아니기에 또한 刑政이 잘못된 결정에 메이도록 많은 선비들이 위협하여 휘어잡고 뜻을 제멋대로 하여 형벌을 남발하게 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서로의 일을 오래도록 재촉한 것으로 말을 하면, 채를 잡고 북을 울리며 입으로 죄명을 부르짖어도 많은 선비들이 볼 수 없는 것이며,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맹세하고 선조로 증거를 삼아도 여러분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눈앞의 실제적인 경우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풍문이 전하는 것이 위주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인 때려 귀향을 보내는 형벌을 기약해도 결단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과 선비의 습속이 박정하고 성실치 못하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스승의 門戶를 받들고 선비의 나아갈 바를 바르게 하는 데는 한번 道에 호소를 하였다가 괴이할 것이 없을 듯 하면 얼굴을 맞대고 물어보라. 이와 같이 철저히 깨우친 이후인데도 다시 소란을 일으키면, 監營에서 마땅히 臨川의 모임을 먼저 바로잡고, 醴泉의 선비를 붙잡아 책망할 것이다. 李晩恩을 숨기고 막아주면, 뜻을 같이하는 사람의 죄가 될 것이다.
硏經書院 會所의 通文
삼가 생각건대, 臨川에서의 事變은 여러분들이 이미 충분히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다시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집안마다 의논하고 집집마다 이야기할 것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 한번 屛山書院과 廬江書院이 나누어 가진 이래로 비록 하나의 義理를 가지고 하늘과 땅에 세워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質正해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더라도, 모두 선후를 엿보고 승부를 견주고 헤아려 사사로운 뜻을 자행하고 멋대로 시기하고 혐의하고, 손으로는 거짓을 가리키고 입으로는 헐뜯고 비방하는 말을 내뱉으며, 어긋나는 말로 들추어 훼손하여 갈아 없애어 義理가 義理로 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40년이었습니다.
이에 우리들은 항상 통탄하며 가만히 지나온 내력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최근의 사변은 결국 저 무리들이 한번 험난한 때를 만난 것으로, 그 선조의 서원이 남에게서 욕을 듣게 하고, 그 祖上의 자손이 되어서는 그 조상과 스승의 혈통을 욕되게 하니, 참으로 애통합니다. 이것이 그 변괴입니다. 항상 이것에 대해 일컫는 것이 있으니, 金溪에 마음이 따르고 끌리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湖上의 李氏가 진심으로 하나의 牌旨를 스스로 내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臨川은 얼마나 깨끗한 처지이기에 어렵지 않게 물리칠 것을 북을 울려 알리고, 얼마나 험상궂고 패악한 행동이기에 도리어 하나의 천둥과 같은 소리로 일컫는단 말입니까?
아, 저 무리들 또한 일생동안 선생의 교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며, 선비의 반열에 넣어지고 선비의 모자를 쓰고 있는 부류로 일컬어진 것이 또한 오랜 세대일 것입니다. 그러한즉 비록 당파의 쌓인 습속과 이루어진 고질을 보호하려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본래의 태도를 감추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 祖上을 망각하고 선조를 더럽히는 구덩이에 빠진단 말입니까? 그리고 臨川의 변고를 아주 자질구례하고 변변치 못한 것이라고 말하니, 실정에 따라 똑같이 상대한 후에야 그친단 말입니까? 春秋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릇됨과 올바름이 나누어지고 주살함과 토벌함이 다른 것은 저절로 한권의 책인 春秋의 筆法에 있어 면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아, 우리의 道理가 쇠퇴한 것입니까? 春秋가 없어진 것입니까? 우리 당파의 변괴가 어찌 단번에 이런 극한에 이르겠습니까? 저희들은 근심스런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道會의 자리를 마련하여 金溪와 湖上에 벌을 주고, 뒤에 기록하여 붙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李晩慤에 대해서는 本家와 宗家에서 자리를 마련하여 宗家의 一門과 영원히 단절한다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陶山의 道會 날에 사람의 부류에 두기 어렵고, 저 범죄는 이것으로 그칠 수 없다고 하여 이번 道會의 자리에서 또한 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무 해 아무 달과 날에 있었던 사변의 전말과 아무개는 부추기고, 아무개는 변괴를 일으키고, 아무개는 스스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적어 한편의 처단한 사례를 만들어 陶山에 갈무리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나중에 의리를 따르는 君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여 是非를 가리도록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春秋의 義理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생각건대, 저 협잡하여 재앙을 즐기는 무리가 어찌 감히 다시 陶山과 가까이에서 나란히 하고, 士林에 종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여러분께서 헤아려 살펴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公事員 : 朴海運, 進士 金泰謨, 製通 : 鄭昌成, 李以謨, 寫通 : 李能魯, 崔潾, 曹司 : 孫相燮, 鄭健和
같은 시기에 虎溪書院이 硏經書院 都會의 會中을 거부하는 通文
삼가 생각건대, 선비이기에 선현을 받들고 道理를 위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밝게 헤아리고 확연히 맑게 한 자는 그것을 따르고 받드는 것이 바로 天理의 항상 됨입니다. 이 때문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다고 논쟁하지 않고 오직 道理가 있는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친한 이를 받드는데 감히 그릇된 자기의 사사로움으로 하지 않으며, 거만함을 뉘우치는데 만약 치우쳐 서는 것이 있으면, 곧 도리를 잊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 영남은 晦齋와 退溪 두 선생으로부터 儒學의 道理가 밝아지고, 門人 가운데 賢者가 그것을 이어받아 행했기에 儒學을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두 가문이나 후학이 우러러 받드는 것이 아니기에 또한 차이가 없으니, 어찌 피차의 사람마다 나누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嶺南이 수백 년 동안 하나의 도리에 전념하여 갈래로 나누어짐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래에 사사로운 뜻이 마구 일어나고, 비상식적인 의심이 크게 일어나 옛 문자 가운데 한 마디 말로써 輕重을 다투고, 하나의 글자를 두고 필요한지 불필요한지를 비교하여 아무 생각 없이 떠받치거나 들추어내고, 이치에 벗어나서 비웃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침범하여 사납게 구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또한 권세를 끼거나 굉장한 호기를 부려 조금도 敬畏하거나 敬虔하려는 뜻이 없으니, 어찌 우리 무리가 통절히 개탄하지 않고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屛山書院과 虎溪書院에서부터 오랫동안 버릇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니, 또한 하루아침에 나타난 까닭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권세로 심하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기교를 부리는 것이 없고, 지난번에 葛翁이 원통함을 벗어나게 하는데 다행히 힘을 입어 간혹 밝은 마음으로 풀어내려고 하니, 우리 嶺南人의 일에 누군들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대개 공평하게 넓히는 것을 돕고 공적으로 의논하는 것을 늘려 사사롭게 嶺南 안에서 은혜를 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무리가 된 사람들 역시 마땅히 공평하게 넓히는 것을 돕는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며, 叔向이 祁奚를 만나지 않듯 구분지어 처리하고 위하여 배품에 빛이 나고, 위하여 받음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무릇 어떠한 종류가 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부류입니까? 인연을 맺어 그것을 실마리로 은밀히 침범해 들어가고, 우두머리에 아첨하여 그것을 실마리로 승진을 구하면서 이것이 전 嶺南의 公論이니 조용히 복종하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면, 조금이라도 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음과 머리가 아파하며 더불어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대개 그 實情이 이렇게 추악하니, 또한 공평하게 넓히는 것을 돕는데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士林의 모임이라는 것은 스스로 차별을 이룬 지가 오래됩니다. 臨川의 모임은 본래 관계된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이 심정으로 미워하는 것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보다 심한 것에 이른 것은 또한 당일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醴泉 선비의 행동이 격앙된 마음에서 나와서 그랬다면, 반드시 그러한 정황은 아니었습니다. 그 萊令에게 이르러서는 속여서 물리치려는 것이 심했습니다. 무릇 萊令의 실수는 혐의스러운 일을 멀리할 수 없었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명예와 지위가 이미 걸려 있으면, 이것저것 생각하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세와 덕망이 이미 성대하다면, 당일에 바라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地處는 바로 우리 무리가 다 같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라 누군들 분개하고 안타까워하지 않겠습니까? 士林의 公論은 발해지지 않았는데, 자제들의 사사로운 분노는 갑작스럽게 격해졌습니다. 이쪽에서 옮기고 저쪽에서 깎아내며, 몹시 억누르고 업신여기며 사람들이 탐탁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屛山書院의 사람이 기회를 잡고 달려와 모이는 것이 마치 구렁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명색이 道會인데 遠近에 通文을 던져 보존해야 할 곳을 침범하여 욕되게 하면서 다시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아, 참으로 애통하였습니다. 저 무리들 역시 선비의 옷과 관을 갖춘 집단일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老先生을 존경하여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尙德祠 앞에서 전통이 있는 집안의 어진 사람에게 거만하고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 이와 같이 무엄할 수 있겠습니까? 시기하며 이기려 하는 것이 있는 것은 참으로 오직 屛銘[이것은 학봉집 부록 권3에 있는 「題金士純屛銘」을 말한다. 여기에는 堯임금으로부터 朱子에 이르기까지 道學의 연원을 기술하였다. 이 글을 退溪가 鶴峯에게 연원을 전수하는 뜻을 부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에 있습니다. 그리고 감히 老先生에게 몹쓸 짓을 하지 못하게 되니, 鶴爺의 소중함을 소중히 하는 것에 대해 닥치는 곳마다 화를 내고 해치려 하는 것이 투기하는 아녀자와 악독한 여자가 그 악독함을 멋대로 부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 무리들 모두가 식견을 이루지 못한 것을 또한 어찌 족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성서스러운 스승께서 顔子의 好學을 일컫고, 다시 지금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曾子가 道를 전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朱子가 大學을 서술하며 말하기를 "曾氏의 전함이 오직 그 근본을 얻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존재하는 두 가지 서술에 각기 무겁고 가벼움이 있겠습니까? 嶺南의 儒生들이 屛山書院의 賜額을 청하면서 올린 上疏文은 본래 龜窩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유독 陶山이 전하는 바를 얻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또한 어찌 厓老를 치우치게 높여 嫡子로 두었으며, 다른 현인을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선배들이 진술하기로 德과 地位가 같은데 있으면 각자 높아지게 되는 것에 대해 꺼리고 싫어하지 않으며, 사사롭게 지난 관례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鶴爺를 높이는 글자 하나라도 나타나면, 말의 기운과 낯빛이 업신여김을 드러내고 위협하는 말을 뱉어내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으니, 어찌 우리 선배들과는 다른 마음을 가지는지요? 게다가 屛銘은 鶴爺에게 준 것이니, 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屛銘에 대해 말하고자 해도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는 것이 얼마나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또한 科場 게시판의 글자 수로써 尊賢의 등급을 매긴다면 몇 글자가 써 있는지 저희들은 이전에 들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저 무리들은 이미 "등급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리석게도 謙菴이라는 위패를 …… . 그래서 분수에 넘치게 견준 것이라 여겨 돌아보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항상 드리는 祭祀에 異說로써 하여 멋대로 고쳐 하는 것은 저희들도 역시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다르게 하면, 文節公은 鄕賢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忘窩翁의 常享祝文은 丹溪書院에 봉안해야 합니다. 또 蒼雪翁에게 청하여 두 가지 說을 두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지금 분수에 넘치게 견주어 선현을 받드는 등급을 잊은 것으로 屛山書院의 사람들은 남을 공격하여 물리치는데 용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안에 이미 사례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 臨川書院에 다시 祭享하는 것은 진실로 한스럽게도 풍파를 진정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두려움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 하는 것은 또한 저 무리들에게 까닭이 있을 뿐입니다. 그 일로 분노를 쌓이게 했다면, 한 道의 선비들은 급히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나, 또한 어찌 저 무리들의 난폭함 아래에서 갑자기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말다툼을 일으키는 실마리를 가지고서 택한 좋은 날을 고치려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위패를 봉안할 수 있으며, 택한 날을 고치는 것은 봉안하는 것을 고치는 이치입니까? 속이고 희롱하는 하는 것이 크지 않습니까? 간혹 道에서 비록 저들이 도적이라고 말했지만, 일찍이 鶴爺를 향해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자한 입이 여기에 이른 것은 어찌 그렇게도 믿을 만한 구석을 가졌기에 意氣의 굳건함이 심한 것입니까? 저희들은 鄕會의 자리에서 크게 형적을 남기고자 하지 않고 獻官의 자리가 돌아오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탈이 없는 이것으로 핍박하여 내쫓으니, 저 무리들이 필시 오늘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大禮가 순순히 이루어지는 것을 내심 불쾌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醴泉의 선비가 이어서 일으킨 일로 마음을 먹고 뜻을 지어내었습니다. 어찌 오로지 萊令 때문에 공분을 발했겠습니까?
저희들은 남몰래 의아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몇 년 이후로 屛山書院 儒生들이 是非를 안정시켜 화합하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진심에서 나왔다면, 또한 鄕會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벌써 잊어버렸겠습니까? 아마도 스스로 뜻을 세워서 시작할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분명 근원적으로 지난 과오를 모두 버리고 포용으로 함께 구제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萊令에 빙자하여 한 말을 트집 잡고서 은연중에 한쪽에서 스스로 와서 복종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절교한 집안과 다시 합하라고 하는 것은 해당하는 사람에게 누가 됩니다. 뭇사람이 버리는 바가 되게 하여 거의 모두가 고개를 내저으나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이것이 이 앞의 형적입니다. 다시 가려 덮고자 하나, 요행히 바뀌어서 아첨하며 붙기를 바라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先祖를 잊고 이익을 쫓는 것이 어찌 鶴爺가 기대한 것이겠습니까? 저희들은 저 무리들과 함께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에 어그러진 通文을 대략 바르게 한 후에는 한번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臨川書院를 성토하는 변괴로 本孫이 부득불 나쁜 점을 뜯어 고치는 서로의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미 바르게 한 후에 道內의 여러 君子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여러 君子께서 굽어 살피셔서 가르침을 되돌려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硏經書院의 모임 자리에 이 通文이 도착하자 회원들이 또한 서로 모였다. 大邱 鄕校에서 李晩慤을 비롯해 蘇明, 金溪에게 벌을 가하였다. 李晩慤은 祖上을 망각하고 일족을 배반했기에 영원히 사람의 부류에서 내쳐졌다. 蘇明은 흉측한 牌旨의 자취가 드러나 처벌하였으나, 나머지 죄도 있었다. 金溪는 스승을 잊고 先祖를 욕보인 것을 자초한 것이라 벌을 깎아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