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丙辰(1856)年 8월 일
佳巖의 崔氏 門中에 보낸 東江書院의 牌旨
본 서원은 수백 년 동안 높이 받들던 곳이니 얼마나 중대합니까? 그런데 10여 년 사이에 겸손함은 떨어지고 서로 싸우고 다투는 풍조만 이루어 香煙이 그쳐 잡초에 파묻힌 곳이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위태로움을 느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데도 아직 外孫과 本孫이 이전의 견해를 고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 치의 情理와 禮儀도 없단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士林에 있어 불행이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비의 일은 오래되면 정해지고, 정해지면 안정이 됩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을 하면 정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미 정해진 의론을 안정되지 못한 곳에서 분란하게 하겠습니까? 이에 오는 18일 본 서원에서 오랫동안 드리지 못한 제사의 의식을 힘써 드리려합니다. 이러한 뜻을 각 문중에 두루 알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모이면 좋을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佳巖 崔氏가 龜岡書院을 거부하는 通文
저희들은 晦齋 老先生의 고을에서 태어났으나, 차마 愚齋翁으로 하여금 제향 하는 곳에 서원이 있으면서도 서원이 없는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시비를 할 때 저 사람이 "내가 옳다."라고 하면, 이 사람도 "내가 옳다."라고 합니다. 그러한즉 모두가 스스로 옳다고 하면 그릇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면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그른 차이이니, 어찌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을 기다린 후에야 변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에는 한결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간혹 본래 옳은 것의 옳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나의 옳음을 믿고 곧장 크게 불안한 곳을 건너며, 이것이 옳은 것이라면, 어찌 착함을 다하는 옳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본래 반드시 옳은 것의 옳음도 아니고, 생각에 혹시 마음으로 깨달아 그 옳은 것이 밖으로만 완전한 것에 있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바로 시비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사정을 대략 들었습니다. 대저 두 집안의 이 일은 진실로 하나의 대들보와 마룻대가 두 개의 먹줄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李氏로 말을 하면, 본디 부당하게 자신의 옮음만을 믿어 그 그릇됨이 세차게 일어나 크게 편하지 않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孫氏로 말을 하면, 비록 잘못 안 것을 옳다고 간혹 생각하기는 하였으나, 진실로 망령되게 천착한 형벌을 당하여서는 달게 받고 달게 깨달아 집요함이 극단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진실로 오늘의 東江書院을 보면, 강의 파도는 없어지지 않고 가을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나그네의 방황은 없어지지 않으니, 한숨짓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여기가 晦齋 선생 외삼촌의 곳이라면, 이것은 과연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즉 이것이 크게 편하지 못한 것인데, 하물며 자손이 된 입장에서 이것을 이루게 한 이유가 없지 않을 텐데 이러한 풍경을 감내한다는 것입니까? 다만 삼가 생각건대, 당초의 시비는 말하지 않는 가운데 돌아갈 곳이 저절로 있게 되니, 지금 말을 하는 것은 긴요하지 않은 간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선비가 되는 사람들 가운데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관을 쓰는 뜻은 결단코 편하지 않는 곳에서 예전부터 끝까지 침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팔짱을 끼고 보는 것을 스스로 편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韓非子가 말한 것 가운데 "알면서도 고하지 않는 사람은 어질지 못하고, 고했는데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미 이 고을에 있으면서 사실을 익히 보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어찌 "저들이 믿지 못하여 스스로 어질지 못한 罪科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먼저 헛된 이유를 드러내고 가지런히 마음으로부터 香을 피워 올려 여러 군자와 함께 敦敎堂에서 잔시중을 들며 일이 잘 되도록 변통하였으면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여러분께서 또한 이러한 말을 두 집안의 君子들에게 해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龜岡書院으로부터 원래의 통문을 다시 찾은 후에 龍山書院의 都色이 답한 사사로운 通文
보내온 통문은 佳巖의 각 집안에 보냈습니다. 그러고서 儒林의 논의를 분부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자기에게서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公共에 질문하는 과정에 대비한 것이기에 편안한 것과 편안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해 충분히 잘 의논할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받아들일 수 있으면, 公共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며, 내버릴 수 있다면, 公共으로부터도 내버려지게 되도록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두 사람이 내버릴 단서를 얼버무려 이렇게 해서 내버려지는 것은 아마도 公共의 의논에서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뜻을 堂上에 고합니다.
無忝堂 會中이 東江書院을 거부하는 牌旨
지금 듣자니, 남쪽의 여러 사람들이 본 서원에 와서 모여 수습할 계책을 세우려한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뜻입니다. 그러나 본 서원에서 일어난 말썽의 단서는 진실로 上樑文의 한 조목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상량문 속의 ‘淵源’이라는 두 글자는 退溪가 쓴 晦齋의 行狀에 위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癸巳年에 바로잡아 고친 것이 이것입니다. 최근에 고을의 道統論에서 지금까지 엄히 살피는 것 역시 이것입니다. 또한 본 서원에서 道南書院의 院長이 陶山書院의 일로 논박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즉 지금 본 서원의 수습책을 보면 상량문을 고쳐 바로잡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뜻을 公事員에게 고하니, 주인 앞에 소상히 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東江書院 會中이 牌旨에 답함[院長 崔濟民, 有司 權致昇]
良洞에서 내린 牌旨 가운데 대들보와 마룻대의 한 조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한갓 추를 매다는 것을 일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대개 義理는 하늘에 달려 있고, 公論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늘이 변하지 않으면 의리도 변하지 않고, 사람이 없어지지 않으면 공론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밝기가 대낮의 해와 같아서 모두가 우러릅니다. 그런데 귀하의 패지 가운데 넓은 견해가 이에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고집을 바꾸면 잘못을 고쳐 그 때를 얻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지요? 마땅히 돌이켜 하나의 대들보를 말없이 걸게 되면, 그것이 시비의 변치 않는 문서가 될 것임을 가리킬 것입니다. 반드시 편벽된 자기에게 통쾌하고자 한다면, 의리와 공론이 모두 어리벙벙하게 헤매는 처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본래 의리를 갈라지게 함이 없습니다. 의리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제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재하는 도리는 광명정대한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본 서원은 수백 년이나 오랫동안 神明께 고하던 곳으로, 진실로 영원히 부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피차가 비록 수천수만의 말을 하더라도 지난해 이외의 소식을 가지고서 이러한 뜻을 堂上에 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업무 분장을 처리한 후에 문중에서 佳巖을 물리칠 것을 연명한 편지
삼가 가을에 여러분의 체후와 일상생활이 평안하시다니 구구한 저희들의 마음에 우러러 위로가 됩니다. 사람이 일을 맡아 처리하는 데는 각자 집착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의 문중에서 최근 일을 맡아 처리하는 것은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힘으로써 이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東江書院의 문을 여는 것을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東江書院의 문이 만약 이와 같이하여 열린다면, 귀하의 가문을 기다리지 않고 열린 지가 이미 오래일 것입니다. 무릇 이 근원의 문을 고치고자 한 것은 우리의 가문이 귀하 가문의 10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정중히 겨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退溪가 쓴 晦齋의 行狀에 근본 한 것으로, 거짓으로 선현의 서원을 열고 닫으려는 것이 아니며, 구차하게 세월을 지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士林에서 바로잡아 고쳐줄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량문이 과연 바르게 고쳐질지 아닐지, 선비들의 논의가 하나로 귀결될지 안 될지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해당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하는 것은 비록 자세히 옳고 그름을 가려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귀하의 가문이 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장차 묻어둔 불을 부채로 바람을 불어넣어 이미 고르게 되었는데, 저들이 작대기로 마구 헤집는 것은 또한 반드시 孫氏들이 하는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通文의 말 중에 ‘是非’라는 두 글자에 이르러 우리의 가문에서는 남몰래 개탄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여기에는 본래 是非가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에는 본래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스로 어지럽힌 것입니다. 크게 편하지 않다는 것은 감히 儒林 간의 是非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법도에 맞아떨어지지 않은데다, 또한 ‘是非’ 두 글자로 바뀌어져 은연중에 저희들에게 일찍이 어떤 시비가 있는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行狀의 글 일부에 ‘淵源‘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면, 결단코 마땅히 이리저리 감추어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즉 저희들이 죽음으로 지키고 다툼을 벌이는 것은 단지 이러한 의리 때문일 뿐이니, 비록 귀하의 가문에서 하지 않아도 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東江書院의 會中에서 보낸 牌旨 가운데 하늘이 변하지 않고 사람이 없어지지 않으면, 公論은 저절로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러한 의리를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러한 의리는 한갓 저희들이 고수할 것이 아니라, 진실로 한 道의 士林과 한 고을의 여러 군자들이 엄히 지켜내고 엄히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무 까닭 없이 스스로 담당하며 한때의 조정하는 의론을 빌어 수십 년 간 고심하며 함께 지켜온 의리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어찌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선현을 받들고 도리를 호위하려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군들 없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성심으로 호위하려면 新安의 婺原에 거주해야 합니까? 아니면 서로 다른 데 있어야 합니까? 그러므로 귀하의 가문 여러분들에게 정히 바람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온갖 괴이한 것들이 거듭 일어날 때에는 역시 의지하여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한 차례의 행동은 평소 예사로운 생각 밖에서 나온 것으로, 儒林의 公議은 잠시 말하지 않고 그대로 두더라도, 저희들의 사사로운 분수에 있어서는 감히 끝까지 침묵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이에 삼가 생각건대, 우리 고을의 先父老께서 한목소리로 이 일을 바로잡는데 고심하셨으니, 여러분도 역시 어찌 중간에서 송구함이 없겠습니까? 귀하의 가문에서 이미 이 일을 짊어지셨습니다. 짊어지신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거듭 바랍니다.
崔氏의 답장 편지
지난번 저희들의 의견 가운데 한 가지 쓸데없는 것이 사람의 기운을 서늘하게 하기가 가을과 같이 하였습니다. 이에 겸손함과 정중함을 보여주시고 주의하라는 채찍질을 넉넉히 내려주시니, 진실로 학문과 견식이 높은 사람의 충직함과 순후함이 아니고, 만약 말만 아는 착함이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삼가 살피건대, 여러분의 체후가 한결같이 온화하다고 하니, 또한 관례를 벗어난 것도 모르고 축원을 고하였습니다.
대개 저희들이 東江書院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힘으로 하는 것이라 이르지 않고, 진실로 하는 것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의 문중에서 도리에 따라 명을 내려 처리하는데 어찌 조금이라도 직분에 넘치는 일이 있겠습니까? 退溪가 쓴 晦齋의 行狀은 꾸밀 수 없는 것이니, 단지 귀하의 문중에서만 진실이라고 가리켜 보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愚齋翁을 祭享 하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는 것도 비단 저희들 중에서 스스로 세운 의론만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들의 통문 중에 ‘是非’라는 글자에 있어서는 是非가 없는 곳에서 是非와 같은 것이 별도로 생겨났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깊이 개탄을 이루게 했다면, 정히 이른바 죄는 반드시 말이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진실로 말을 명확하게 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어찌 저희들이 어길 수 있겠습니까? 비록 쪼아대기는 했으나 스스로 도리를 해명하는데 있어 한 자도 되지 않으니, 아마도 침체되어 자취에 이르지 못했는가봅니다. 무릇 四端 가운데 지혜의 단서는 是非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도 義理의 다툼은 우리 士林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큰 중추적 요소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한즉 지혜로움과 지혜롭지 못함 사이에 다툼질의 단서가 되는 것이 과연 무슨 심한 말이 되겠습니까? 귀하들이 제시한 이것은 본래 是非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언제 是非가 있다고 하였습니까? 이것의 의리가 해와 같이 밝다는 것을 알고 곧장 잘못되게 대답할 수 없어 우리가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여기에서 의리로 고집하는 이유에 힘쓰지 않고 끝내는 단서가 되는 곳을 다투려 나누어 말해야 하나의 是非가 되었습니다. 그러한즉 오늘 갑자기 본래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어지럽혔다는 것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의리로 일을 행함에 있어 만약 은근히 아래에다 감추어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누워서 침을 뱉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귀하의 문중에서 보기에 이렇게 어물어물한 말을 하는 것을 오히려 마음에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본 서원에서 정중히 겨를이 없다고 말을 지어 올린 것에 대해 진실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이에 대해 또한 의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상량문이 과연 고쳐 정해지고, 선비들의 여론이 과연 하나로 돌아갈 것인가?"라고 말하고서, 또 "묻어둔 불이 이미 고르게 되었는데 파란을 일으킨다."라고 한 것은 무슨 말씀입십니까? 의리상으로 거기에 과연 갈라지는 말이 있습니까? 여러분께서도 시험 삼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 鄕道가 되는 옛 선비들의 의론은 도끼보다 삼엄한 것인데, 오직 상량문 때문에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우리 가문 통문의 말 중에서는 묻어둔 불을 말하지 않았고, 東江書院 會中의 牌旨 가운데 하늘의 義理와 사람의 公論에 대해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문중에서 묻어둔 불을 이미 평정하였다면, 평정한 후에 하나의 상량문에 융통성 없이 집착해서 말하는 것은 지붕 위에 지붕을 더하는 것으로, 자기에게 있는 부채로 바람을 불어넣어 자기의 이름으로 헤집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즉 도중에 알지 못하는 때이니, 바로잡아 고칠 날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비록 무한한 세월이라 묻어둔 불이 나중에 그칠 때가 있기는 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義理에 마땅한 것이 바로 儒林이 함께하는 義理일 것입니다. 그른즉 지금의 是非는 바로 두 집안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是非입니다. 저희들이 어찌 여기에 한 가지도 해당되는 것이 없는데, 갑자기 이것을 하겠습니까? 어찌 연고가 없으면서 거짓되게 조정자를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老先生이 쓴 行狀에 허물이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의로움이란 일의 마땅함입니다. 愚齋翁을 위하여 수백 년 동안 祭享해 오던 父兄들의 장소로 그 지을 때의 마땅함을 얻었다면 합당한 것이니, 어찌 愚齋翁의 후손을 위하여 그 사이에 祖上을 세우겠습니까? 크게 공평하고 바르게 중심을 잡은 것은 마땅히 크게 공평하고 바르게 중심을 잡을 뿐입니다. 원래 믿지 못할 기세에 의지하고 기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朱子를 사랑하는 사람은 朱氏 姓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니, 현인을 사모하는 바는 동일하니, 어찌 곧장 (朱子의 고향인) 新安의 婺原를 언급하며 특별히 사사롭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예전에 저희들의 의견이 바로 도내의 의견이라고 하였으니, 자손으로 공격하여 外家의 先賢을 홀로 저버린다고 누가 기꺼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사실 사람들로 하여금 변할 수 있게 할 힘이 없으며, 결단코 일의 마땅함으로 스스로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볼 것이니, 또한 어찌 다시 이러한 지위에서 분석을 일삼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책무를 맡았다면, 오직 두 집안이 욕망으로 이기는 것을 없애는데 있을 뿐입니다.
9월 1일 :
崔濟民, 崔元復, 崔濟健, 崔濟燮, 崔濟敦, 崔晏翼, 崔世震, 崔世器, 崔光壽, 崔台壽, 崔鉉升, 崔鉉九 외 29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