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서원의 儒生인 幼學 李達祥을 비롯해 權鳳運, 李晦脩가 監營에 올린 訴狀
[7월 25일] 巡察使는 洪說謨였다.
삼가 생각건대, 본 고을의 玉山書院는 바로 선대의 賢人이신 文元公 晦齋 선생을 主壁으로 祭享하는 곳입니다. 대개 본 서원을 창설하려고 계획한지가 벌써 300년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위로는 朝廷을 비롯해 監營와 경주부(本府) 그리고 아래로는 벼슬이 없는 선비와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높이 받들어 존경하고 추앙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여타의 서원과 달리하는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진실로 晦齋 선생은 바로 우리나라의 朱子이시니, 서원의 오랜 규약은 특별히 공경하고 존중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지난 5월 15일 향례를 드릴 때 한 고을의 新鄕이 무리를 이끌고 서원에 난입하였습니다. 그 고함소리와 기세가 어찌나 괴상망측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소식을 듣고 곧장 일제히 나아가서 그렇게 온 까닭을 캐어물었습니다. 그러자 新儒들은 크게 화를 내고 소리 지르며 "조정의 명령이 내려졌는데 본 서원은 어찌 유독 받들어 행하는 도리가 없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처음에서는 공손한 말로써 깨달아 알도록 타이르고, 도중에는 의리로써 분석을 해주었으며, 나중에는 일부 先賢이 만드신 규약을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거듭 알아듣도록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辛在鳶을 비롯한 孫時夏, 孫世麟, 李奎永 등 네댓 명이 (조정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써 자못 위협하고 을러메었습니다. 저희들은 삼가 얼굴빛을 바로하며 "이것은 어찌된 망발인가?"라고 하였습니다. 新儒들과의 소통은 이미 癸未年에 있었다. 그런데 新儒들은 또한 본 서원의 규약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戊申年에 올린 상소문 가운데 玉山과 陶山 두 서원을 특별히 거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가을 임금께 올린 글에 이르러서는 임금으로부터의 처분이 단지 벼슬길 한 조목에만 소통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체 벼슬길에서만 요행히 등용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한 가지로 入院錄에도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조정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 됩니까? 벼슬길과 儒學界는 진실로 같은 사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벼슬길을 볼 때도 홍문관의 관리로 선발되는데 후보자로 천거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太學은 한 나라 사대부의 모범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또한 나란히 허통하여 뒤섞여 있지 않으니, 新儒들의 지금 계책은 생각에 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법도로써 책망하니, 그 자리에서 무섭게 협박하여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3개월 동안 매달 두 차례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세상 도리의 극단적인 변화이며, 풍습의 교화가 크게 막힌 것입니다. 저희들은 모두 본 서원의 선비들인데, 이미 힘과 기세로써 저들을 대적할 수가 없으며, 또한 의리로써 풀어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지금 풍속의 교화를 주관하는 군자에게 일제히 소리치고 우러러 부르짖으며, 그 참작하여 처리해주시를 기다리니, 합하께서 자세히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대개 玉山書院의 院規와 學令은 退陶 文純公 李滉 선생께서 강론하여 정하신 것입니다. 文元工의 神主를 모시는 서원으로서 文純公이 강론하여 정하신 규약을 지키려 하는데, 비슷비슷한 條例에서 어느 것이 근엄하지 않으며, 어느 것이 공경스럽고 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선비를 추천하는 한 조목이 제일 막중하고 참으로 엄한 규약입니다. 대개 선비를 추천하는 법은 반드시 士族 가운데서 취하되 門閥로 지위와 명망을 갖춘 사람으로 公議에 따라 取捨가 정해집니다. 취사의 例는 반드시 三參을 위주로 합니다. 먼저 父參을 보고, 다음으로 母參을 보고, 또 다음으로 妻參을 봅니다. 三參에 흠결이 없는 후에야 바야흐로 入薦이 허락되고, 入薦이 된 후에야 바야흐로 서원의 임원에 통과됩니다. 그래서 圈點하는 가운데 만약 三參 중 한 가지라도 庶子의 부류에 범해지는 것이 있으면, 비록 선생의 후예이고 높은 벼슬의 명망 있는 집안이라도 물리쳐 院錄에 함께 거론되지 않으며, 저절로 서원의 임원에서 제외됩니다. 이것이 바로 金石과도 같아 고칠 수 없는 법이며, 본 서원이 300년 동안 준수하여 바꾸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 1826(丙戌)年 서원 아래에 거주하던 선생의 庶孫들이 소통 때문에 분란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대저 선생의 庶孫들은 여타의 新儒들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림에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고, 당시 본가 또한 간절히 생각하는 도리가 있어서 현인이 제정한 규약 가운데 일부만을 바꾸었을 뿐 다른 것들은 뒤바뀌지 않았습니다.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에 있는 監營의 敎示 가운데 "玉山書院는 더욱 다른 서원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라는 말, "추천의 규약은 진실로 훼손하기가 어렵다."라는 말, "선대 현인의 계율이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 되니, 비록 전후에 조정의 명령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억지로 행하게 하기가 어렵다."라는 말, 그리고 "서원의 사태는 향교와 비교해서 公私의 다름이 없지 않으니, 진실로 법령으로 일을 처리하기가 어렵다고 하시며, 끝내 그 사이에 융통성을 둘 수 없다면, 이것은 다시 의논할 수 없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뿐이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저희들로 하여금 先賢의 규약을 생각하지 말고 가볍게 스스로 훼손하게 하신다면, 어찌 선생의 庶孫들과 소통을 허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렵게 이것의 死守를 위하여 30년 동안이나 오래 피를 흘리며 다투었습니다. 지금 신유들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 서원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 관할 고을에 訴狀을 올립니다. 저희들이 그 訴狀의 말을 구해 보려하면, 처박아두었다고 말하고는 감추어두고 내놓지 않습니다. 단지 訴狀 속에서 어떤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소리로 誣告하고 있는지를 모르며, 합하께서 판결문으로 교시를 내리신 것은 일찍이 전해지는 소리로 들었을 뿐입니다. 무고하는 말은 집안에 맡기시고, 서원의 일은 公議에 내어주십시오. 그렇다고 閤下의 교시가 어찌 정대하고 엄명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公議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온 세상이 같이 그러한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전체 영남 70 고을에서 선비 복장을 한 사람들의 의론 가운데 그 누가 "위대한 先賢이 강론하여 정한 규약을 훼손하여 庶子의 부류들과 소통을 허해야 한다."라고 말하겠습니까? 大君子의 한 마디 교시는 정히 기미에 앞서 미리 판단하여 엄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저 新儒의 무리들은 또한 마땅히 생각을 고쳐 숨을 죽여야 하고, 두려워하고 삼갈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애써서 몇 십 몇 백 명씩 무리를 지어 향교를 장악하려고 계책을 숙의하고, 西岳書院을 위협하여 빼앗으려고 수단을 부립니다. 동서로 모였다 흩어지고 좌우에서 위험한 말로 겁을 주는데, 누구는 오는 초하루 향례를 드릴 때 일을 일으킨다고 위협하고, 또 누구는 8월 大饗 때에 변란을 일으킨다고 두렵게 합니다. 저희들이 비록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감히 예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거지를 보면 또한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한 고을의 사림이 바야흐로 두려워 겁을 먹고 누가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의 백년을 보건대, 중요한 곳에서 소란이 일어날 기미가 조석에 박두하였습니다. 가을의 丁日에 제사를 드릴 때 경건한 마음으로 일을 치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작은 걱정거리로 간주하여 금하여 막을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閤下께서는 國學의 소중함을 體認하시고, 先賢이 정하신 규약의 엄격함을 생각하셔서 전후로 서원에서 못된 행실을 부리고 監營과 경주부(本府)에 거짓을 꾸며내는 자에게 특별히 엄한 징계를 내리주십시오. 그리하여 서원의 시끄러움이 저절로 사그라지고 선비들의 의론이 펴질 수 있게 해주신다면, 본 서원에 참으로 다행스럽고, 斯文에도 참으로 다행스럽겠습니다.
訴狀에 대한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먹지 않는다. 발로 차서 주는 물건은 거지도 오히려 먹지 않는데 어찌 들추어서 취할 수 있겠는가? 사물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爵位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반드시 다투고자 하는 마음은 반드시 작위를 위하는 것에서 나오니, 힘으로 취하는 것을 또한 작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힘으로 취하면 어찌 작위에 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향교와 서원은 바로 예의로써 사양하는 곳이다. 그런데 예의로서 사양하는 풍조는 없고 다투는 습속만 있어 원근에서 해괴한 소문의 일이 이르고 있다. 新儒들이 하는 것은 진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니, 또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곧 불러서 알아듣도록 타이를 것이다. 그래도 만약 예의로써 사양하는 교시를 행하지 않고 다시 막되고 괴악한 일이 있으면, 또한 꾸짖기만 할 수 없고 선비로서 마땅히 특별히 엄하게 처결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잘 알아서 먼저 스스로 행하는데 힘쓰고 나중에 公議를 기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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