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동년(1851) 8월 20일
鄕校 會中이 玉山書院에 맞서 단독으로 申飭하다
삼가 생각건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내려주신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타고난 떳떳한 마음을 받았으니, 三綱五常은 이로 말미암아 우뚝 서고, 四端七情은 이것에서 발현하게 됩니다. 무릇 血氣를 가진 사람이라면 임금과 부모를 받들고 친하게 하는 것을 알지 않음이 없으며, 조금이라도 知覺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사물의 변통을 통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아래에서 관직을 받아들이는데 막혀 답답한 기색이 없다면, 멀고 가까운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지나는 곳에 오묘한 敎化가 있게 되는 것이 바로 人道와 人事의 지극한 것입니다. 우리 동방의 땅은 본래 예의의 나라이며, 또 仁者와 賢人의 교화를 입었으니, 많은 선비들이 관계한 것 가운데 太學보다 큰 것이 없고, 선현들이 거쳐 간 것 가운데 書院이 세워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동서의 강당에서는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리고, 선비의 복장을 하고서 제사 받드는 일을 익힙니다. 때로 圃隱 鄭夢周 先生이나 益齋 李齊賢 先生과 같은 사람이 있어 師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揖讓으로 받들어 인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잡아 방해하거나 밀쳐 막는 것을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王朝에 이르러 간악한 사람 徐選이 常道에서 벗어난 의론을 부르짖으며 이끌어내고, 晉山 姜希孟이 다시 道理에 없는 말을 엮어서 한 나라의 반이 되는 庶子라는 이름의 선비들로 하여금 수백 년 동안 억울하게 가로막히는 무리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는 듣지 못한 일이었으며, 祖宗 때는 있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꾸며낸 것을 지키려 입을 막는 것은 물길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려우며, 韓侂冑가 朱子學을 금하게 한 것은 사람을 벼슬에 쓰지 않게 하는 것보다 가혹한 것입니다. 그리고 天倫을 깨뜨리고 人道를 끊어 없애버리는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어찌 君子로 세상을 탄식하는 때가 아니며, 뜻있는 선비가 괴로워 눈물이 가득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아, 우리 宣祖大王께서 처음으로 소통을 허하라는 교시를 내리면서 "해바라기가 태양을 우러러보면 곁가지라고 가리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仁祖 때 또 교시를 내리면서 "三曹의 각 관아는 재주에 따라 후보자를 추천하라."고 하셨습니다. 肅宗 때에는 상례를 따르지 말라는 敎旨가 있었고, 英祖 때에는 앞으로는 평탄하여 막힘이 없을 것이라는 批答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름난 큰 학자들이 뒤따라 임금의 뜻에 우러러 답하여 양기가 발하듯이 의론들이 일어났다. 晦齋 李彦迪 선생께서 일찍이 "서얼의 벼슬길을 틀어막는 것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文烈公 趙憲 선생께서는 "전적으로 관직에서 서얼을 뿌리째 뽑아버렸으면 李仲彪의 무리가 세상에 쓰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西厓 柳成龍 선생은 문벌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文正公 宋時烈 선생은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祖宗의 제도가 아닙니다."라고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였습니다. 仙源 金尙容 선생은 "예전의 폐습을 통렬히 뜯어 고쳐야 합니다."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靜庵 趙光祖를 비롯해 大憲 李仁亨, 梧里 李元翼 등 여러 선생들 역시 소통에 간절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더 넓은 세상 속이나 유유한 바다 안에서 모두 한 임금의 신하이자 백성이며, 또한 많은 先賢의 자손이라면 사랑해야 할 사람은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선조를 생각하면 우리 선조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徐選의 무리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고, 姜希孟과 같은 부류가 또한 오늘날에 있다면, 벼슬길을 막는데 조정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먼저 의론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임금의 교시가 엄격하고 분명하다는 것을 널리 여쭈고, 조정의 의론이 정성스럽고 간곡하다는 것을 두루 고합니다. 그래서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그 듣는 것이 같을 것이며, 비록 지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모두 환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차츰 소통이 허하게 될 날을 기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심입니다. 무릇 院祠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바로 儒生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으로 또한 선비의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교화의 근원이 되는 鄕校에서 이미 소통이 되었으므로 각 書院과 각 祠堂에서는 新儒들을 배척할 수 없습니다. 享禮와 제사에 한 사람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임금의 批答이 새롭게 내려지고 묻고 상의하여 그 의견이 모두 같아서 陵寢에 獻官의 所任이 소통되고, 家廟에 뒤를 잇는 순서의 법이 정해졌습니다. 저희들의 얕은 생각으로 나라 임금의 사당에 이미 참여하여 제물을 올릴 수 있다면, 시골 賢人의 서원에서 반드시 적통의 순서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뒤를 잇는 차례라면 儒林에서 아마도 구애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무릇 여러분들이 거짓 없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미 조정의 명령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한즉 사당과 서원에서 그것을 본받아 소통을 허하여 마땅히 저희들의 간곡한 통지에 앞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머뭇거리며 밀쳐내어 앉아서 날짜만 보내는 것은 혹시 여러분이 의논하여 일치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조정의 명령을 받들 뜻이 없는 것인지요? 만약 조정의 명령을 받들 뜻이 없다면, 저희들의 억울한 아픔은 이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승에서 오르고 내리는 先賢의 혼령께서 조정의 명령을 막아 그치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또한 어찌 어두운 저승에서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저희들이 소통되고 막히는 것은 운수의 순환과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금년에 敎示가 내려진 후에 바람은 나뭇가지를 울리지 않고 비는 흙덩이를 무너뜨리지 않아 오곡이 잘 익고 만물이 잘 번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임금의 답답함을 소통시키는 敎化에 하늘과 땅이 감응한 조화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시절의 氣象을 관측하고 때의 변화를 완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전의 階限[품계에 제한을 둔다]이라는 두 글자에 다시 구애가 된다면, 마른 풀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는 따뜻한 봄날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 올린 상소 뒤에는 階限의 구별이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니, 우리나라의 향교와 서원, 그리고 사당이라면 아마 소통을 허하는데 차이가 없을 것이니, 다른 고을의 눈치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여러분께서 헤아려 살펴주신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辛仁輔 李基肇 崔世觀 李圭燮 金最說 孫世觀 權學悅 韓相良 孫星赫 崔世夏 金最永 鄭斗一 李奎永 金永熙 李魯冕 鄭憙 李寅和 朱陽復 孫宙敏 孫時侃 權仁錫 崔世彦 韓錫璉 辛載鎔 李圭祥 李世輔 金宰坤 權必? 李浩錫 李錫魯 鄭志韶 등
1852(壬子)年 봄에 新儒들이 또한 西岳書院을 탈취하여 李綺壽를 새로 임명하였다. 당시 本孫을 방패삼아 칼을 빼어들고 죽기로 맹세하여 막아내지 못했다. 끝에 가서는 官家의 金穰根이 西岳書院을 도와줌으로 해서 마침내 新儒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 후 전해 듣기로 또한 玉山書院의 牌旨로 시끄러움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여 무리를 추려 모아 이름 아래에 돈을 배정하니, 경주의 남쪽과 북쪽이 서로 호응하여 기세가 대단히 두려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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