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8월 17일 맑음
이날이 大祭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新儒와 舊儒를 막론하고 피차 모여들었다. 거의 1,000명에 가까웠는데, 舊儒가 200여 명이고, 新儒가 700여 명이었다. 다만 저들 사이에 전파되고 있는 위협적인 말과 기미를 보면, 아마도 안전하게 大祭를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會中에서부터 文報를 엮어 경주부(本府)로 들여보냈다.
文報는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에서의 모임이 지금까지 7차례에 이릅니다. 지난 번 사림의 이어지는 오는 모임에서 반드시 新儒들의 큰 변괴가 있을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있어서는 大祭가 임박하여 비록 저들의 무리가 염치가 없는 줄 알면서도 뛰어다니면서 시중을 드는 것이 오히려 감히 다른 때와 같이 크게 무엄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름의 향례를 드릴 때부터 저들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孫龍庄과 孫時夏 두 사람이 돈 20꿰미로 쌀을 사서 서원 아래에 운반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동서남북에서부터 오는 자가 무려 수백 여 명이었습니다. 우선 오늘 저녁에 도착해서 祠堂과 齋室의 방에 나누어 거처하는 것을 보면 또한 그 소문이 분명하고도 분명합니다. 그러고도 뒤따르는 자가 장차 6~700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헛말이 아닙니다. 대개 이전의 저들은 여러 차례 향교에서 모일 때 골라 뽑은 일꾼이 60명이었으며, 각 일꾼마다 10명씩 거느렸습니다. 大祭 때 일제히 도착해서 변란을 일으키기로 약속이 되었다면, 그들이 배치하도록 계획한 15명으로 무리를 이루어 제사의 예법이 거행되는 곳에 길게 내어몬다면, 3일 동안 재계할 때 어떤 모양의 변괴가 어느 자리 어느 사람에게서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선생의 고향에서 나고 자라 우리 선생을 높이 받들고 우리 옥산서원을 높이 섬겨온 것이 지금까지 300여 년이나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렇게 이전에 없던 일을 만나면, 가슴에 활을 맞고 종아리에 몽둥이질을 당해 구차하게 저 한 몸을 위한 계책을 도리어 감히 근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大祭에 이르러 예절과 같이 제사를 지낼 수 없고, 또 혹시라도 執事 여러 사람이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서 大祭를 폐하여 빠뜨리게 된다면, 향후에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단지 편안하지 않은 것뿐만 아닐 것입니다. 이에 감히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밤새 급히 달려가서 알려드립니다. 엎드려 빌건대, 특별히 주변의 사람을 골라 보내주셔서 미리 징계하고 제지하여 편안히 大祭를 지내게 해주십시오.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사전에 題飭하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 엄격해야 할 뿐만 아니다. 그러나 이런 번잡함과 다툼이 있다는 것이 극히 놀랍다. 하물며 지금은 大祭로 중요함이 아주 특별하다. 그런데도 체면과 예절을 생각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의 부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별도로 將吏를 파견하여 그 못된 행실을 저지하고 主犯과 從犯을 잡아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출동한 사람은 將吏가 2명이고, 羅卒이 5명이었다.
出使將校가 전하는 명령은 다음과 같다.
玉山書院에서 지내는 秋享의 儀式이 이제 막 致齋하여 거행하려 하였다. 그런데 듣자니, 新儒들이 齋戒하는 곳에 난입하여 제사의 거행을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帖諭로 깨우쳐 바로잡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將校를 보내 못하도록 단속하였다. 그런데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고 스스로 徒黨을 이루어 齋戒하는 곳에 모인 사람이 4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선비가 아니며, 분란을 일으키는 부류로 會中의 허다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똑같이 문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주도한 우두머리 세 사람은 즉시 잡아서 법에 비추어 엄중하게 처단할 것이다. 그리고 일이 시급하고 막대하니, 거행하는데 조급히 하여 잘못되거나 어긋나는데 이르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날 해가 저물녘에 李眞安이 그 무리를 이끌고 부엌에 난입하여 마을사람 한 명을 끌어내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욕을 해대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會中의 여러 사람들이 서둘러 부축해 나왔다. 그리고 또 文報를 지어 경주부(本府)에 들여보냈다.
文報는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의 大祭가 이제 막 齋戒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新儒의 무리들이 이쪽저쪽에서 갑자기 모여드니, 그들이 몇 백 명이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강당과 마루방, 그리고 兩齋 앞의 누각에 모여 서있어서 자리를 마련하여 공식적으로 사무를 맡아 일을 처리할 사람들을 안배할 여지가 없어 짐짓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新儒의 무리가 한 달 전에 監營에 訴狀을 올린 일로 갑자기 바람을 일으켜 鄕儒인 狀頭의 일족을 쥐어박으며 내쫓아서 한 사람이 상투를 잡고 옆구리를 걷어차며 방과 齋舍에서 문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기가 막혀 혼절하여 쓰러진 형상이 장차 그 생명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 서원의 儒生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입하여 힘을 다해 구조해 내어 겨우 서원 근처의 집으로 탈출하여 이제 막 치료를 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경에서는 공식적으로 마련된 직책을 개설할 도리가 없으며, 또한 致齋를 드릴 가망성도 없는 것 같으니, 막중한 大祭가 어찌 의식대로 안전하게 행해지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저희들이 나약하고 변변치 못하며 정성이 모자란 죄가 아님이 없기에 황송하고 군색하여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國學의 大祭는 관계된 것이 매우 중요한데 피차의 주먹질과 발길질로 시끄러움이 일어나 마침내 거르고 빠뜨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즉 일이 있는데도 들림이 없는 것으로 거듭 죄를 얻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감히 앞선 통보에 대한 돌아오는 교시를 기다리지 않고 기호를 보고 통보를 드립니다. 엎드려 빌건대, 빠르게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文報에 대한 판결문은 잃어버려서 베껴 쓰지 못했다. 관청으로부터 또 將吏 3명과 羅卒 15명을 보냈다.
이날 오후 院長이 서원에 도착했다. 자줏빛에 金帶를 늘어뜨리고 있어 좌중의 광채가 배나 더했다. 차를 드린 후 잠깐 사이에 날이 저녁 무렵이 되었다. 강당에 공식적인 일을 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회원들이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았다. 밖에는 또 新儒 세 사람이 모여 서 있다가 갑자기 좌중으로 들어와 함께 앉았다. 公事員[李彛祥과 李在進]이 자리를 나간 후에 저들이 원장을 향하여 여러 차례 변통하여 처리해 줄 것 등의 말을 진술했다. 그러나 원장의 답변은 끝내 규약을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들은 또 公事員에게서 자기들의 到記를 주며 섞어 넣게 하고, 執事의 말에 자주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또한 장부를 나누어주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執事의 이름을 기입한 패를 걸려 할 때는 밖에 있던 新儒들이 함부로 版木을 가로채고서는 거기에 붙은 종이를 찢어버렸다. 좌중이 가지런히 앉아 있는데 재지기를 부르더니 자리를 그친다고 고하게 했다. 갑자기 심한 분란을 일으키며 좌충우돌하자 세 獻官[初獻官은 參判 李孝淳이고, 亞獻官은 校理 李凝祥이고, 終獻官 承旨 李晉祥이었다.]이 마침내 上房으로 들어갔다. 저들은 빙 둘러싸 울타리를 만드는데 소란이 일어나자 한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이때의 분위기는 곧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았다. 이때 제사의 물품들이 이미 內松坊에 이르렀으나, 서원 안의 기미가 마치 그물이 뒤엉킨 것과 같았다. 그래서 祭需를 공경하게 늘어놓는 절차 등은 실로 거행할 틈을 내기가 어려워서 洞任을 불러 架家를 짓게 하고, 守直이에게는 밤을 새워야 한다는 뜻을 분부하였다. 초경쯤에 또한 文報를 쓰게 된 사유를 갖추고 경주부(本府)에 문보를 들여보냈다. 이경쯤에 이르러 시끄러운 단서들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러나 막중한 祭需는 길가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회원들이 다시 의논하여 亦樂門 밖에다가 공경히 늘어놓았다. 新儒들 가운데 두건을 갖추고 나란히 서있는 사람이 10여 명에 이르렀다.
文報는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세상이 그릇되고 풍속이 나빠져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어떻게 오늘과 같은 본 서원의 事變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희들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나 文報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將吏를 내어보내 못된 행실을 부린 자를 붙잡으라는 엄한 교시를 삼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낸다던 將吏가 날이 저물어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도중에 지체하는 것이 어떤 연유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막중한 祭需가 도착해서 공경히 늘어놓는 등의 절차가 참으로 시급합니다. 그래서 날이 저물녘에 享禮를 진설하는 執事와 公事員의 자리를 비롯해 獻官 이하 수십 여 명의 참여자들이 차례로 정한 자리로 나오고, 板木을 벽 위에 걸었습니다. 그러했을 때 이전에 말한 孫龍庄을 비롯한 辛天應, 孫深彦의 무리가 그 일당 500~600명을 이끌고 와서는 여러 겹으로 에워싸며 섰습니다. 그런데 首席인 李參判은 바로 退陶 老先生의 후손으로, 지위가 鄕宰에 올랐으니 연세와 덕망이 어떠하며, 체면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위협하여 휘어잡으려다 나중에는 공갈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벽에 걸린 막중한 執事의 板木을 조각조각으로 부셔버리고, 수석의 姓名을 큰소리로 부르니,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더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장서서 붙잡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틈을 타서 끌어내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창과 문을 때려 부수며 首席의 네 다리를 찢어 죽인다는 그 모욕하는 말이 溪山에 진동합니다. 저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내서 겨우 맞고 끌려가는 것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本孫의 의관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뽑혀나간 것은 낱낱이 진술하기가 어렵습니다. 公的인 일을 맡아보는 鄕儒는 사방의 산으로 쫓겨나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본 서원에 변란이 있은 이후로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망측한 광경입니다. 이러한 것은 짐짓 말하지 않더라도 막중한 祭需가 松坊에 당도했으나 犧牲과 찬거리를 관장하는 여러 집사들을 이미 충원할 수 없으며, 세 獻官 역시 문밖 한걸음 거리에 공경히 늘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祭需라면 잠시 松坊의 주막에 쳐진 천막 속에 모셔두었다가 本孫이 마을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것을 주어 가져가 지키다가 처분을 기다리게 할 계획입니다. 다만 이러한 연유로 밤을 새워 급히 달려가 알리는 것입니다.
文報에 대한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막중한 祭需가 아직도 서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니, 祭享의 일을 의식에 따라 거행할 수 없겠구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못된 행실을 하는 것이 어찌 이런 극단에 이르는가? 또한 하나의 괴변이로다. 文報 가운데 세 사람은 우선 급히 잡아 보낼 것이며, 그 못된 행실을 따라한 자는 그때그때 붙잡아 오라. 전후의 將吏가 꾸물거리다가 제때를 놓치고 아직도 거행하지 못한 형상이니, 다만 우선 별도로 더해서 들르게 할 것이다. 붙잡은 여러 사람은 먼저 즉시 두루 알려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하고, 저간의 사정은 소상히 보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出使將吏가 전하는 명령은 다음과 같다.
玉山書院의 大祭 때 못된 행실을 부린 孫龍庄을 비롯한 孫深彦, 辛天應은 지금 당장 將吏와 羅卒를 내어보내 먼저 압송하라. 너희들은 서원에 머물며 大祭가 끝날 때까지 각별히 못된 행실을 못하도록 하되 응당 참여하는 祭官 외에 新儒와 舊儒는 물론 한 사람도 서원 안에 머물며 접촉하지 못하게 하라. 앞서의 帖文에서 거듭거듭 글을 지어 도리를 깨우쳐 알도록 타일렀으나, 같은 사실을 거듭 上申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멋대로 하는 짓이 갈수록 더욱 막되고 괴악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바로 그 자리의 광경이 어떠하였으며, 개중에 주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상세하게 급히 알리고 그 뒤의 것도 계속하도록 하라. 또한 돌출 나게 어지럽히는 자가 있으면 즉시 잡아 올리라. 앞서 보낸 將吏는 꾸물거리다가 때를 놓친 것인지 아직 어떠한 보고도 없다. 기이하게도 과격한 일이 연이어 있고, 그 행동거지가 극히 놀라우니 잘못을 적어둘 뜻은 별도로 하고 우선 엄하게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라. 너희들은 합동으로 거행하여 마땅히 잘못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將校 金根洪과 孫赫基의 보고서[告目]
보고합니다. 저희들은 엄명을 받들고 날이 저물어 서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이 서원에서 있었던 변괴는 이미 文報에서 다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저희들이 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新儒로 모임에 온 사람이 많게는 500~600명이었습니다. 祭需를 공경히 늘어놓을 때 다행히 큰 사단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곧 新儒들이 齋戒하는 방을 가득 채웠으나, 재계하려고 留宿하는 유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新儒 가운데 2~3 사람이 몸을 던져 뛰어들며 곧장 원장의 姓名을 부르며 오만가지로 욕을 하며 대어들어 거의 붙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희들이 백방으로 막고 차단하여 겨우 소란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大祭의 중요한 禮式에서 제물을 올리는 儀式을 편안히 지내게 하지 않고, 將吏와 羅卒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엄하게 단속하여 그 폐단을 막아주십시오. 이러한 연유를 차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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