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玉院事實
여러 가지 사실을 덧붙임
1823(癸未)年 12월 下道의 儒生 金凞鏞 등의 상소문 뒤에 붙인 事目
一, 우리나라에서 庶子 출신들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하의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가 있는데, 유능한 인재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재주가 있으면 등용하는 것이니, 어찌 지체와 문벌의 미천함에 구애되겠는가? 게다가 비와 이슬도 풀과 나무에 곁가지를 가리지 않고 내리니, 임금이 하늘의 이치를 본답아 정치를 행하는 것 또한 이런 도리인 것이다. 이제 하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호소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임금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어진 마음을 미루어서 조정에서 옳은 것을 따를 수 있도록 처리하여 아뢰라는 批答이 있었다. 이어서 대신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의견을 모으고, 또한 節目을 강론하여 결정하라는 교시를 내리셨다. 이것은 참으로 거룩한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나라를 화합으로 이끌고 답답함을 풀어줄 커다란 하나의 기회이다. 그리고 이 무리들이 입은 혜택에 감사히 여기며 위안을 삼아 기뻐하는 것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속한다. 그 동안 여러 임금들께서 해 오신 것을 살펴보면, 매번 소통하고자 하여 여러 번 임금께서 말씀[辭敎]을 하셨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先正臣이신 栗谷 李珥께서 벼슬길을 소통해야 한다는 의론을 주장하신 때부터 어진 선비와 훌륭한 학자들 가운데 임금께 글월을 올려 힘써 의론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나라의 풍속으로 이미 이루어져 갑자기 고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세종 때에는 은 사람들이 품계를 한정하여 거두어 쓰는 법이 있었고, 인조 때에는 그 법 아래에 임금의 제가를 받은 節目이 있었고, 우리 선왕 때에는 丁酉(1777, 정조 1)年에 정한 법[丁酉定式]이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서자들을 소통하여 차별 없이 쓸 수는 없었다. 대개 어렵게 여겨 조심하는 가운데 또한 끌어다 막는 단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임금의 교시를 받들어 그에 필적하는 도리를 법으로 이루려 하니, 앞선 것들을 살펴서 보태기도 하고 들어내기도 하여 실제적인 효험이 있게 되면, 후세에 영구히 간직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품계에 제한을 두는 것은 『通編』의 원전을 따라 모방한 것이고, 淸宦과 顯職 및 관리를 선임하는 職에 허용하지 않은 것은 또한 『通編』의 원전과 丁酉定式을 준수하여 이를 쫓아 계승하고 늘려 보탠 것이다. 이것은 나라에서 처음으로 크게 소통하게 하는 것이다. 진실로 銓曹의 일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임금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혹시라도 이전과 같이 폐하여 버려두는 일이 없게 하려면 법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곧 옛일을 마치 지금 마주하는 것이 해야 할 것이다. 뜻을 가지고 재주를 간직한 선비가 몸이 야위도록 고생하고 늙어 죽도록 살아야 한다는 탄식이 반드시 없도록 해야 한다. 품계를 수립하여 인재를 쓰는 도리와 품계를 제한하여 관등을 두는 법은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서도 어그러지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가 吏曹와 兵曹의 判書가 이제 막 의논하여 條目을 정하여 아래와 같이 열거한다.
一, 문관으로는 分館을 하고 무관으로는 처음 추천을 하는 것은 삼가 丁酉年의 節目을 준수하여 종전과 같이 校書館과 部長의 추천에 따라 시행한다.
一, 문관은 종2품으로 제한하여 左尹과 右尹, 그리고 左副承旨와 工曹參議만을 허용한다. 외직은 牧使로 한정하고, 通淸例는 영조 때의 사례를 따르는데 단지 臺通만을 허용한다. 이 밖에 소통해서 선발하거나 추천의 권역에서 벗어나 있는데 해당하는 관아는 모두 이에 구애받지 않는다.
一, 假注書에 만약 三望이 없으면, 典籍과 奉常主簿 및 直講의 사례를 따르고 단지 성균관과만 모두 下通한다.
一, 蔭官은 牧使로 제한하며, 처음 벼슬길에 오르는 府都事과 監役 및 守奉官은 막지 않는다. 만약 廟를 비롯해 社, 陵, 殿, 宮의 관직, 그리고 桂房의 敎官을 맡는 것은 삼가 丁酉節目을 준수하여 허락하지 않는다. 이 밖의 것에 대해서 각기 해당하는 관아는 모두 구애받지 않는다.
一, 武官은 종2품 兵馬節度使로 제한한다. 만약 訓鍊院正과 副正 등의 직책에 후보로 추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기에 해당하는 각 관아에서 參下의 武兼과 四山參軍은 모두 구애받지 않는다.
一,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만약 摠管과 西北 변방의 亞將이라면 본래 卿宰로 신중하게 선출하는 직책이므로, 이미 左尹과 右尹, 그리고 兵馬節度使와 水軍節度使를 거쳤다고 하다라도 품계에 제한이 없을 수 없으니,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一,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것은 문벌에서 나온 것이니, 고르게 한다고 하여 庶子의 출신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조급히 해서 신중히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문벌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
一, 학식과 품행이 탁월한 사람이나 재능과 치적이 뚜렷한 사람은 마땅히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고 특별히 살펴서 쓰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온 세상의 公議가 허락하기를 기다린 후에 廟堂과 인재를 선발하는 관아에 아뢰고서 시행해야 한다.
一,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어찌 처지 때문에 유독 구애될 것인가? 각 도의 감사가 자기 道內의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되 庶子 출신을 위해 한 자리를 더 마련하여 선비들의 여론을 널리 수렴하여 특별히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힘써 농사를 지으며 경전에 밝고 행동이 닦인 사람을 택하여 그 고을에서는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에서는 조정에 아뢰고서 거두어 쓰도록 해야 한다.
一, 각 고을의 향교와 서원의 직원은 監司와 守令에게 맡기되 특별히 소외되고 울분을 품을 것에 생각을 더하여 政事를 보아야 한다. 首任이 통용되는 고을이라면 이전에 통용되는 것을 따르고, 만약 통용되지 않는 고을이라면 또한 품계에 제한을 두되 소통을 더하는 것을 기쁨의 도리로 여기도록 한다. 만약 이로 인하여 분수를 넘어 소란을 일으키는 사단이 있으면 丁酉年의 절목에 따라 나타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린다.
一, 지금 벼슬길을 소통한 뒤에 혹시라도 正室 계통의 힘이 약해졌다고 하여 名分을 거스르고 어지럽히는 죄는 丁酉年의 절목에 따라 庶子로서 嫡子를 능멸한 죄로 다스린다.
事目으로 나중에 新儒들이 기세가 배나 올라 校長 南鳳陽을 몰아내고, 곧 公圈을 설치하고 저들의 무리를 선출하였는데[校長 孫萬九, 掌議 辛], 이것을 근거로 삼았다.
그 후 26년이 지나 1848(戊申)年에 李眞宅이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신다는 말씀을 받지 못했다.
3년 뒤인 1851(辛亥)年에 또 崔濟京이 임금께 다음과 같이 올린 글이 있었다.
삼가 아룁니다. 저희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타고난 것으로 길러지는 사물은 모두가 같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하물며 대대로 충성과 誠心을 돈독하게 해온 사람의 후예로서 집안에서 전해오는 학문의 단서를 홀로 수천만 가지를 간직하고도 이렇게 박절하게 원통하며 지극히 애통하기는 예로부터 있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 이후로 본래 조정에 잘못된 허물이 없고, 또한 가문에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살아서는 버려진 물건이 되며, 자라서는 庶人이 되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되어야 합니까? 자자손손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막혀 세상의 직위에 등용되지 못하고, 아버지는 자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식은 아버지를 잇지 못합니다. 그 답답한 세월은 400년이나 오래되었고, 그 수를 헤아리면 온 나라 대중의 반이나 됩니다. 예전 憲宗大王께서 재위하여 계실 때 저희들이 곤궁한 사람으로 발걸음을 돌이킬 곳이 없어 감히 자애로움으로 감싸주시는 임금님께 감히 사사로운 아픔을 알려드렸습니다. 그 상소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동방의 나라는 箕子 성인께서 가르침을 베풀고서부터 신라와 고려의 몇 천 년을 거쳐 우리 태조이신 康獻大王께서 처음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도 庶子라는 명칭으로 구별하는 법규가 없었습니다. 관직에서는 오직 재주로만 쓰고, 집안에서는 오직 자식으로만 뒤를 이었기에 한결같이 법전과 예절을 따라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徐選이라는 자가 있어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처음으로 윤리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어서 姜希孟이 그 함축된 뜻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완전히 막아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초 조정의 회의에서 영원히 막으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世祖께서 "하늘이 백성을 내실 때 본래 귀천이 없었는데, 어찌 本孫을 한정짓는가? 나는 공평하게 하려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교시를 내렸습니다. 宣祖께서도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할 때 태양을 곁가지라고 가리지 않는데, 신하로 충성을 드러내는데 어찌 반드시 本家의 자식만이 그러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교시를 내리셨습니다. 仁祖께서도 "이전의 제도가 너그럽지 못하고 답답하니, 재주에 따라 관원을 추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교시를 내리셨습니다. 肅宗께서는 문벌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라는 교시를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英祖께서는 선왕의 남기신 뜻이 문관은 持平과 正言까지 그리고 武官은 宣傳官까지 한꺼번에 소통하는 것이라며 여러 번 特旨를 내리시고, "절대로 나라의 초기에 있었던 풍속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正祖께서는 "몇 해 전에 사헌부와 사간원을 소통하라고 한 것은 진실로 선왕의 苦心에서 나온 것인데도 실적이 없는 것 같다. 여러 庶子의 무리 가운데 어찌 재주가 뛰어난 선비가 나라에서 필요한 인재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하는 것과 또 "參下官으로 벼슬이 오르는 차례가 처음에는 구별이 없었는데, 유독 參上窠에서 후보자로 추천되는 것이 통용될 수 없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교시를 내리셨습니다. 소통이라는 것으로 직접 선비들에게 글을 쓰게 한 임금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아마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純祖 1823(癸未)年에 저희들이 상소로 호소한데 대해 임금께서 "너희들이 불쌍하다는 것을 나 역시 깊이 알고 있다. 지금 조정에서 좋은 쪽으로 아뢰고 처리할 것이다."라는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翼宗께서 대리하여 다스릴 초기에 "庶子의 부류를 허통하게 한 것은 바로 우리 大朝이시니, 만물이 성대한 덕과 커다란 은혜로 일을 성취하게 하셨다. 그런데 허통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도 실제적인 효과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명을 받드는 도리이며 信義를 보이는 정치이겠는가? 오는 大政 때부터 시작하여 外職으로는 守令까지 그리고 內職으로는 通淸과 廊署까지 후보자에 들여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吏曹와 兵曹에 분부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여러 임금 대에 걸친 수많은 이름난 학자들 가운데 소통의 의론을 힘써 주장하여 개혁하고자 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옛날 文正公 趙光祖께서 (庶子들을) 뽑아서 써야 한다는 의론을 맨 먼저 건의하셨고, 文成公 李珥께서 또한 소통의 말씀을 하셨고, 文簡公 成渾께서는 "庶子와 그 자손들을 벼슬에 쓰지 않는 것은 천하를 통틀어서도 없는 일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리셨고, 文烈公 趙憲께서는 "(庶子를) 大臣으로 쓰기를 도모하신다면, 영원토록 인재를 빠트릴 것이라는 근심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리셨고, 文正公 宋時烈께서는 "庶子와 그 자손을 막아서 제한한 것은 처음에 祖宗께서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라는 상소를 올리셨고, 文純公 朴世采께서는 "안에서부터 통상의 법규를 바꾸는 것이 變通에 꼭 들어맞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올리셨습니다. 옛날 정승을 지내신 李恒福을 비롯한 李元翼, 柳成龍, 金尙容, 李敬輿, 崔鳴吉, 張維, 沈之源, 金壽恒, 崔錫鼎, 吳允謙, 尹昉, 趙顯命, 金相福, 그리고 宰相을 지내신 李袤을 비롯한 元景夏, 李周鎭, 李秀白, 金南重, 金壽弘, 李景容 등이 상소로 또는 말씀으로 진술하여 청한 것이 간절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새롭게 교화가 펼쳐지는 날에 소통의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고, "신하가 되고서 임금의 빛나는 덕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된다면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가 막히게 되고, 자식이 되고서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함이 또한 어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자식을 버리고 이미 장성하여 행세하는 同姓을 취하여 뒤를 잇게 하는 것은 인간의 紀律을 손상시키고 하늘의 이치를 멸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고, "庶子의 무리를 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왕자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할 도리에 특별히 흠결이 됩니다."라는 말이 있고, "시골의 천한 부류의 자식들이 때로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하지만, 여러 대에 걸쳐 특권을 누리는 세도를 누리던 이름난 집안의 후예가 오래도록 벼슬에 쓰이지 않아 벼려지니, 쓰이고 버려지는 때의 뒤바뀜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임금께서 "이것이 어찌 한갓 너희들의 원통함과 억울함뿐이겠느냐? 진실로 왕자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할 의리에 흠결이 된다. 게다가 여러 대에 걸친 임금들께서 이리저리 내리신 명령이 있고, 또한 이 같이 마음 씀이 도탑고 지극한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는 것과 같은 비답을 내리시고, 상소에 대해 조정이 좋은 방안에 따라 아뢰고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마주 대하고서 서로 경축하며 조정에서 의논하여 아뢰고 처리할 것을 공손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만백성이 복이 없어 임금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는 애통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임금께 올린 말씀은 사뢰지 못하고 세월이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저희들의 원통하고 억울한 實情이라면 1823(癸未)年 논의 때에 2품 이상의 文武 宗臣 가운데 5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永安府院君 忠文公 金祖淳께서는 "庶子의 부류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庶子의 부류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도록 청하게 한 연유를 말씀드리면, 보잘 것 없고 무식한 사람이 감정을 품고 보복을 하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소통을 논의한 일을 말씀드리면, (그것에 대해 언급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현인들이 모두 여러 세대에 걸친 이름난 신하에 훌륭한 재상이 아님이 없으니, 막고 소통하는 사이의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을 분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귀하고 천함과 궁색하고 영달함은 모두 태어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는 그 몸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천하며, 그 운명은 부여받기 전에 이미 궁색합니다.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는 사물의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식과 동생이 되고서는 감히 아버지와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혈통을 이어갈 살붙이가 되고서도 차례를 이어받지 못한 데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천하 고금에 일반적인 일도 아니고 正道에도 위배되는 일이옵니다."라고 말씀하시니, 더욱 간곡하고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만약 개혁되지 않으면, 비록 漢나라의 衛霍, 宋나라의 韓范, 晉나라의 陶侃과 王珉, 唐나라의 蘇頲과 李愬와 같이 재주와 덕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庶子의 부류라 업신여김을 당하여 초라하게 미관말직의 반열에 나아가 그치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충성과 정성을 품고서도 스스로 드러내 보일 실마리가 없게 되고, 경륜을 품고서도 펼쳐 보일 길이 없게 됩니다. 혹시라도 수백 년 동안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갑자기 변화시킬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선왕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라고 하더라도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게 되면, 또한 시대에 따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夏나라에서 숭상한) 忠의 폐단은 (商나라에서 숭상한) 質로써 구제하고, 質의 폐단은 (周나라에서 숭상한) 文으로써 구제하였습니다. 역대로 법의 들어내거나 더한 내력들을 낱낱이 들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司馬光은 宋나라의 현명한 보좌로 哲宗 초에 옛 법을 모두 바꾸면서 "선왕의 법이 선한 것이라면 비록 백세가 되어도 바꾸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呂惠卿과 王安石 같은 사람들이라면 세우고 바꾸는 것이 마치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제 이 庶子의 부류에 대한 것을 폐기하는 것은 바로 徐選과 姜希孟이 세운 것으로 聖朝에서 창시한 법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主上殿下께서 보위를 이으셔서 뭇 생명을 어루만져 길러주시는데, 무릇 나라 안에 온갖 날고 기며 움직이는 생물이라면 감사한 은혜로 밝게 소생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관직의 후보로 천거되는 것도 애초의 맑고 밝은 교화로 씻어내 주십시오. 저희들은 다시 분통함을 참고 원통함을 간직하지만, 참으로 마지 못하는 마음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외람되게도 숭엄한 御駕를 모독하며 전하께 아뢴 죄는 만 번을 죽어 합당합니다. 대저 저희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단서를 하늘의 이치와 人情으로 헤아려 보아도 究明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대에 걸친 임금들께서 소통하라고 교시하신 것은 정녕 간절하고 애틋한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빠뜨리고 행하지 않습니다. 여러 이름난 훌륭한 학자들이 소통에 대한 견해를 고심해서 의론하고 아뢰었으나, 모두가 空言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한 간악한 사람의 천리를 거스르고 인륜을 멸하는 주장이 점차 고질이 되어 도리어 金石과 같은 법이 되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聖上께서는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고 살피셔서 저희들의 천지와 만고에 걸쳐 있지 않는 억울한 情狀을 東朝에 아뢰시어 밝은 命을 크게 펼쳐주십시오. 무릇 소통과 관계된 政事는 우리 여러 대에 걸친 임금님들의 애통하고 간절한 敎書에 행해져 있습니다. 먼저 人倫을 따라 밝히면 代를 이을 차례가 바르게 될 것입니다. 代를 이를 차례가 바르게 되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소통하는 데는 먼저 文官과 蔭官 및 武官의 첫길에서부터 시작하되 都城 안의 폐기된 부류들로 하여금 울적함을 멀리 내어보내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러들인 祥瑞와 和氣가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鄕黨에 이를 것입니다. 저희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기뻐하는 가운데에 고무되어 서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또한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혼령도 아마 저승에서라도 기뻐하며 감동해서 頌祝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죽기를 무릅쓰고 호소하오니, 특별히 바른 의론으로 답답함을 소통시켜주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領議政 權敦仁이 임금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禮曹의 啓目을 보면, 京外의 幼學 崔濟京 등이 묶어 임금께 올린 글은 몇 해 전에 상소를 하였으나 아뢰고 처리하라는 말씀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상소의 글을 갖추고서 다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청컨대 이번에 조정에서 아뢰고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대저 徐選이라는 한 사람으로 해서 4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한 나라의 절반을 막아버렸습니다. 여러 대에 걸친 우리 임금들의 불쌍히 여기시고 가엽게 여기신 敎示와 선배로 이름나고 깊은 경지에 이른 학자들의 지극히 공정한 의론으로도 4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아직도 통렬히 혁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庶子라는 부류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신이 생각하기에 나라의 일을 위해서도 개탄스러운 것입니다. 무릇 王道의 정치를 도모하려면 인륜을 돈독히 하는 것이 우선되는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윤리가 시작이 됩니다. 만약 부모가 되고서 그 자식을 자식이라 하지 않고, 자식이 되고서 그 부모를 부모라 하지 않는다면, 심히 윤리를 상하게 하고 이치를 거스르게 하는 것이 얼마이겠습니까? 이제 곧 정녕 다른 사람의 자식을 취하여 자식이라고 말하고, 자기의 자식으로는 자식을 삼지 않으면서 부모가 되고서 그 자식을 자식으로 여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서는 호칭을 부모에게 더하여 부르지 못하고, 죽어서는 제사로 그 부모를 받들지 못하면서 자식이 되고서 그 부모를 부모로 여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大典通編은 바로 영원히 전할 법전인데, 거기에 妾의 자식이 있는 사람은 대를 이을 자식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聖朝께서 인륜을 돈독히 하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교화로 참으로 지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핏줄의 소중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의 법에 벗어난 것을 달게 여기는 바로 그런 사람들도 또한 어찌 부모가 부모답고 자식이 자식다운 은혜와 의리가 없겠습니까? 임시방편적인 문벌이라는 계책이 마침내 잘못을 덮어버리는 고질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륜을 벼슬하는 것보다 경시하고, 법전의 규칙을 습속에 막혀버리게 하였습니다. 400년 맑고 밝은 나라에 죄 없이 갇히는 사람이 있게 되고, 앉은 채로 윤리가 날로 상하고 법이 날로 무너져 가는 것을 내버려두어야 했습니다. 癸未年의 節目이 광범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 규모로 답답한 것을 힘써 다 풀어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한계를 두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전과 같았으니, 돌이켜 보면 어찌 소통에 실효가 있고, 폐단의 근원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여러 번 쌓여서 고질이 되었고, 소통하라는 의론은 미적거리지만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조용히 말씀드리기는 하였으나 또한 어찌 하루아침에 효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가령 우리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해 왔습니다. 사대부의 나아가고 물러남은 모두 저울로 다리는 것과 같은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庶子의 부류라는 이름이 붙으면 처음부터 본바탕이 화려한 문벌인지 한미한 집안인지를 묻지 않고 이른바 校書館이라는 것에 모조리 돌려버리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문벌을 저울질하는 것이 사대부에게는 있고 庶子의 부류에게는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름난 선비의 오랜 집안의 후예와 卿士大夫의 후손이라면 이름이 비록 庶子의 부류라고 해도 궁벽한 시골의 한미한 사람과 비교하면 마땅히 함께 隊伍가 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런데도 저 궁벽한 시골의 한미한 사람을 많이 뽑아서 조정에서는 承文院이나 國子監에 들입니다. 그래서 庶子라는 이름을 한번 덮어쓰게 되면 도리어 그 아래에 나아갑니다. 이것이 어찌 비단 庶子라는 부류가 품은 恨뿐이겠습니까? 또한 사건의 본말을 종합하여 자세히 밝혀야 할 조정의 정치가 아마도 부당하게 이와 같이 편협한 것 같습니다. 문관으로는 分館을 하고 무관으로는 처음 추천을 하는 것은 丁酉年의 節目입니다. 비록 법규가 옛 것이기는 하지만, 이 계급의 품계에 더하여 또한 옛 법전에 많은 변통이 있습니다. 그러하니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유독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 성씨의 문벌에 따라 승문원과 선전관에 천거하는 것을 참작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허통하게 되면 또한 소외되고 울분을 품은 것을 화합으로 이끄는 정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자를 들여 후사를 세우는 법에 대해서는 윤리가 크게 막고 있고 나라의 법이 뚜렷이 금하고 있습니다. 禮曹에 엄중히 지시하여 妾의 자식이 있는 사람은 몰래 禮斜를 발급하지 못하게 하셔서 옛 제도를 새로 밝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밝은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에는 선대가 大夫인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많이 기록하고 있으니, 門蔭을 기록하지 마십시오. 이미 그 嫡傳을 이었으면 어찌 유독 선조의 음덕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蔭家에 길이 嫡傳을 이을 사람이 있으면 한번 本閥을 살펴보시고 거두어 쓰십시오. 그런데 혹시라도 後繼의 경계에 한정을 두지 않는다면, 떳떳한 도리가 바르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며, 법이 따르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번 합당한 변통을 둔다고 하더라도, 廟宮과 東西 陵寢의 祭官과 경우에는 庶子의 부류가 보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릇 나라에서 높이 받드는 것 가운데 社稷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먼 고을의 陵寢에 뒤섞어 파견하니 수령은 祭官에 임명되고, 庶子 부류의 수령은 獻官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陵寢에 어찌 멀고 가까움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社稷은 본래 廟宮 가운데 중한 것입니다. 그러한즉 비록 알록달록한 것을 좋다고 알더라도 본디의 바른 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廟宮에서부터 각처 陵寢의 祭官에 이르기까지 파견을 제한한다면, 소통을 하는 하나의 단서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이러한 일의 조목들은 모두 변통에 관계되니, 제가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러러 아뢰건대, 제사에 관계된 大臣과 여러 재상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는지요?
左議政 金興根이 임금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庶子 부류와의 소통은 여러 임금 대에 걸쳐 위대하신 교시가 있어 왔습니다. 또한 선배 가운데 유명한 학자들이 번갈아가며 사정을 진술한 의론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영의정께서 아뢴 바도 또한 더할 것이 없이 모두 갖추고 있어 제가 군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전후로 걱정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번번이 부응하지 못해서 명령은 매번 믿음을 잃게 되고, 규칙과 법식은 한갓 빈말로 돌아갔습니다. 원한을 품게 하고 여러 번 번거롭게 한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에 임금님께 아뢴 후에도 또한 다시 이전과 다름이 없다면, 그 일의 체면이 참으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특별히 타이르고 경계하게 된다면, 실효가 있을 것을 기대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右議政이 임금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庶子 부류의 일은 저들이 일컫는 원통함뿐만 아니라, 여러 대에 걸친 임금들께서 그들의 막힌 답답함을 불쌍하게 여겨 소통을 허라는 전후로 훈계하는 敎示가 거듭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단지 습속이 고질이 되어서 아래에서 명을 받들어 모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최근까지 공식적인 법령에 비록 약간의 변통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원한을 품은 탄식이 있습니다. 지금 領議政께서 문벌을 보고서 특별히 관리에 등용하라고 아뢴 말씀은 庶子가 嫡子가 되어 선대의 음덕을 잇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건의 본말을 종합하여 자세히 밝히려는 政事와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 두 가지 모두에 그 마땅함을 얻을 것이니, 제가 다른 견해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또 내버려 두어서 빈말에 그치게 된다면, 조정의 명령을 믿고 쌓인 원통함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申飭을 더하여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미 여러 대의 임금들로부터 받은 敎示가 있었으나, 아래에서부터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제 大臣들이 아뢴 말이 또한 이와 같다. 무릇 (庶子들을) 벼슬길에 각별히 거두어 써서 이전과 같이 억울해 하는 탄식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851(辛亥)年 6월 7일
鄕校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는 通文
다음과 같이 두루 고하여 알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變革은 때에 따르는 天理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소통은 법도에 합당한 것이며, 조정의 훌륭한 예절입니다. 지금 조정의 처분은 참으로 天理를 밝히고 人倫을 바르게 하며, 옛날 법전에 따라 잘못된 습속을 고치는 하나의 큰 典禮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반이 품은 원한을 트여 흘러 보내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성스러운 조정의 억만 년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조화로운 기운을 끌어들여 맞이하는 것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는 밝은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만나서 모두 쇠퇴한 것을 더욱 북돋우려하여 위로는 여러 대에 걸친 임금들로부터 받은 敎示를 받들고, 아래로는 이름난 큰 학자들이 임금께 아뢴 의견과 通典을 강론하여 바르게 한 것에 근거하였습니다. 그래서 領議政은 임금께 이렇게 아뢰고, 左議政은 저렇게 아뢰고, 右議政은 그렇게 아뢴 것입니다. 그리고 經筵에 나선 문무의 여러 대신들에 이르러서도 한 사람도 달리 말하는 의론이 없었습니다. 大王大妃殿에서 傳敎하기를 "이것이 어찌 위에서 시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아래에서부터 받들지 못해서 이룬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이와 같이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批答하시기를 "이미 여러 대에 걸친 임금들로부터 받은 敎示가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부터 그것을 받들지 못했다. 이제 대신들이 아뢰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무릇 벼슬길에 각별히 거두어 써서 이전과 같이 억울하게 탄식하는 것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는 것과 같이 말씀하시고, 또 "그 어미가 賤하면 그 아비도 한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骨肉인데 어찌 다른 사람의 자식을 취한단 말인가?"라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대하신 임금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크고 훌륭하신 덕이 포용하여 덮어 이루어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거개가 애초의 맑고 밝은 교화에 씻기면 차례를 잇는 바름이 天倫에 근본 하여 밝혀지게 되니,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소통하는 데는 먼저 文官과 蔭官 및 武官의 첫길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지극한 것입니다. 무릇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면 교화는 아래에서 행해집니다. 庠序와 學校를 설립하여 가르치는 것은 인륜을 밝히기 위해서이고, 學宮은 先代 스승들의 사당이자 많은 선비들이 관계된 곳입니다. 그러한즉 이 왕국에 태어나서 골고루 인재를 배양하는 교화를 입고 인륜의 지극함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이 바로 의지해서 돌아갈 곳일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들은 모두 이름난 선비에 충성스럽고 절개가 곧은 신하의 후예들로 본래 조정에 잘못한 허물이 없고, 또한 가문에 끼친 잘못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혹하게도 徐選이라는 사람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보복하려는 폐륜을 당하여 예나 지금이나 천하의 어디에도 없는 일이 생겨나 그 해독이 400년이나 오랫동안 모든 백성들에게 미친 것은 이미 정도가 지나친 것이며, 또한 이미 궁하게 된 것입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것이 또한 통상적인 이치인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께서는 부류가 다른 별다른 사람으로 보지 마십시오. 모두가 우리의 일가붙이이고, 모두가 우리의 姻戚입니다. 만약 묻힌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말끔히 닦아내십시오. 그러면 티끌 같은 의심도 밝아져 온전하게 되어 다시 옛날 속속들이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을 얻게 될 것이니, 어디에 더러운 것이 있으며 어찌 물리치려 하겠습니까? 같은 마을에서 공부를 하고 한마을에서 모여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는 집에서 나고 자라며 시를 읊고 예절을 행하는 가정에서 보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담장 밖에서 배회한 것이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으며, 몇 번의 제사가 지내졌습니까? 참으로 탄식할 일이니, 모두 그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 어찌 무슨 미진한 뜻이 있겠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같이 세워주고, 도달하고자 하면 남도 같이 도달하게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선대 聖人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익힌 賢人과 君子들은 모두 하나의 사례로 간주한다면, 얼마나 쾌활한 경지를 맛보겠습니까? 대개 우리 임금께서 벼리로 삼으시는 법의 종지는 宰相들이 벼리로 삼는 법을 꿰뚫은 것으로 벼리가 되는 법을 의논하여 조정에서 닦게 하여 위에서 드러내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삼가 따라서 행하는 것은 또한 시골에 사는 士林의 일입니다. 그 사례에 있어서는 아마도 마땅히 이전의 굳어서 융통성이 없는 것과 같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확립된 의론을 세워 행하는 데는 윤리를 강구하여 밝힌 것과 함께 받아들여지고, 장차 제사를 받들어 올리는 일에 변통이 되도록 여러모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崔蕩京 孫養國 辛仁輔 權學悅 李壎 韓珪 任致明 鄭來吉 金最振 李震基 李基鎭 辛載鎔 鄭志韶 權必? 崔思崑 韓相良 孫時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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