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1789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청일기(疏廳日記) > 02권 > 1788년 > 8월 > 29일

1789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청일기(疏廳日記) 리스트로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M.1789.4725-20180630.Y1850201021
URL
복사
복사하기

상세내용

상세내용 리스트
날 짜 1788년 8월 29일 / 정조12 / 무신
내 용
8월 29일 黃聖休의 병세가 조금 덜해졌다. 날이 밝기 전에 黃聖休는 병든 몸을 이끌고 疏首를 비롯해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과 함께 일제히 報漏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렸다가 들여가려고 하자 하인이 굳이 막아내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黃聖休 등이 큰소리로 이렇게 호소했다. "저희들은 翼成公을 모시는 書院에 사액을 청하는 일로 영남의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5월에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에 일이 있어 답장의 통문을 받지 못해 여러 달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비로소 답장의 통문을 받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한 지가 이미 보름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임금에게 상소하여 허가를 받을지의 여부가 상부의 결제에 있고, 어떻게 받들어 들이게 하는 도리는 오직 여러분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자 한 承旨가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유생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받들어 들이려면 同副承旨가 관장하는 것인데 해당 관원이 이미 입직하여 이 자리에 없습니다. 차가운 곳에 오래 서있지 말고 속히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해당 관원과 그 일을 상의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소청으로 되돌아왔다. 黃聖休가 차가운 곳에 오래도록 있어서 오래된 병환이 다시 크게 일어났다. 급히 羌茶와 꿀물을 쓴 후에야 조금 진정이 되어 黃弼熙板井洞의 묵는 곳으로 모시고 가서 조리하게 하였다.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해당 관원이 곤히 잠들어서 바로 보내오며 이렇게 말했다. "해당 관원이 일어난 후에 와서 바치시오."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해당 관원이 이렇게 말했다. "다음달 2일에 임금의 수레가 慕華館으로 幸行하고, 6일에 靖陵으로 행행하십니다. 바야흐로 정한 날짜에 시행해야 하니 국가는 이와 같이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일의 체모에 있어 상소문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릉으로 행행하기 전까지는 다시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지 말고 6일까지 기다린 후에 하십시오." 승정원의 말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權兌昌를 비롯해 孫潤慶, 權檾, 趙錫簡, 慶州의 進士 孫鼎九, 서울의 유생 네 사람이 찾아왔다.

원문


二十九日。
黃聖休病勢小減。日未明。黃聖休扶病與疏首及疏任諸人。齊進待漏門外。欲入門。則下人牢拒不入。黃聖休等。高聲呼籲曰。生等。以翼成公書院請額事。率嶺中多士。五月入京。以太學之有事。未得答通。滯留累朔。始得答通。伏閤已至一望。蒙允與否。在於上裁之。如何而奉入之道。惟在僉令公。故生等呼籲。至此一承旨答曰。此所非儒生所入之處。捧入。則同副所掌。而該令已爲入直。不在此座。勿爲久立冷地。速爲退去。則當與該令。相議爲之云。因退還疏廳。黃聖休久處冷地。宿患更爲大發。急用羌茶及蜜水後。小定。黃弼熙陪去板井洞下處。以爲調攝之地。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以該令之困睡。卽爲出送曰。該令起寢後。來納云。午鼓後。入送。則該令曰。來月初二日。大駕幸慕華關。初六日。幸靖陵。方定日設施。國家如是紛紜。其在事體。不可奉入。陵行前。更勿伏閤。以待六日後云。政院之言旣如此。故奉疏還邸。權兌昌孫潤慶權檾趙錫簡慶州孫進士鼎九京儒四人。來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