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용 |
1월 14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 趙奎鎭와 掌議 柳鳳祚, 그리고 黃弼熙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했다. 그런데 보름에 각 陵廟의 향과 제문을 받는 일로 아침이 다 지나도록 몹시 번거롭고 바빴다. 조금 안정이 된 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都承旨가 (묘를 도굴하는 것과 같은) 간특한 일 때문에 宗廟와 景慕宮으로 갔습니다. 그 분이 돌아오는 것이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니, 오늘 상소문을 받아들이더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일은 큰 명절이라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할 수가 없습니다. 모레는 당연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상소의 실무진들은 추위에 일이 긴급한데다 이미 대궐문 밖에서 호소한 것이니 곧바로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생스러워도 都承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한참 지난 뒤에 都承旨가 마침내 보고하러 왔다. 이미 都承旨가 들어가는 것을 보자 빨리 문을 지키는 書吏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다. 잠시 후 문을 지키는 書吏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疏首와 상소에 참여한 사람을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疏首가 이 기별을 각처의 객사에 급히 통지하였다. 黃聖休와 黃弼熙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같은 道의 사람들로 객사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이라고 알렸다. 金宗鐸와 李宗洛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와서 참여했다. 그런데 그때 함을 들 使令이 마침 외출하여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문을 지키는 書吏의 재촉이 아주 다급했다. 끝에 가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좋은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오늘은 또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들은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비록 함을 들 使令을 찾으려 사방으로 수색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러 사람들이 사방으로 나가 찾았다. 그리고 金宗鐸 역시 직접 여러 관아의 문을 뒤지며 찾아 나섰다. 같은 道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마음과 정분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한참 지난 뒤에 마침내 함을 들 使令을 찾았다. 그런데 使令은 전날 貰로 直領을 얻었다가 이미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直領으로 많은 비용을 쓴 것에 마음이 걸리어 당일 잠시 초조하고 걱정이 되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문을 지키는 書吏가 재삼 재촉을 하였다. 疏首 趙奎鎭는 함을 들 使令인 億彬으로 하여금 함을 들게 하고, 문을 지키는 書吏로 하여금 길잡이를 하게 했다. 疏首는 선비의 두건에 푸른 옷과 검은 가죽신을 신고 그 뒤를 따랐다. 敦化門 동쪽으로 들어가 進善門을 통과하여 仁政殿을 거쳐 肅章門을 지나 承政院에 들어갔다. 승정원은 肅章門 안의 물가에 있었다. 첫 번째 칸에서 문을 지키는 書吏가 먼저 政廳門 밖으로 인도해 들어가 承政院의 工房書吏로 하여금 가자 政堂에 통지하게 하였다. 疏首가 政堂의 툇마루에 서면 執禮書吏가 "曲拜[임금을 뵈올 때 하는 절]"라고 외쳤다.[政堂 서쪽 벽에 임금을 뵈올 때의 주의사항과 임금에게 보일 서류를 처리할 게시판이 있다. 그래서 거기에서 曲拜를 하는 것이다.] 疏首가 이에 서쪽을 향해 曲拜[한 번 절을 함]를 마치자 執禮書吏가 이끌고 政堂에 들어갔다. 한 承旨가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가 상소문을 받들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疏首로 하여금 크게 읽게 하였다. 읽기를 마치고서 나서 곧 물러나와 敦化門의 호소하던 장소에서 부복하여 내려질 批答을 기다렸다. 한참 지난 뒤에 승정원의 書吏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상소에 대한 批答이 이미 내려졌습니다. 疏首 당장 승정원에 들어가 批答을 받드십시오."
그래서 疏首가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니, 승정원의 書吏가 상소에 대한 批答을 曲拜廳에 놓고는 "曲拜"라고 외쳤다. 疏首가 曲拜하는 것을 바치고 상소에 대한 批答을 옮겨 적으려 할 때 書吏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洪承旨 令監이 政堂의 뒤에 계시면서 疏首를 뵙기를 청합니다."
疏首가 書吏를 따라 들어가니, 洪承旨가 웃으면서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상소의 일이 마침내 이와 같은 데까지 왔으며, 임금님 또한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주셨으니, 우리 儒學의 학문적 행운이 이보다 성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疏首가 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의 이 상소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令監께서 주선하신 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洪承旨가 이렇게 말했다.
"저의 힘이야 그 사이에 뭐가 있었겠습니까?"
疏首가 말했다.
"만약 令監이 아니었다면, 오늘 상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洪承旨가 말했다.
"이렇게 된 것은 진실로 괴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서 書吏에게 상소에 대한 批答을 베껴오라고 명하고서 이것을 받아 주면서 또 이렇게 말했다.
"임금의 비답에 대한 신하들의 대답이 빠르고 늦은 것은 禮制에 달려 있습니다. 모름지기 빨리 예조판서의 댁으로 가셔서 상의하십시오,"
批答은 다음과 같았다.
"상소문을 보고 잘 알았다. 진실로 너희들의 말과 같이 翼成公의 공로는 제사를 받들어 높이 받들 만하다. 그런데 扁額이 빠진 것은 보기 드문 典禮로 흠이 되는 일이다. 해당하는 관아에서 당사자들이 제출한 문서와 장부에 대해 상세히 검토해서 아뢰고 처리하도록 하라."
疏首가 批答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곳으로 왔다. 그곳에서 비답을 읽는 것을 마치자 柳鳳祚와 黃弼熙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直房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이날 오전에 金宗鐸가 와서 상소문이 받아들여지리라는 기대의 말을 해서 일찍이 오늘의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아주 졸이며 와서 기다린다고 했다. 河學浩를 비롯해 李翼遠, 成德龍, 鄭夏澗 역시 상소문을 받아들일 때 와서 함께 批答이 내려질 때를 기다렸다. 같은 道의 사람으로서 情誼가 참으로 숭상할 만하였다. 禮安의 權時表가 와서 李重祖에게 전할 편지에 대해 물었다.
무릇 본 서원에서 상소하는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는 날에 원래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또한 중간에 많은 곡절이 있었다. 게다가 倡義錄에 관한 상소의 글이 임금께 오른 뒤부터는 조정에 한 바탕 분란과 소동이 일어난 데다, 상소를 위한 자금이 끊겼다 이어지는 일이 겹쳤다. 그리고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서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내려가라고 말했다. 兪令監과 같은 사람은 입버릇처럼 돌아가라고 했다. 고향에 있는 사람들 또한 편지를 써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宰相 蔡濟恭가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라고 권했고, 끝에는 承旨 洪仁浩가 힘써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때에 내려 가버리면, 나중에 다시 우리가 중개할 사람을 갖추어야 합니다."
李鼎運, 權儼, 丁範祖과 같은 여러 분들께서는 이틈을 타서 承政院에 들어가면 반드시 상소문을 받아들이게 할 길이 있을 것이며, 자칫 君子가 도중에 돌아가 버리면 이전의 공로가 참으로 아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믿고 의지한 것은 이런 令監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었으며,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물리치면서 쭈그리고 앉아 해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결국 오늘의 일이 있게 되었는데, 만약 영남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洪令監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소문을 받들어 올렸다 해도 비답을 우러러 받기까지는 대부분 많은 날을 허비하며 지체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로 비답이 내려졌다. 이런 커다란 은혜를 입은 그것이 비록 翼成公의 공로 때문이라고 해도, 우리 임금께서 세상에 매우 드물게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임금의 은혜가 하늘과 같으니, 영남의 선비가 신이 나서 절로 춤을 추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疏首와 黃聖休가 禮曹判書 沈豐之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단지 그의 맏아들만 만나고 돌아왔다. 편지를 써서 三浦의 黃道源에게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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