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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청일기(疏廳日記) 리스트로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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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788년 11월 7일 / 정조12 / 무신
내 용
11월 7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 趙奎鎭와 掌議 柳鳳祚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일이 많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이날 세 번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는데, 승정원에서 대답하는 것이 모두 일이 많다는 것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全始玉金應鍊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창의록을 위한 상소의 疏廳에서 임금께 올린 글은 임금께 오른 후에 임금께서 禮曹判書에게 명하여 狀頭 李鎭東를 불러 만나게 하도록 하여, ‘일찍이 영남은 儒學의 고장인 것은 알았지만 충의가 이와 같은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이후로 자세히 알았으니 신하에게 물어 그 대답을 듣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의 뜻은 그 칭찬하여 장려하는 것을 지극히 하겠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날이 저문 뒤에 啓狀을 들였다고 합니다." 이날 三更쯤에 창의록을 위한 소청에서 소식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 直房의 여주인으로 하여금 문을 두드려 급히 작은 서찰을 전하게 하였다. 그 서찰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조금 전에 승정원으로부터 어떤 書吏를 시켜 창의록을 위한 상소와 사액을 청하는 상소가 어느 달에 올라와서 며칠간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소를 위해 머무르고 있는 유생이 역시 몇 사람인지 상세히 조사하여 적어 갔습니다. 이것은 필시 임금께서 처분을 내릴 모임의 기회가 있을 것이니 자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疏首를 비롯해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글을 보고서 기뻐하는 것이 마치 취한 듯하고 꿈을 꾸는 듯했다. 그리고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正位와 配位를 上疏文에 합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래 뜻이니, 全氏와 黃氏 두 집안에 편지로써 타이르고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토록 간절하고 빈틈없이 마음을 썼는데도 지금의 기회를 잃고 고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나중에 한탄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 黃弼熙로 하여금 掌議 柳鳳祚와 進士 李宗洛를 부르게 하여 配位 세 선생의 事蹟을 짓도록 하여 상소문의 원본을 고쳐 썼다. 베끼기를 끝내니 밤은 이미 새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원문


七日。
朝前。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疏槩。政院以多事退送。是日三入疏槩。而政院所答。皆以多事退送。申退後。奉疏還邸。全始玉金應鍊來言。倡義疏廳上言。登徹後。上命禮判。召見狀頭李鎭東曰。曾知嶺南爲鄒魯之鄕。而不知忠義之如是矣。今而後詳知。因爲回啓。其辭意極。其褒獎。日暮后入啓。是日三更量。自倡義疏廳欲通信。而拘於夜禁。使直房女主人叩門。急傳小札。略曰。俄者自政院。使一書吏。來問倡義疏及請額疏。何月上來。何日伏閤。卽今疏儒之留存者。亦幾人詳査錄去。此必有大處分之期會。勿就寢而待之如何云云。疏首及滿坐見書。懽欣如醉如夢。因竊念正配位合疏。是吾輩之本意。全黃兩家。書諭面議。又如是懇到。失今不改。則必有後時之歎。故罷漏後。使黃弼熙邀掌議柳鳳祚及李進士宗洛。撰配位三先生事蹟。改書疏本。寫畢。夜已向曙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