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 01권 > 1883년 > 8월 > 8일

리스트로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URL
복사
복사하기

상세내용

상세내용 리스트
날 짜 1883년 8월 8일 / 高宗 20 / 癸未
날 씨
내 용

8일, 비
英齋에 고을사람들의 모임 자리를 마련하고, 본부[慶州府]에 마을의 청원서[鄕狀]을 드리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청원서의 우두머리[狀頭]는 孫永烋, 李在斗, 崔昺壽이었다. 청원서는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고을의 옥산서원은 선대의 현인이신 文元公 晦齋 李 선생을 받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을의 인사들이 현인을 높이 받들고 잘 지킨다는 것을 아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라 안에서 관복을 입은 사람이나 선비의 무리들은 모두 한결같이 받들어 숭상하는, 둘도 없는 곳입니다. 이에 설립 초부터 백록동서원의 講案을 내걸고 퇴계 선생께서 정하신 규정을 새겨서 그것을 읽고 거기에 준해서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니, 정밀하고도 또 정밀하며, 어렵고도 또 어렵습니다. 처가와 외가, 그리고 본가 이 세 가지를 갖추어보고, 洞主[院長]로 삼기도 하고, 任司[有司]로 삼기도 하는 구획의 규례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좇아 지은 유림의 집안에서도 한결같이 본받아 대대로 목숨을 걸고 지켜온 법으로 지금까지 300년입니다.
그 사이에 파란이 있어 (회재) 선생의 庶孫으로 서원의 근처에 거주하는 자들에게서 시끄러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앞선 여러 임금님들에 의지하여 선현을 떠받들어 호위하려는 의로운 마음을 내었습니다. 비록 집안을 경영하는데 간혹 잘못이 있어 잘못 살폈다는 關文의 지시를 들을 때에도 論報를 올려 막고 잘라내는 것을 엄히 더하여 제사지내는 일을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서원의 준칙에 실려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원의 유생이 되는 자는 이름의 순서에 따라 보살피면서 낱낱이 그 준칙을 외우며 "아무개 고을 원[侯]일 때는 이와 같았고, 아무개 고을 원일 때는 이와 같았다."라고 말합니다. 대저 궁하게 살더라도 평소의 것을 지키는 선비라면, 진실로 때에 구애됨이 없을 것이며, 산림에 있는 일반인들 또한 백세 천세토록 길이 칭송한 것이니, 이것은 오랫동안 거듭 방비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서손 무리들이 몇몇 鄕新들을 끌어들여 청원서[呈]라 부르며 감영에서 일을 일으키니, 어찌 해를 끼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려주신 關文과 題音이 저들 자신의 뜻과 같고 저들 자신의 말과 같으니, 아무래도 저 題音으로 말미암아 욕됨이 더욱 보태지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감영에서 진실로 벌어진 일의 상황을 참고해서 판단했는지 한 가지 놀라움과 의혹을 가지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무관하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의 처음 이치와 같은 것은 편중되고 간사한 것을 잘못 들은 것이니, 명확하게 말해서 깨우쳐주는 사람이 없음이 심한 것입니다.
아, 세상의 도리가 날로 혼탁해지니, 풍속의 근간이 날로 구차해지고 있습니다. 선비로서 先賢과 先哲을 받들어 호위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부족하여 이미 임금님의 가르침에 걱정스럽고 개탄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후손으로서 선조의 서원을 빼앗으려하고, 후손으로서 선조의 제향을 편하지 못하게 하니, 저 서자로서 후손이 되는 자들은 유독 후손으로서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新儒들을 막아 저지하니, 저희들 또한 新儒라고 하는 자들이 억울하게 여기는 것을 또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나의 풍속에서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서자가 되는 후손으로서 말을 하면, 그 세상을 빛낸 큰 공로가 어찌 마땅히 보통의 다른 서자가 되는 후손과 다름이 없을 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周公이 할 일을 다 한 때부터 애초에 자손을 위하여 힘들인 계책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또한 이 때문에 선조의 서원에서 말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퇴계 노선생께서 당시의 강론에서 三參의 規例를 정하시고 각각 거기에 해당하는 자들에 대해서 한 마디도 없으셨던 것은 어찌 그 시대의 수가 더 가깝다고 해서 대접하고, 더 멀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으며, 어찌 저들이 억울하게 됨을 알지 못하고 저들에게 고의로 이와 같이했겠습니까? 또한 위대한 현인과 군자의 인정을 헤아리고 의로움을 분별함이 후세 사람의 보는 바에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러했겠습니까? 참으로 선유를 받드는 체면은 사림이라고 불리는 호칭에 있으며, 사사로움으로 가릴 수 없는 것에 있다고 하신 것은 사사롭게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베풀어 잔치하는 일[食饗]이나 여러 사람들의 모임[會聚]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차이가 없이 같은 좌석을 같이하고 집을 같이합니다. 또한 향례 때에는 사당 내에서 일이 잘 되도록 변통을 두어 한두 자리를 나누어주어 일찍이 함께 신주를 받들어 모시지[駿奔]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감영에다 말을 넣어 감영의 귀를 헷갈리게 하여 감영에서 나온 關文이 이와 같이 막을 수 없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이 선생의 서자의 자손들이면서 선생의 서원으로 하여금 향회와 도회에서 말끔하게 타당함을 얻지 못하게 하고, 경주부에 청원서를 올리고 감영에 청원서를 올려 이번에 이르기까지 몇 번 몇 차례인지 모르게 서원의 힘을 탕진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또한 봄, 가을에 드리는 제사에 보내야 할 것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저 玉山 李氏라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비록 향신이기는 하나 자신들이 어찌 명색이 향신이라고 저들, 저 녀석들과 한 가지로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그리고 자신들이 어찌 곁가지로 삐져나와 이미 흘러가버린 새 것인 저들, 저 녀석들과 한 가지로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마음이 저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같은 목소리를 내는 자들을 규합하여 척후로 삼는 것은 경비로 쓸 자금을 거두려는 것이 하나요, 魁首의 이름을 감추려는 것이 하나이니, 그 마음이 어찌 진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더불어 하고자 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세운 계책 중에서 계책에 빠진 것을 알지 못하고 감영의 題音으로 의기양양하며, 경주부의 교시로 어쩔 줄을 모르고 들떠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저들이 모임을 만들고 저들이 임원을 약속받고부터는 분향을 스스로 한다고 하고, 향례도 스스로 한다고 하며 위협합니다. 오직 유사들의 수석에게 방자하게 牌旨를 던지며 제멋대로 설치는 것은 오직 뜻이 서로 번갈아가며 城主를 핍박하려는 것 때문입니다. 서원의 지켜야 할 예절에는 잘못에 대해 오히려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을 부리는 유사도 가볍게 책임과 벌칙을 더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성주이신 수석의 아래인 저들이 어찌 감히, 저들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뜻은 필시 감영의 관문에서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한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성주나 관찰사[京宰]께서 서원의 체면과 예절에 익숙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희들은 지난번 저희들에게 이름을 지적하며 감영에 보고하라고 하신 것은 오직 우리 성주께서 관문의 제음을 봉행했는지 어떤지에 대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서원의 체면을 돌보지 않고 고을 수령[地主]도 안중에 두지 않고 이와 같이 무엄하게 업신여김이 더할 나위 없이 백성들을 어지럽히는데 이르러서야 유독 성주 스스로 별도의 징계하여 다스리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서원을 둘러보실 때에 소재하는 곳의 관리를 소재하는 서원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법령이 어찌 이러한 부류의 것을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주께서는 서원의 長이 되시니, 무릇 서원의 크고 작은 일 중에 큰일은 반드시 성주께 아룁니다. 작금에 극심한 변화로 서원의 존망에 대해 모두 알게 하고, 한 사람 서원의 원생으로 이마에 손을 얹고 성주께 기대하는 것은 성주께서 진실로 선현을 호위하고자 하며, 선현의 서원을 위하는 마음이 서원의 어떤 생도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변화의 소식을 듣고 편안하게 앉아있지 못하고 분주하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장마로 물이 넘치는 것을 분간하지 않고 일제히 관청의 뜰에 부복한 것은 저희들이 비록 날파리와 같이 아주 미천하여 외모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고, 말로는 다름 사람을 감개시키기에 부족하나, 오히려 선생이 계시던 향리의 후예로서 죽음으로 지키려는 한 조각 마음이 이 세상을 위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서원이 있기에 이 서원을 위하는 때가 있으며, 이 규율의 구분이 있기에 이 규율의 구분을 위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비록 한 개나 반개의 여유가 있다면, 또한 한 개나 반개의 때가 있기에 옮겨 바꾸게 하지 않으며 굴러 옮겨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감영의 공문[營關]이 비록 상관의 것[堂上]으로 천리나 멀리 있기는 하나, 세속에서 이르기를 한 사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주님이라 합니다. 이러한 때 이렇게 우르르는 것이 못내 번거롭게 하는 것이나 간절함이 지극합니다.
題音 ; 관련된 단자를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감영의 제음이 이미 매우 엄하여 官이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회원들이 모두 비를 무릅쓰고 돌아갔다. 그런데 주인의 집을 텅텅 비게 하는 것은 문책에 응하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5~6명의 회원이 머물며 묵었다.

이미지

원문


初八日雨。
設鄕席于英齋。議呈鄕狀于本府。狀頭孫永烋李在斗崔昺壽。狀曰。
伏以本鄕之玉山書院。奉先正晦齋李先生文元公。不但鄕之人士之所知所尊奉。而崇衛之地。國以內紳笏冠木之倫之。咸一爲尊尙而不貳地也。爰自刱立初。 揭白鹿之講。鐫退陶之規。以講以薦。精而又精。難而又難。備觀妻外本三叅。以洞主之。以任司之。劃爲規例。遵作儒林家一副。世守死法。三百年于玆矣。間有波盪。不無哄閙之生。於先生庶孫之居在院傍者。而幸賴前後邦君。出義扶衛。雖或有營家之繆。被听聆失照關敎之時。而申爲論報。嚴加沮斷。俾完俎豆。載在院秉至今。爲院儒者。循名拊摩。而歷誦之曰。某侯時如此。某侯時如此。夫窮居守素之儒。固不足有無於時。而林下公共其亦永有辭於千百世矣。斯久重屯。先生庶孫輩歐引若箇鄕新。號爲呈。營中作。何許機括。而得下關題。如渠自意。如渠自言。雖使自渠題爲蔑。有加益也。民等窃壹駭惑。爲營門。苟或叅照事狀之斷。有不然之一二分。則必應無關。下之如始理 是其繆聽偏奸。無人以陳牖之明的甚也。嗚呼世道日汚。風綱日苟。士而尊衛先賢先師之不逮古昔。猶爲主敎之所憂慨。况乃以孫而欲奪祖院。以孫而欲不寧祖享。彼庶而孫者。獨不以孫爲心乎。我國之防閼新儒。民等亦謂之爲新儒。爲抑鬱亦人情也。而其於國俗通然。何就以先生庶孫而言之。其光世勳業。宜若不能無少有差殊於凡他庶孫。而此自周公之盡職。初不爲子孫市勞計。則又不可以此而有說於祖先書院矣。是以退陶老先生。當日講定三叅之規。各無一言於及彼者。豈以其時代數愈近而待之。愈疏而然所。豈不知彼之爲寃。而彼故如是而然耶。又豈大賢君子度情裁義之意。有不及於後人所見而然耶。誠以儒先之奉體貌。有在士林之所名號。有在私不可掩云云。不可施私也。至如食饗會聚。則無間一座而一堂。又享禮時。則廟內周旋。未嘗不與之一二窠以同駿奔。而不知今玆何如入言於營門。以瑩惑營門之聽。而得出營關。如是無觝滯之爲也。大抵李先生庶孫而使先生書院。而不得淨妥鄕會而道會。而呈府而呈營而至于今番。而不知幾度而幾次。院力蕩然。今且秋春供享之支下不遣矣。彼玉李者。心自以爲我雖新矣。而我豈若一例名色鄕新之彼哉彼哉者乎。我豈若一例傍出逝新之彼哉彼哉者乎。而特以糾合同聲。藉以前茅者。一以爲收斂經費之資。一以爲隱藏首惡之名。而其心豈眞欲與之終始哉。彼愚不知計中墮計。以營題爲得得。以府敎爲無何。浮動。風聲出爲響箭。自渠爲會。自渠券任。謂焚香爲自爲。謂享禮爲自爲脅。單首席在之有司。肆然投牌恣撗。唯意是由迫遞城主也。院中体例轉有引嫌。故有司所使之下人。有不得輕加責罰。况城主首席之下。彼惡敢彼惡敢。其意必謂營關有好之無恐。而城主京宰。不嫺儒宮体禮而以爲是也。民等不知他日民等之指名報營。惟在我城主奉行關題之如何。而至如不有院体。不有地主之如此無嚴憚極悖乘之亂民。獨不可以自城主有別般懲治之道乎。年前轍院時。令甲以所在地官。爲所在院主者。豈不以是厲此類地乎。城主爲院長。凡於院中大小大事。必稟城主。總知今於極變存亡之秋。而一院生徒之額手戴望於城主者。固知城主之衛先賢。爲賢院之心。有不下於院中生徒。而猶不能聞變安坐。奔走跋涉。不分潦漲。齊伏公庭者。民等雖肖翹末陋。貌不足以動人。言不足以槩人。而猶是先生之鄕後裔一片死守之心。以爲此世上有時。此書院有矣。此書院有時。此規劃有矣。此規劃有時。民等雖一箇半箇餘有。亦一半有時。移易不得。轉遷不得。今者營關。雖或有堂上千里之遠。而諺曰。一令惟城主。是時是仰。無任支煩懇迫之至。
題聯單覽悉。而營題旣截嚴。官不可擅便向事。
會員皆冒雨發還。而主人家蕩空。非責應之道。故五六員留宿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