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용 |
7일 맑음
관청의 使令으로부터 양쪽 편에 대질할 것이라고 하였다. 관청에서는 피차 각기 스스로 말로써 다투고 따질 것이니, 한갓 어수선하고 떠들썩하게 하지 말고 각자 당일의 사실에서 필요한 부분을 뽑아 기록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관청에 호소문의 초안을 올리는 것이 牒報하는 일이 된다. 곧 本府에서 옥산서원의 儒生 鄭宇載, 權宜恒, 李在熺 등에게 관찰사에게 疏章을 올리게 된 연유를 말하라는 것이 당도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호소문을 품고 감영에서 부르짖은 것은 반드시 本府로부터 억울함을 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가 합하로부터 억울함을 푼 것이 한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니 앞서의 제음에서는 또한 말하지 않았으나, 享禮를 빠뜨린 후 올린 호소문에 대한 제음의 敎示 안에 "이 이전에 타이른 것이 있으니, 반드시 本邑으로부터 달리 징계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관청의 제음이 당도한 즉시 "享禮 때에 소란을 일으킨 것에 많이 놀라 탄식하였다. 그래서 이미 별도의 징계를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감영의 제음에 근거한 것이 달리 없었습니다. 봉행하여 시행했다고 한다고 한다면 "별다른 징계는 바로 李在謙, 辛宗海, 孫星煥 등의 몇 사람을 며칠 동안 가두었다가 풀어준 것뿐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일에 있어 저들을 징계하러 캐물어 처단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저희들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기약할 날이 없고, 저들은 앞뒤에서 속이고 비방하였습니다. 저희들 역시 많이 번거로움을 깨닫고 이제는 일일이 따라가며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서원의 노비와 저들, 그리고 저희들 가운데 각기 몇 사람을 불러다가 감영의 뜰에 세워서 말씀을 들어보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상에 한 가지라도 저희들이 말한 것에서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그 죄를 저희에게 돌리셔서 죽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세상의 도리를 위하고, 선현을 위하고, 사림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참작하여 처리해 달라는 訴狀을 올렸습니다. 제음 안에 "이 일을 말하면 또한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엄한 징계로 유배의 형에 처한다는 제음의 甘結이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이 그치지 않고 선비들로 하여금 호소문을 쓰게 하고, 또 과연 깊이 탐구함이 부족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이른바 소란을 일으킨 여러 사람은 한꺼번에 모두 체포하여 엄히 조사하여 보고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新儒로 李在謙, 辛宗海, 孫星煥 등이 즉시 체포되어 가서 舊儒 등과 함께 모두 조사하고 심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쪽 편의 말이 한갓 서로 번거롭게 떠들기만 하여 끝내 전부를 자세히 아는 것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자 그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같은 뜰에서 글로써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舊儒인 李能章, 李在鐘, 李能任 등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하였습니다.
재계에 들어가는 날에 獻官과 여러 執事가 모여 사무를 보려고 公會를 마련할 때 李在謙 등이 한 사람의 집사를 나누어줄 것을 말하였습니다. 모두가 말하기를 院錄에 그대로 있듯이 선비를 취하는 데는 천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제수의 진설을 준비하는데 이르러서 저들 가운데 두 사람을 장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李在謙이 갑자기 이번에 필시 크게 말썽이 생겨 틈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로 인해 집사가 이미 업무를 분담하여 한쪽 편에 부탁한 것이 찢어지며 풍랑이 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들 편에서 어느 집에서 무리 100여 명을 모아 어둠을 틈타 재계하는 자리인 강당 한쪽 편에 있는 두 개의 재계하는 방에 난입하여 모두 빙 둘러앉아 한 치의 틈도 없었습니다. 바르게 재계[正齋]하고 밤에 제수를 진설한 후에 有司 李邁久와 大祝이 진설한 것을 살펴볼 때에 저쪽의 한 소년이 사당의 문을 힘으로 빼앗아 열고는 거듭 노래하기를 "네 놈은 어떤 놈이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곧 무뢰한 100여 명이 사당 안의 典祀廳에 끼어 앉아 어떤 사람은 관을 어떤 사람은 두건을 쓰고, 머리를 감거나 몸도 씻지 않았습니다. 밤에 기약한 시간이 되기 전에 원래 정한 헌관이 한쪽 곁에 앉을 겨를도 없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을 즈음에 한쪽 편에서 笏記를 부르는 소리가 나고 이미 제사가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재계하러 지키던[齊直] 무리가 보니 이른바 獻官은 齋服도 착용하지 않고, 문밖에서 어렵게 들어온 사람들은 각각 몽둥이 하나씩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으니 獻官과 여러 집사는 이미 저들 편에서 갑자기 쳐들어와 함부로 행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기세에 있어 私家로 물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몹시도 절박하여 즉시 달려가 호소를 하니, 제음의 교시에 "享禮 때에 소란을 일으킨 것에 많이 놀라 탄식하였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 사람은 즉시 붙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향례를 빠뜨린 전후 사실을 이미 통촉하고 있었기에 오직 바란 것은 분명히 조사하여 처결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新儒라고 일컫는 李在謙, 孫星煥, 辛宗海 등이 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봄의 享禮 때 집사에 대해 일정한 좌석을 나누는데, 저희 세 사람이 말석에 참석하여 하나의 집사를 간절히 구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니 서원의 선비가 말하기를 "집사에 대한 기재는 이미 이루어져 사이에 써넣을 수가 없다."라고 하며 한결 같이 굳게 거부하였습니다. 저희는 다시 간절하게 "우리 무리가 이미 서원의 뜰에 한 소년으로 하여금 두건과 복장을 바르게 착용하고 집사의 뒤를 따라 선생의 뜰에 참배하게 하면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서원의 선비가 큰 소리로 매우 꾸짖으며 "비록 향례를 빠뜨리더라도 끝내 (집사의 자리를) 허락해 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향사람인 辛宗海와 孫星煥이 이에 물러나오고, 本孫인 李在謙은 북쪽의 위에 있는 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서원의 선비들이 셋씩 마주앉아 말을 하거나 둘이서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제향할 때에 이르러 李在謙을 불러 "그대들이 제사에 참여하고자 기다리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라건대 한 사람을 보내 우러러 배례를 하였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하니 서원의 선비가 점점 물러가더니 서원 안에 한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새벽 빛이 가까워져 저희들이 이미 자손의 서열에 있으니 향례를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牛角里에 있는 玉山의 本孫과 인근에 거주하는 두서너 선비를 초치하여 제사를 마쳤음을 선생께 고하였습니다.[利成] 만약 혼령이 계신다면 단지 舊儒가 올린 것만 흠향하고 혈손이 올린 것은 흠향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일로써 사람을 모함하는 이야기꺼리로 삼는 것은 오히려 매일 자리에서 물러나다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만약 조상에게 흠향한 자손으로 돌아간다면, 비록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오직 밝은 결정과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양쪽에서 진술한 바를 참조해서 보면, 舊儒는 서원의 향례 때 무리가 소란을 일으켜 마침내 향례를 빠뜨리는데 이르렀다는 것을 말로 삼았다. 그리고 新儒는 집사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구유가) 굳게 거부하여 (제사 드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물러갔기 때문에 옥산 이씨와 두서너 사람의 마을 사람들이 새벽을 틈타 행사를 맡은 것이 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원의 규약을 가져다 보면 제사를 드리는 의식에 어긋남이 있음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李在謙 등 세 사람을 함께 가두고 연유를 조사하여 보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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