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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Y09+KSM-WM.1883.4713-20170630.Y1750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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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83년 8월 13일 / 高宗 20 / 癸未
날 씨 맑음
내 용

13일, 맑음
종택에서 모임을 갖은 당일 오후에 杜洞權宜奭이 감영으로부터 돌아왔다. 감영의 題音이 비록 아주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뉘우쳐 깨닫게 하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향중에서 감영에 청원서를 올렸다. 청원서는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나라에는 옛 聖人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학교가 있고, 향리에는 옛 현인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서원이 있는 것은 또한 선한 일을 일으키고 예절의 풍속을 바르게 하려는 한결같은 다스림입니다. 都城을 바라보며 시골이 해야 할 것을 알듯이, 학교를 근거해보면 서원이 해야 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절차가 어찌 진실로 그러할 뿐이겠습니까?
본 고을의 옥산서원은 옛 스승이신 文元公 晦齋 李 先生의 혼령을 경건히 모시는 곳이며, 그 서원의 규약은 바로 퇴계 노선생께서 강학하며 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서원들은 건립하면서 順興의 紹修書院을 본받아 계승하여 옥산서원에도 있게 되고 도산서원에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액 서원을 한 번 살펴보면 이러한 규약을 따르고 본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본 서원이라면 龜巖 李楨 공께서 경주부의 수장으로 계실 때에 선비를 추천하는 조목들을 퇴계의 문하에 아뢰어 정한 것입니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中人과 庶孼은 비록 대과나 소과에 합격하더라도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中人庶孼 雖大小科 勿許濫入]"는 12 글자를 손수 편지로 써서 보내주셔서 특별히 薦士錄 첫 장에 게재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선비를 추천하는 법은 자신을 참작하고, 외가를 참작하며, 그리고 처가를 참작하는 三參을 매우 엄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거를 행할 때는 콩인지 팥인지 가리기 위해서 마음에는 저울을 두고 손에는 둥근 찌[輪栍]를 더하였으니, 참으로 어렵게 하고 신중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추천하는 것을 마치면, 또한 家禮와 옛 스승들의 글, 그리고 그 주석서 등을 강론하니, 그 정중함이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것입니다.
아! 이 서원이 어떤 서원이며, 이 규약이 어떤 규약입니까? 그런 이 서원으로 하여금 서원이 되지 못하게 하고, 이 규약으로 하여금 규약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선생의 후손으로 서원의 담장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한 골짜기를 굳게 차지하고 있으면서 세상에 이름 하기를 玉山 李氏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불리는 까닭에 스스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모든 講席의 추천과 향례에서 온갖 것들로 훼방하고 시끄럽게 떠들었습니다. 府廳에다 탄원서를 넣고 감영에다 탄원서를 넣어 온갖 誣告에 끌려들어 저희들 또한 거기에 대응하는데 고통을 겪었습니다.
최근 삼가 보건데, 부청의 題音이 감영의 공문서와 나란히 이르렀으나, 저희들은 그것을 다 읽지도 못하고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땀이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저들의 탄원서를 보지 못해서 저희는 추측으로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합하께서 공문서에 판결을 내리면서 선비를 추천하는 기록에 대해 밝히셨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진술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서원을 창설한 것도 이 사람들이며, 후예인 것도 이 사람들인데, 사당에 올라 享禮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합하께서 누구에게 들으셨기에 갑자기 이런 교시가 있으신 것인지요? 저희들이 몇 마디 말로 아뢰도록 해주십시오.
본 서원이 창건된 것은 隆慶 壬申年(1572, 선조 5)이며, 潛溪 공(李全仁)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은 戊辰年(1568)이니, 서원이 건립되기 5년 전입니다. 許草堂(許曄)이 지은 서원의 기문에서 말하기를, 부윤이신 李齊閔(1528~1608) 공이 향인13인의 바람을 수합하여 마을에서 쌀 13섬을 얻어 감사에게 고하여 서원을 건립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부윤은 몸소 터를 정하시고, 창고에서 나머지 물건을 꺼내 주된 비용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노인들과 선비들 역시 많은 힘을 내었습니다. 그 해 10월, 조정으로부터 논밭과 노비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또한 方伯께서는 돕는 관원들을 오가게 하였고, 근방의 수령들, 道內와 마을의 사림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서원의 기록에 지금도 밝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어찌 감히 그 선조를 몹시도 속이고, 선조의 서원에 대한 공로를 탐하는지요?
사당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어찌 그렇겠습니까? 대체로 서원에 선비들의 모임에서 글을 짓거나 술을 마시는 때, 또는 향례를 지내고 보내온 음식을 먹을 때 같은 서열을 이루고, 말을 해도 같은 자리에 앉아 간격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스스로 이 일로 인해 풍파를 일으키고 고함을 치는데 힘쓰는 것이 本孫이나 고향의 선비 되는 사람보다 더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享禮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저희들 또한 그들을 대접하는 마음에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敎旨가 있은 이후로 그 마음을 달리하였습니다. 사당 내의 한두 자리는 같이 두루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교지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며, 후예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즉 합하의 오늘 官帖은 저희가 진실로 이미 명령에 앞서 시행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제도가 一新하여 사람을 씀에 귀천에 구애를 받지 않는데 향교와 서원의 임원만 유독 제한하고 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또한 그것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저희가 궁벽한 바닷가에 있고 왕성에서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진실로 법이 어떻게 一新되었는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벼슬을 하는데 있어서 쓰는 사람의 가문은 본래 꺼리고 경시하여 오직 그 재주만으로 구애를 받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비의 집[儒宮]에서는 재능도 아니고, 기량도 아니고, 오직 가문만을 봅니다. 재주가 管仲이나 諸葛亮과 같고, 기량이 깊이 치하할만한 것이라도 三參에 부족함이 있으면 서원의 선비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공담(空談)[枯談]이 내용이 없고 死法이 의미가 없을지라도 참작해서 세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서원의 선비인 것이니, 벼슬에서 멀거나 귀하게 됨이 서원의 원규를 훼손함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만약 벼슬을 서원의 기준으로 삼으라고 하신다면, 서원은 벼슬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니 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는 또한 지금 서원의 선비가 되게 한 사람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갓끈을 구슬 꿴 것으로 하고 그 머리 꽂개를 옥으로 하고 서원을 출입하면서 벼슬을 기준으로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합하께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지 못할 것이며, 그 때문에 죄를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땅히 앞에서 죄가 된다고 하신 것과 반대되는 것이 없겠습니까?
서원에는 서원의 법이 있어 서원에서 그것을 쓰고, 벼슬에는 벼슬의 법이 있어 벼슬에 그것을 쓰니, 어찌 서로 침범하고 서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한마디 분명히 할 것이 있으니, 지금 합하께서 아래의 관리를 불러 시키려 할 때, 그 가운데는 또한 마땅한 관리와 마땅치 못한 관리가 있을 것입니다. 마땅치 못한 관리에게 마땅한 관리의 임원직을 시키고자 하신다면, 마땅한 관리가 된 자는 반드시 죽음으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허락하지 않고 또 합하께 아뢸 것이니, 합하께서 들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제도가 一新한데 너희들은 어찌 옛것을 지키며 융통성 없이 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시 그와 같이 말씀하셔도 그 다툼을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합하께서 교시하신 바른 것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합하께서는 또한 마땅한 관리에게 매를 때려야 하는데도 그 마땅치 못한 관리를 나아가게 하여 임원직을 맡기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마음을 들어 저들에게 더할 뿐이라고 하셨으니, 합하께서 이를 헤아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다른 서원으로 이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栗谷의 石潭書院과 南冥의 德山書院 등이 모두 嫡孫들로 잇고 있으며, 薦錄에 적손과 서손을 합한다거나 임원직을 두루 같이한다는 소리를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또 감영으로부터의 조처로 변경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禮安의 陶山書院, 安東의 屛山書院, 玄風의 道東書院과 같은 그 고을과 그 향리에 어찌 그러한 선비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참으로 천록에 적손과 서손을 합한다거나 임원직을 두루 같이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감영으로부터의 조처로 변경한 일도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사례가 하나라도 있는데 저희들이 굳게 지켜 허락하지 않는 것 같으면, 저희들을 고루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저희들을 억지를 부린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합하께서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찌 저희들의 마을과 저희들의 서원에서만 유독 허통하게 하시고 고수하지 못하게 하시며, 또한 죄로써 위협하시는지요?
저들 또한 선비이며, 저희 또한 선비입니다. 저희가 진실로 저들과 같은 선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고을 두 서원 가운데 저들은 西岳書院에 근거하고 있고, 한 고을의 으뜸 된 곳 가운데 저들은 향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나머지 한 곳이 玉山書院으로, 반드시 옥산서원을 그렇게 하고자 하신다면, 저희는 어떤 선비이기에 돌아갈 곳을 한 곳도 없게 하고자 하십니까?
아! 저 道家나 佛敎, 匠人이나 광대들도 각기 그 무리가 있고, 각기 그 법의 일정함이 있어 바꾸지 않고 대대로 지키며, 잃지 않도록 서로 법을 본받으려합니다. 지금의 저희는 선생의 마을에 태어나 선생의 말씀을 외우고, 선생의 가르침에 감복하고, 선생의 사당에 오르며, 선생의 도리를 호위하여 면모를 한결 같이 하고자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 선생의 땅에서 법으로 획정한 것을 한결 같이 하지 못하며, 어찌 선생의 땅에서 죽음으로 삼백년 동안 준수해온 옛 규약을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서원 祭壇의 몇 이랑 땅에 이리저리 변통하여 지난 자취에서는 널리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후학에게는 아름다운 규범을 남기니 일에 무슨 해가 되며, 법에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아래 관청에서 이름을 지적하는 보고가 있어 그것으로 크게 징계하는 교시로 삼을 것이라고 하니, 저희들의 말은 금일로 끝장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 무리들이 題辭를 얻어 와서부터는 의기양양하게 서원에 들어와 "우리들의 일은 이루어졌다. 우리들의 일은 이루어졌다."라고 말하면서 한편에서는 모임을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리를 마련하여 마을에서 새로운 임원을 선출하겠다며 城主의 下有司를 위협합니다. 제멋대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여 분향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하며, 향례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하니, 이들을 예절을 갖춘 부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을 선생의 후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비가 선비에게 말로써 서로 힐책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다고 하는데, 하물며 다시 다투어 빼앗으려는데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이미 저들과 말로써 다툴 수 없습니다. 또한 저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싸울 수도 없습니다. 관청에 청원서를 올리면 관청에서 옳지 않다고 하고, 감영에다 호소하면 감영에서는 듣지 않으니, 저희는 여기에서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만 마땅히 서로 이끌고 서원을 향해 절하고 先師에게 아뢰고는 물러나 문을 닫아걸고 어진 규약을 보호하여 지키지 못해서 종신토록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음을 자책할 따름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근심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시 합하를 위한 사사로운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절절하게 안타까워하는 것은 합하께서 젊은 나이에 부절을 쥐고 명성을 떨쳐 한 道에서 그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가 길에 가득한데, 편벽된 말로 우연히 잘못 살펴서 한 지방의 선비들로 하여금 유독 홀로 곤경에 처했다는 탄식을 품게 했다는 소문을 한번 받게 되면, 선정을 행하는 지방관[棠隂]으로 흠이 없을 것이며, 임금의 얼굴[淸光]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은 저희 70년 동안 고심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맹렬히 다툰 나머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이 미봉책[牽補]으로 금일에 이르렀으니, 두 사람 사이에 생긴 불화로 말미암은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이름을 지명하여 감영에 보고하였으니, 이로써 알아들어야 할 것[知悉]이다.
저녁식사 후에 상촌의 5~6명이 와서 보고는 다시 원임직을 소통하는 것에 대한 말을 하기에 물리쳐서 돌려보냈다. 들으니 이른바 저들의 새로운 원임인 權이 이르렀다고 하였으나, 날마다 마을에 꼼짝 않고 누워서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새로운 원임은 權必煥이다.

원문


十三日晴。
齊會宗當日午。杜洞權宜奭。自營下還。營題雖不嚴快。而可見其悔悟之意。鄕中呈營狀。
伏以國有學祀先聖。鄕有院祀先賢。亦興善物正禮俗之一治也。視都知野。則據學知院矣。而其規模節次。夫豈苟然而已哉。本州之玉山書院卽先師文元公晦齋李先生妥虔之所。而院規卽退陶老先生所講定者也。我國書院之設昉於順興之紹修而繼。而有玉山。有陶山。而一省額院。遵式此規。况本院則李龜巖公楨知府時。以薦士節目。稟定溪門者也。先生嘗以"中人庶孼。雖大小科。勿許濫入。" 十二字手自書鴈。特揭於薦士錄首張。而薦法則以己叅外叅妻叅。三叅爲截嚴。行薦。則以赤豆黑豆而心存稱衡。手加輪栍。其難慎也如是。薦畢則又講家禮子傳等書。其鄭重也如是。此其大略也。噫。此院爲何院。此規爲何規。而使此院而不得爲院。使此規而不得爲規。必先生之孫。在宮墻密邇地。而盤據一壑。名世以玉李者也。彼以其名之故。而自懷憾恨。凡於講薦而香享。而沮閙百端。呈府而呈營。而搆誣千變。生等亦苦於應接矣。今者窃伏見鄕狀題音。幷到付關帖。生等讀之未竟。顫汗潑身不知。所謂今不見彼狀。生等不能逐條億辨。而就以閤下題關。而發明之薦錄也。已上陳之矣。至如刱設斯人也。後裔斯人也。不得升其堂而叅其享云云。閤下于誰聽聞。而遽然有是敎也。生等請片言以白之。本院創建在隆慶壬申。而潛溪公之歿在戊辰。則宲(實?)建院前五年也。許草堂書院記曰。府尹李公齊閔采鄕十三之願。告于監司。請建書院。躬卜基址。出庫餘以主費。鄕老儒士亦多出力。其年十月。自朝家劃給田民。又方伯地主往來別星。旁近守令道內鄕內士林出助。院錄今昭昭。彼惡敢厚誣其祖。沽功先院耶。至如升堂云云。則又胡其然也。凡有院中文酒儒會香享禮饋。而食則同列。言則同座。不有間隔。而猶自因事。風生咆哮作力。有勝於本孫原鄕之爲儒者矣。至如參享云云。則生等亦不無別其待之心。而自正廟聖敎後。尤有所異之也。廟內一二窠。未嘗不與之同周旋。則聖敎之不爲不奉矣。後裔之不爲不念矣。然則閤下今日之帖。生等前者固已先令而施行之久矣。 又曰。國制一新。用人無方。校院之任。何獨防限云云。生等又陳之。生等僻在海隅。去王城千里而遠。誠不知有何疏典之一新如何。而至於仕宦。則用人以門地。本自拘狹。惟其才無方。猗歟盛矣。而儒宮段非才能地也。非器局地也。惟門地是觀。使才如管葛。器同殷謝。而有參不足 則非院儒也。使枯談寂寥。死法無味。而叅爲三具。則是院儒也。仕之疏顯。何關於儒之毁規乎。若曰仕以準儒。而儒不準仕以爲罪。則生等抑不知今使爲院儒者。而珠絡其纓。瑁飾其簪。出入院中。曰以準仕乎。則閤下必不之謂無傷矣。而不以罪也。若是則宜與夫前之罪者。不有反乎。儒有儒法。用之于儒。仕有仕法。用之于仕。何得相侵而相視也。且有一言較然者。今閤下所呼使下吏。其中亦必有當吏與不當吏矣。不當吏而必欲使任當吏任。則爲當吏者。必死不許矣。爲是死不許。而又訴之于閤下。則閤下之聽是也。又將曰。國制一新。汝輩何得守舊膠固也云爾乎。雖復云爾。而其爭也不息終。不能歸正于閤下之敎。則閤下又當盡杖當吏。而一進其不當吏而任之乎。孟子曰。擧斯心。加諸彼而已。閤下請度之。又以他院而證之。栗谷之石潭。南溟之德山。彼皆承嫡之孫。而猶不聞混錄而通同任之矣。又不聞自營家處置而區劃之矣。如禮安之陶山。安東之屛山。玄風之道東。其邑其鄕。豈無其儒。而實未有混錄而通任之矣。又有自營家處置而區劃之矣。有一於是。而生等若牢守不許。則謂生等爲固或可。謂生等爲拗亦可。而閤下試思之。何獨於生等之州。生等之院。而使之通。使之不守。而又威之以罪乎。彼亦儒也。生等亦儒也。生等固不是不如彼之儒。而一鄕兩院而彼據西岳。一鄕首善而彼據校宮。餘一玉山。而又欲玉山之。生等是何儒。而必欲無一於所歸乎。嗚乎。彼道流禪釋工伎倡優。各有其徒。各有其法一定。而不易世守。而不失以相法法也。今生等生先生之鄕。而誦先生之言。服先生之敎。升先生之堂。衛先生之道。思以一體貌。而不爲何於先生地。一規劃。而不爲何於先生地。死守三百年。遵行古規。以周旋於數畝宮壇之地。起曠慕於往躅。遺懿範於來學。於事何害。於典何誅。而今有指名論報以爲大懲之敎。生等之言今日而索矣。渠輩自題敎得來。揚揚入院曰。吾事濟矣。吾事濟矣。一邊作會。一邊開席。券出鄕新任。脅單地主下有司。恣撗無憚。焚香曰自爲。享禮曰自爲。是可曰衣冠類乎。是可曰先生裔乎。儒之於儒。以言相詰。猶曰不可。况復爭而奪之。生等旣不能舌競彼。又不能肉薄彼。呈之于官。而官不可。號之于營。而營不聞。則生等於此。復何爲哉。祗當相率。而向院拜辭先師。退伏杜門。以自訟其不能保守賢規。無所依歸以終身也。自爲憂。則誠如此。而猶復爲閤下。不能無私憂。而切切然慨惜之者。閤下黑頭。擁節延譽。一省歌頌載路。而一受偏辭。偶失照勘。使一邦人士。獨抱向隅之歎。則有菀棠陰不瑕。有何於淸光耶。所以然者。生等七十年苦心血爭之餘。牽補到今日。罔非賢生梗之弊。
當指名報營。以此知悉向事。
夕後。上村五六人來見。復申通任之言。牢却而送之。聞所謂彼輩新任權也至也。日里堅臥不到云新任權必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