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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10+KSM-WM.1861.4717-20180630.00000001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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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1년 4월 22일 / 哲宗 12 / 辛酉
날 씨 비가 내리다.
내 용
어제 저녁에 하상(河上) 류도성(柳道性) 군이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일소(一所)는 서울 편지를 보니 상시관(上試官)이 초기(抄記)를 올린 까닭으로 응강을 멈춘 지 수 일째이다."라고 하니, 남은 희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시(殿試)가 이달 25일에 있고, 牲畫 또한 마땅히 24일 전에 행할 것이니 비록 수일 동안 정지했더라도 만약 혹 참방했다면 어찌 지금까지 듣지 못했겠는가? 세상만사를 푸른 하늘에 맡길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작년 봄 이후로 상고(喪故)에 골몰하여 괴로움에 눈썹 펼 날이 없었고, 올봄에는 아이들의 과거 일이 또 이 지경에 이르니 이놈의 명수가 곤궁한 것이 아님이 없다. 크게 탄식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생각건대 반 천리 길인 먼 길에 행색이 곤궁하고 주머니 또한 비었을 것이니 어떻게 먼 길을 오겠는가?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어버릴 수 없다. 저녁에 한 면에 있는 산을 유람하는 노반(老伴) 수십 명이 왔다. 잠시 뒤에 풍산(豊山)에서 회문(回文)이 있었는데, 바로 청성서원(靑城書院)의 사통(私通)이었다. 이에 의하면 삼[麻] 때문에 감애(甘厓) 권혁부(權赫孚)포저(浦底) 홍양후(洪亮厚) 형이 관에서 붙잡아간 일이 있었으니, 대개 두 사람이 지난달 사이에 관찰사에게 정소(呈訴)한 소두(疏頭)이기 때문이다. 내일 봉암 면회(鳳岩面會)를 정하여 장차 부(府)에 들어가려고 한다. 같이 걱정하는 마음에는 매우 옳은 일이지만 지금 세상의 풍도에 과연 일제히 앞장서겠는가? 탄식만 더할 뿐이다. 송지(松枝) 박태원(朴泰元)의 아우가 서울에서 비로소 돌아와 전하기를 "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의 괘첨(掛籤)이 너무 늦어서 일소(一所)의 가장 끝에 이름이 적혔다."라고 하니, 이 또한 합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어찌 여론을 믿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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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二日。
雨。昨夕河上柳君道性抵家姪書曰。一所則見京札上試抄記之故停講數日云。似有餘望。而殿試在今廿五日。牲畫亦當於廿四前行之。雖數日停之。若或參榜。豈可至今未聞也。世間萬事。非不知付之蒼蒼。而自昨春以後。滾汨喪憂。苦無展眉時日。今春兒少之科事。又至於此。莫非此漢之命數奇窮也。浩歎何益。且念半千脩程。困困行色。囊槖亦竭。其何以跋涉也。欲付之忘域而不得也。夕一面遊山老伴數十員來到。俄而自豊山有輪回文字。卽靑城私通。據以麻甘厓權赫孚浦底洪兄亮厚自官有推捉事。蓋兩人去月間爲呈營狀頭故也。明日定鳳岩面會。將欲爲入府。同患心意則甚是。而今世風氣果一齊直前否。只增慨歎。松枝朴泰元之弟。自京始還。傳宇兒掛籤太晩。爲一所之最末字云。此亦非得中之事也。豈可以物論準信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