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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10+KSM-WM.1550.4717-20180630.00000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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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550년 12월 11일 / 明宗 5 / 庚戌
내 용
연곡(燕谷)의 서북쪽 (庚座)이며, 거북모양의 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아아, 화(禍)가 일어나는 것은 일어 난 날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일어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선군(先君)의 화(禍)는 청홍감사(淸洪監司) 때에 일어 난 것이 아니라 갑진(甲辰: 1544년) 대사헌 때에 잉태된 것이다.
선군께서 대사헌으로 계실 때 이기(李芑)를 재상(宰相)으로 삼는 일을 논박 하셨는데, 이기는 마침내 그것을 깊은 원한으로 품었다. 이듬해,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시고 군소배들이 교대로 난리를 피우자 돌아서서 즉시 그들의 죄에 대해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기가 나라의 원훈(元勳)으로써 위기를 틈타 평소에 눈을 흘기는 작은 원한을 보복함으로써 자기를 논박했던 대관(臺官)은 모두 죽이거나 쫓아냈다. 오직 선군과 이윤경(李潤慶)【당시 대사간(大司諫)이었으나 침묵하고 시비를 말하지 않았다.】, 이치(李致)【당시 헌납(獻納)이었다.】만 간신히 보존하였다. 경술년 여름, 이윤경이 파직당하고 오직 나의 선군과 이치만 면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이것이 실재 화의 근원이었다.
이홍윤(李洪胤) 집의 재물을 적몰한 후에 그의 형인 전 첨정(僉正) 홍남(洪南)홍남은 바로 약빙(若氷)의 아들인데, 약빙이 죽음을 당한 후 연좌되어 축출되었다.】이 이치에게 "무슨 무슨 물건은 홍윤의 물건이니 마땅히 적몰하고, 무슨 무슨 물건은 원래 나의 물건이니 함께 적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선군께 고했다. 선군께서 "홍남이 그 물건을 환추(還推)하여 어디에 쓰겠다던가? 그 사람도 참! 그 사람도 참!"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전파되어 홍남이 그 말을 듣고 자기를 나쁘게 말한 것에 원한을 품었다. 그 후 조정은 홍남에게 대의멸친(大義滅親)【홍윤의 난은 홍남이 고변한 것이다.】한 공으로 특별히 임금께서 서용(敍用)을 명하여 뜻을 얻었다. 선군의 말씀을 미워하여 처남 원호변(元虎變)【정랑(正郞)이다.】에게 거짓을 알렸고, 호변은 또 이무강(李無彊)에게 거짓을 알렸다. 무강호변의 거짓말을 믿고 이기의 원한을 알아서 마침내 이 화(禍)에 부채질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혹 선군께서 기미를 살피고 조치하지 못해서 이러한 변고를 당했다고 여겼는데,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당시 단지 홍남의 일만 있었다면 오히려 용퇴(勇退)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기의 일은 헤아리지 못한 상황에서 나왔다. 이기를 논박할 때 인조께서 돌아가신 뒤에 그가 세력을 마음대로 행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은 비록 옛날 사리에 밝아 자신의 몸을 보존한 사람이라도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다.
선군께서는 을사(乙巳: 1545년 을사사화) 이래 스스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려 생각하였지만 되지 않아 억지로 벼슬살이를 하셨다. 일찍이 병오년(丙午年: 1546년)간에 성묘를 하기 위해 휴가를 받고자 하였는데 먼저 이기에게 거절을 당하였다.【대체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가려는 사람은 먼저 재상에게 품신(稟申)한 후에 수유장(受由狀)을 올리는데, 재상이 물리치면 계를 올릴 수 없다.】 그러니 휴가도 오히려 받을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벼슬을 버리고[掛冠] 물러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선군께서는 때때로 홀연히 즐거워하지 않으며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얼굴에 근심을 띠며 "벼슬살이로 2품에 이른 것은 비록 포의(布衣)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나는 즐거운 뜻이 없구나."라고 하셨다. 만년에 이지사(李知事)[이현보(李賢輔)]가 고상히 물러난 것을[高退] 부러워하시며 말씀하시길 싫증내지 않으셨다. 관아에서 벼슬살이를 한 일 외에 사람들을 부르고 어울리는 일이 조금 있었지만 집안은 적막하였다. 자녀의 혼사에 있어서도 중매자가 재상가(宰相家)를 말하는 것 같으면 곧바로 사양을 하고 "성대하고 가득함을 밟아도 그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빌미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이렇게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권세 있는 가문과 맺어지면 훗날 남은 화가 서로에게 미칠까 두렵구나!"라고 하시며 하나도 허락지 않으셨다. 모두 선군께서 평소에 가진 뜻이었는데 변고가 이유 없이 생겨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다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아아, 원통하다! 이 일의 전말(顚末)을 우리가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해가 갈수록 그것을 혹여나 잊을까 두려워 이것을 글로 써서 보관한다. 때는 기묘(己卯: 1579년) 중추(仲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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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十二月十一日。
葬于燕谷乾來庚坐龜形之山。嗚呼。禍之作不作於作之日。必有所由起。我先君之禍。不作於淸洪監司之日。而胎於甲辰大司憲之時也。先君爲大憲時。駁李芑之爲相。芑也遂深銜之。越明年。仁廟賓天。群少交亂。而旋卽咸伏其辜。芑以國之元勳。乘其危疑。以報平日睚眦之怨。駁己臺官盡爲死徙。而惟先君及李潤慶【其時大諫。而含默不言其是非。】李致【其時獻納也。】勤得保全。至庚戌夏。潤慶見罷。而獨我先君及李致之免。人皆危之。此實禍之本也。而又有李洪胤家財籍沒後。厥兄前僉正洪男【洪男乃若氷之子。若氷被死後。洪男緣坐見逐。】言於李致曰。某某物洪胤之物。宜乎籍沒。某某物則本爲我物。不必幷沒。幸須見惠。有人以此告于先君。先君曰。洪男還推其物於何用之乎。以彼哉彼哉言之。此說傳播。洪男聞之。銜其非己。其後朝廷以洪男大義滅親。【洪胤之亂。洪男告之。】特命敍用。旣得志。嫌先君之言。譖于其妻娚元虎變。【正郞也。】虎變又譖于李無彊。無彊信虎變之讒。知李芑之怨。終煽此禍。人或有以謂先君不能見機而作。以遭此變。有不然者。當時只有洪男之事。則猶可以勇退。惟此李芑之事。出於不圖。方其駁芑之時。誰知遽至於鼎湖龍去。芑之恣行勢力也哉。此雖古之明哲保身者難處之事也。先君自乙巳以來。自知禍之不免。思欲引退而未得。黽勉從仕。嘗於丙午年間。將欲省楸受由。先辭於李芑。【大抵受由還鄕之人。先稟於宰相。然後呈受由狀。而退不可則不出。】然則受由尙不可得。況掛冠而退乎。是故先君有時乎忽忽不樂。仰天太息。憂形于色曰。仕宦而至二品。雖布衣之極。予無樂志。晩年欽羨李知事之高退。言之亹亹不厭。衙仕之外。小有徵逐。門庭寂然。至於子女婚嫁。如有媒者言宰相家。則辭而不許曰。履盛滿不止。人之所祟。方此危難之時。結於權勢之門。而恐其他日餘禍之相及也。一不見許。皆先君素志。而變生無妄。以至於斯。豈非天也。嗚呼痛哉。此事顚末。㝯等所不忘者也。第以歲久年深。恐其或忘。書而藏之。時維己卯仲秋也。

주석

눈을 흘기는 작은 원망을 보복함으로써: 이와 관련하여 《사기(史記)》 권79 〈범수열전(范雎列傳)〉에 “밥 한 공기의 은혜도 반드시 갚고, 한 번 노려본 원망도 반드시 보복하였다.〔一飯之德必償 睚眥之怨必報〕”라는 내용이 보인다. 대의멸친(大義滅親):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위(衛) 나라 대부 석후(石厚)가 공자(公子) 주우(州吁)와 함께 환공(桓公)을 죽이니, 그의 아버지 석작(石碏)이 그 아들을 죽였다. 군자가 “석작은 순실한 신하이다. 주우를 미워하는데 석후가 거기에 참여하였으니, ‘대의를 위해 친속을 멸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평하였다. 《春秋左傳 隱公 4年》 견기이작(見機而作): 『주역』에 나오는 말로 기미를 보고 미리 대처를 한다는 뜻으로 벼슬하는 사람들이 가져할 철칙이었다. 논어 헌문(憲文)에 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방유도 위언위행 방무도위 행언손)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되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행동은 바르게 해야 하지만 말은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신에 닥쳐 올 앙화를 도외시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을 바르고 충성스런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정호룡거(鼎湖龍去): 정호는 하남성(河南省) 형산(荊山) 아래에 있는 지명으로, 황제(黃帝)가 형산 아래서 솥[鼎]을 주조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제가 솥을 다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군신과 후궁으로 함께 따라 올라간 자는 70여 인이었고, 여기에 함께 따라가지 못한 소신(小臣)들은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명철보신(明哲保身): 난세(亂世)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몸을 보전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7장의 “군자는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않는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 그의 발언은 흥기(興起)시키기에 충분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 그의 침묵은 용납받기에 충분하다. 《시경》에 ‘현명한데다가 사려가 또 깊어서 자기 몸을 보전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居上不驕 爲下不倍 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黙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경》의 내용은 〈증민(烝民)〉에 나온다. 포의(布衣, 삼베옷을 입은 사람 즉 평민)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으로[布衣之極]: 장량(張良)이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天下)를 통일하고 유후(留侯)에 봉해지고 나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지금 세 치의 혀로써 제왕의 스승이 되어 만호에 봉해지고 열후가 되었으니, 이는 포의에게 극도의 영광으로서 나에게는 더없이 만족할 뿐이다. 이제는 인간의 일을 다 버리고 선인 적송자를 따라서 노닐고 싶을 뿐이다.〔今以三寸舌 爲帝子師 封萬戶 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足矣 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游耳〕”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성대하고 가득함을 밟아도 그치지 않으니: 履盛滿而不止 자치통감 중 사마광(司馬光)이 한신(韓信)과 소하(蕭何)의 공명이 극에 달했으면서도 물러날 줄을 모르다가 한 사람은 죽음을 당하고 한 사람은 불우한 말년을 보낸 것을 논평하는 말에 나옴. 변고는 이유 없이 생기니[變生無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받는 재앙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無妄卦) 육삼(六三)〉의 “애매하게 당하는 재앙이다. 누군가가 매어 둔 소를 길 가는 사람이 훔쳐 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누명을 쓰게 된다.〔無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