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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10+KSM-WM.1550.4717-20180630.00000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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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550년 8월 5일 / 明宗 5 / 庚戌
내 용
파루(罷漏) 후에 우리들이 문으로 나아가 뵙고 묻기를 "어제 계(啓)한 바에 구수담(具壽聃)과 붕비(朋比)했다는 것과 고변한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말에는 어찌 대처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가군(家君)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닌데 어찌 승복하겠는가.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다면 어찌 할 수가 없다."라고 하셨다. 말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억누르며 물러났다.
가군(家君)께서 다시 원정(元情)을 올려 말씀하셨다. "전지(傳旨)의 말뜻대로 추고를 받고 있는 가선대부 한성우윤 55세의 이해(李瀣)가 아뢰옵니다. 전후 전지의 말씀뿐만 아니라 사헌부가 가져 온 문서 안에는 유신(維新) 역당(逆黨) 전민재산(田民財産) 등을 차사원(差使員)이 계문(啓聞)차 추쇄한 개록(開錄)에 첩보(牒報)하기를 ‘죄인 최흡(崔洽)의 침장(沈醬) 단지 셋 등 물품 8건, 안희봉(安喜逢)안희우(安喜遇)의 파건(破件)·교포직령(交布直領) 하나 등의 물품 6건, 안매(安邁)의 파건(破件) 8승·목면유(木綿襦)·중치막(中赤莫) 하나 등의 물품 6건, 배몽성(裵夢星)의 파건(破件)·빈 장롱 셋 등의 물품 2건, 차헌지(車獻之)의 파건(破件)·도두음일부(道豆音一浮)등의 물품 6건, 최대수(崔大受)의 파건·안장(鞍裝) 하나 등의 물품 18건, 이복기(李福基)의 감찰교직유(甘察交織襦)·철릭[天益]하나 등의 물품 6건, 최대립(崔大立)의 침장(沈醬) 단지 둘 등의 물품 7건, 이휘(李揮)의 중건(中件)·노루 가죽신 하나 등의 물품 12건, 최대관(崔大觀)의 평교자(平轎子) 1개·팔구(八具)등의 물품 39건, 손수공(孫守恭)의 파건(破件) 7승·목면(木綿)·단직령(單直領)하나 등의 3건, 연애(延璦)의 중건(中件) 9승, 자유(紫襦)·철릭[天益] 하나 등의 물품 18건, 우수평(禹守平)의 파건(破件)·녹피(鹿皮)·철릭 하나 등의 물품 11건, 강유선(康惟善)의 파건(破件) 10승·초록유(草綠襦)·철릭 하나 등의 물품 29건, 최순학(崔舜鶴)의 파건(破件)·포직령布直領) 하나 등의 물품 13건, 이홍윤(李洪胤)의 씨를 발라낸 목화를 넣은 바구니 1개 등의 물품 67건, 이유성(李有成)의 파건(破件)·빈 상자 1개 등의 물품 4건, 최대◘(崔大◘)의 중건(中件)·백모시포·가가라(加可羅) 하나 등이 물품 16건, 손수양(孫守讓)의 중건(中件)·감찰목면(甘察木綿)·겹저고리 하나 등의 물품 7건, 손수검(孫守儉)의 중건(中件)·감찰목면수직령(甘察木綿襦直領) 하나 등의 물품 4건을 마음대로 효주(爻周)하고 본주인에게 환급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정랑(呈琅)의 전(田) 13고(庫 무엇인지 모르겠음)를 정랑의 비부(婢夫)인 보리금(甫里金)과 호노(戶奴)인 옥산(玉山) 등의 이름이 붙은 것이라며 환급한 사연을 아울러 추고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 또 이몸이 앞서 법사(法司)로서 전지를 받든 함문(緘問)에 청홍감사 재직시 유신 역당의 누락된 노비를 본현에서 추쇄첩보하라 하였거늘 본주인에게 돌려 주라고 명했다고 추문하라 하시어, 위와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항의하였습니다. 또한 전답재물을 함부로 내주었다며 추문케 하셨습니다. (그것은)논이 아니라 밭인데 이몸이 무단히 환급한 것이 아닙니다. 차사원(差使員)인 연풍현감(延豊縣監) 여세침(呂世琛)의 첩보에 죄인 정랑(呈琅)의 비부(婢夫) 보리금(甫里金)과 호노(戶奴) 옥산(玉山)의 밭이라고 하나, 정랑 본인의 것인지 여부를 분별할 수 없어 다시 상세하게 알아보고 첩보하도록 회송한 터에 또 옆 고을의 색장(色掌)들이 죄인 정랑의 어머니쪽 계집종 신금(申今)의 남편 보리금의 이름이 붙은 모모(某某) 자(字)의 밭 몇 속과 남자 노비 옥산(玉山)의 이름이 붙은 모모(某某) 자(字)의 밭 몇 속은 숙전(熟田)으로 저들이 해마다 경작하여 소출을 그의 상전 정랑에게 바쳤다고 공초(供招)하였으니 위 밭들은 정랑의 물건입니다. 동 보리금의 이름이 붙은 모모(某某) 자(字)의 밭 몇 속과 옥산의 이름이 붙은 모모(某某) 자(字)의 밭 몇 속은 속전인데도 그들이 사경전(私耕田)이라고 첩정(牒呈)한 것이니 모모 밭도 정랑의 물건임이 확실합니다. 나머지 밭은 보리금 등이 자기 사경전(私耕田)이라고 하므로 모두 다 공가(公家)로 귀속시키면 온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차사원이 보고한 대로 본주인인 보리금에게 되돌려 주라고 다시 회송한 것이지, 죄인에게 되돌려 준 것은 아닙니다. 재물(財物)도 차사원의 첩보 공문을 친히 점검했으나 관련된 물건 중 요긴하지도 않거니와 자질구레하고 부서진 잡물들은 공가(公家)로 소속된 후에는 이미 관물(官物)이 되어 그 가운데 혹시 잃어버리거나 부서지거나하면 담당자들이 죄를 쓰고 변상하게 될뿐더러 수령이 교체될 때 해유(解由)하여 전장(傳掌)하게 되니 쓸모없고 요긴하지 않은 물건은 도리어 관가에 해만 끼칠 뿐이라고 망령된 생각을 하여 그 중에서 더욱 자질구레하고 부서진 물건은 효주하고 계본(啓本)에는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고 본주인에게 환급한 것은 아닙니다. 위와 같이 시킨 것은 이 몸이 혼망하고 생각을 잘못하여 시행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다른 사유는 없었습니다. 무릇 행사와 의논은 반드시 서로 좇아 찾으며 오가야, 사귐이 친밀[款密]해지고 정을 토로하고 의논을 하는 것인데, 구수담(具壽聃)이 출신(出身) 이후 20년간 일체 찾아오지 않았사오며, 이 몸도 본래 성품이 어리석고 고루하며 어울리기 싫어하여 비단 수담(壽聃)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이 몸과 서로 좇아 친교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물며 이 몸은 정미년(丁未年 1547년) 4월에 황해감사에 제수되어 무신년(戊申年 1548년) 6월에 체직(遞職)되어 왔고 같은 해 10월에 청홍도 관찰사로 제수되어 지난해(1549년) 12월에 체직되어 와서 한양에 있었던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수담과 붕비하여 행사를 의논하기를 함께 하지 않음이 없고, 시비를 전도하여 인심을 어지럽게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지난 해 가을 유신현감(惟新縣監) 이치(李致)의 첩정(牒呈)에 최하손(崔賀孫)이라는 사람이 형제 불화의 죄를 짓고 의주에 입거(入居)하였다가 무단히 도망하여 현(縣)으로 돌아와 은밀히 그의 전민(田民)과 접촉하고 서로 송사(訟事) 한다면서 유연(留連)하며 복귀하지 않으니 도망 온 연유를 추문하겠다고 청보(請報)하기에 입거도망(入居逃亡)은 법에 따라 형문(刑問)하라고 회송(回送)하였습니다. 후에 동현감(同縣監)이 다시 보고하기를 전에 보고 드렸던 최하손은 죄가 무거운 입거인(入居人)으로서 무단히 도망 온 연유를 형문하던 중에 관계도 없는 향중(鄕中)의 회문(回文)을 가지고 고변하겠다고 발악하며 공초를 거부한다고 했는데,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중한 죄를 모면하려는 정상(情狀)이 매우 심하여, 말한 바를 수리(受理)하지 말고 지난번에 첩보(牒報)한 내용으로 형추하라고 다시 회송하였더니, 병 때문에 형신(刑訊)을 한 번 받은 뒤에 물고(物故)되었다는 것을 첩보를 보고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사소하지 않은 고변의 일을 정에 맡겨 저알(沮遏)하고, 상달하지 못하도록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본래 못 났지만 누조(累朝)에 걸쳐 성은을 받아 분수에 넘치게 2품까지 올랐습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정성을 하늘의 해는 비추어 알 것입니다. 오직 마땅히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으로 견마의 노력(犬馬之勞)을 하려는 것이 신이 간직한바 마음입니다. 전고에 드문 대역부도(大逆不道)한 무리라면 절친하게 교우하는 사이라하더라도 반드시 사사로운 정으로 용납하면 안 되는 일인데 이 몸이 홀로 군신의 의리를 모르고 군상(君上)도 없이 단지 사사로운 정으로 차마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이 있을 리가 만무하오니 서로 참고하시어 분간(分㨂)하여 시행하시옵기 바랍니다."라고 하셨다.
추관(推官)이 말하길, "옥중에 내척간[內擲奸: 대궐 내에서 부정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일]의 때가 있을 것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라고 했다. 가군(家君)을 중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옮겼다. 우리는 형옥지기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오랏줄과 같은 형구를 벗겨달라고 청했다. 옥지기가 말하길, "하교하시지 않아도 저희들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즉시 칼과 톱을 가지고 잠입하여 잘라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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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五日。
罷漏後。子等進省于門。問曰。昨日所啓與具壽聃朋比告變人撲殺等語。何以對之。家君曰。非我所爲。豈可服乎。事已此極。無如之何矣。恐有漏泄。未敢展達。掩抑而退。○家君再陳元情曰。傳旨是白乎等用良推考次。嘉善大夫漢城右尹李某。年五十五白等。前後傳旨內辭緣是白沙餘良。司憲府以取來文書內。惟新逆黨田民財産等乙。差使員亦啓聞次。以推刷開錄牒報爲有去乙。罪人崔洽沈醬三瓮等物八件。安喜逢安喜遇破件交布直領一等物六件。安邁破件八升木綿襦中赤莫一等物六件。裴夢星破件空籠三等物二件。車獻之破件道豆音一浮等物六件。崔大受破件鞍子一等物十八件。李福基破件八升甘察交織襦天益一等物六件。崔大臨沈醬瓮二等物七件。李揮中件白獐皮靴一等物十二件。崔大觀平轎子一所入具等物三十九件。孫守恭破件七升木綿單直領一等物三件。延璦中件九升紫襦天益一等物十八件。禹守平破件鹿皮天益一等物十一件。康惟善破件十升草綠襦天益一等物二十九件。崔舜鶴破件布直領一等物十三件。李洪胤去核綿花入籠一等物六十七件。李有成破件空箱子一等物四件。崔大◘中件白苧布加可羅一等物十六件。孫守讓中件甘察木綿袷赤古里一等物七件。孫守儉中件甘察木綿襦直領一等物四件乙。擅自爻周還給本主叱分不喩。呈琅田十三庫乙。呈琅婢夫甫里金戶奴玉山等名字付稱云。還給辭緣幷以推問敎是臥乎在亦。矣身前矣。法司以捧傳旨緘問內淸洪監使時。惟新逆黨漏落奴婢本縣推刷牒報爲有去乙。令還給本主是如。推問敎等用良。右良使內乎所。無白乎。辭緣抗拒爲白有如乎節段。田畓財物乙。擅給是如。推問敎是白置。畓不喩田庫是白在果。矣身無端擅給爲白乎所不喩。差使員延豊縣監呂世琛牒報內。罪人呈琅婢夫甫里金戶奴玉山田是如爲白乎矣。呈琅己物與否乙。分辨不冬爲白有去乙。更良詳悉相考牒報。亦回送爲白乎亦中。更報內切鄰色掌等亦上項罪人呈琅母邊婢申今夫甫里金名字付某某字田幾卜束。奴玉山名字付某某字田幾卜束段。熟田以年年耕作所出乙。其矣上典呈琅處納上爲臥乎所。供招是白去等。右田等段。呈琅己物是白齊。同甫里金名字付某某字田幾卜束。玉山名字付某某字田幾卜束段。甫里金等亦續田以其等徒自己私耕田是白乎所。牒呈爲白良在乙。某某字田段。呈琅己物的實爲白在果。其餘田段。甫里金等自己私耕田是白去等。幷以屬公未穩爲白乎去。計料差使員所報貌如。本主是白在甫里金等還給亦回送爲乎事是白遣。罪人還給爲白乎所不喩是白齊。財物段置。差使員牒報公文乙。親自點檢爲白乎矣。關重之物以乎爲白在果。不緊細瑣破件雜物段。屬公後已爲官物是白在如中。或遺失或破毁。則典守者受罪生徵爲白沙餘良。守令遞代時解由幷錄傳與傳掌爲臥乎事是白去等。無用不緊之物徒爲官家貽弊叱分。妄料其中尤甚細瑣破件段爻周。啓本不錄叱分是白遣。本主還給爲白乎所不喩是白齊右良使內乎所。矣身昏妄錯料。施行遲晩叱分是白遣。他無情由爲白齊。凡矣議論行事乙。必須追尋往來。相交款密爲白良沙。吐情議論爲乎事是白去等。具壽聃亦自出身後二十餘年間。一不來訪爲白乎旀。矣身置。性本愚戅。孤陋寡合乙仍于。非但壽聃。他餘朋僚段置。矣身果相從交親者鮮少爲白置。況旀矣身去丁未年四月分黃海道監司除授。戊申年六月分遞來。同年十月分淸洪道觀察使除授。前年十二月分遞來。在京日月無幾爲白去等。具壽聃果朋比議論行事乙。無不與同。使是非顚倒。人心携貳爲白乎所。專亦無白齊。前年秋節分。惟新縣監李致牒呈內。崔賀孫稱名人亦兄弟不和罪。以義州入居爲有如可。無緣逃還縣土隱接。其矣田民相訟稱云。留連不歸是如。逃來辭緣推問爲良。結請報爲白有去乙。入居逃亡以依法刑問亦回送。後同縣監亦更報內。向前崔賀孫亦罪重入居人。以無緣逃亡情由刑問次。不干鄕中回文持是旀。告變爲乎爲。發惡拒招是如爲良在乙。假稱虛事。謀免重罪爲臥乎去。情狀過甚亦所言受理除良。前所報辭緣以刑推亦更良回送爲白有如乎。刑訊一次後。因病物故是如牒報叱分見知爲乎事是白遣。不小告變事乙。任情沮遏。使不得上達。以致杖斃爲白乎所無白齊。矣身本以無狀。誤蒙累朝恩私之濫。職至二品。區區微忱。天日照臨。但當夙夜恪謹。終始一心。欲效犬馬之勞。是臣所蘊是白去等。前古罕有大逆不道之類乙。必于切親交友之間是白良置。不容私情事良中。矣身獨亦不知君臣之義。不有君上。只用私情。忍護逆賊爲白乎所。情理萬無爲白良尒。相考分揀施行敎事。○推官曰。獄中或有內擲奸扞〖奸〗之時。不可忽也。遂移家君于重間。子等厚賂刑獄直。請脫縲紲 之具。獄直曰。雖不下敎。渠等何敢不然。卽以刀鋸。潛入而截去。